안녕 디에디트의 노예 김작가다. 내가 살던 고향에는 자랑거리가 없었다. 시골에 가까운 한적한 마을이었다. 고등학교는 단 두 개뿐이었고, 중학교도 두 개, 초등학교는 고작 하나였다. 롯데리아가 유일한 카페였고, 밤이 되면 길거리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이 가로등 불빛만 조용히 켜져 있었다. 가끔은 그런 분위기가 그리워져 고향으로 내려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서울에서 공간을 발견하는 재미에 빠졌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에도 영화관이나 카페는 있지만, 서울처럼 매일 같이 생겨나는 공간을 품은 도시는 많지 않으니까.
작년까지 연남동 죽돌이였던 나는 점점 붐비는 인파와 개성을 잃은 공간에 싫증 났고, 갈 곳을 잃었다. 이태원도, 망원동도, 성수동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러던 내게 을지로는 한 줌의 빛이요, 소금이었다. 그래서 소개한다. 을지로에 가서 한 번쯤 들리면 좋은 다섯 공간이다.
을지다방
이곳은 다방이다. 카페가 아니라 다방. 1985년에 만들어진 다방답게 일단 차림표부터 다르다. 생강차, 냉칡즙, 쌍화차. 웬만한 카페에는 기본적으로 있는 카페모카나 프라푸치노 같은 세련된 외래어는 없다. 또 다른 카페와 다른 점은 음악이 없다는 점이다. 다방을 가득 채우는 소리는 커다란 난로가 내는 ASMR 같은 소리뿐이다. 적막한 공간을 차지한 느낌이 생경하다. 난로 근처에 자리를 잡자 아주머니는 하이트 맥주잔에 보리차를 내어오셨다. 이것이 을지다방의 웰컴티다.
을지다방의 시그니처 메뉴는 쌍화차. 계피에 단맛이 섞인 달짝지근한 맛이 일품이다. 대추, 잣 같은 것들이 들어가 식감도 좋다. 더 달게 먹고 싶다면 테이블마다 올려진 설탕을 덜어 넣자. 테이스터스 초이스라고 적힌 흰설탕통에는 흰설탕이 가득 차 있다.
아, 그리고 쌍화차를 주문할 때는 달걀을 넣을지 말지 선택할 수 있다. 차와 달걀을 함께 먹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겠지만, 달걀은 잘 코팅되어 있어서 맘먹고 노른자를 괴롭히지만 않으면 쉽게 부서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쌍화차에 몸을 담근 노른자는 무척이나 귀엽게 생겼다. 나중에 쌍화차 레벨업을 한다면 달걀을 한번 터뜨려서 섞어서 먹어보자. 사실 나도 그렇게는 안 먹어봤지만, 아주머니가 분명히 그렇게 먹어도 된다고 말했단 말이다.
- 서울 중구 충무로 72-1
- 평일 07:00 – 19:00 / 토요일 7:00 – 17:00(일요일 휴무)
서울식품
“위이이이이잉, 위이이이잉.” 혁오의 노래가 아니다. 쇠가 절단되는 거친 소리,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가 골목 곳곳에서 들린다. 서울식품은 그 알 수 없는 골목을 지나가면 나온다. ‘이곳에 정말 식당이 있을까?’하는 생각을 세 번쯤 한 뒤 코너를 꺾으면 서울식품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서울식품은 1층 주방, 2층 식당으로 이루어져 있고, 2층에 자리를 잡은 뒤 1층으로 내려가 주문을 하면 되는 프로세스를 자랑한다. 아주머니 혼자 요리를 하고 따로 서빙을 하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셀프. 수저도, 김치, 그릇도 간장도 모두 셀프다.
술을 마시고 싶으면 냉장고에 든 아무 술이나 꺼내고 마신 뒤 나중에 계산할 때 “사실 저는 소주를 4병 마셨습니다”하고 거짓 없이 고하면 된다. 나는 토요일 낮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방문했는데, 그곳은 낮술의 성지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약 10개의 테이블이 있었는데 이미 네 개의 테이블이 차 있었고, 손님도 20대부터 40대까지 다양했다. 그들의 테이블에는 이미 소주나 막걸리가 올라가 있었다.
다들 무엇을 먹나 유심히 보니 기본적으로 부추전은 하나씩 있더라. 나는 부추전에, 굴전 그리고 서울식품의 시그니처인 짜파게티를 함께 시켰다(참고로 짜파게티는 메뉴판에는 없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가격이었다. 부추전은 4,000원, 굴전은 6,000원. 가격이 싸다고 해서 맛이 없거나 양이 적지도 않았다.
입안에 넣은 부추가 가득 씹혔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입에 침이 고인다. 유독 술 마시는 장면이 많은 홍상수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눈 오는 날 맥락 없는 대화를 하는 친구들의 술자리였는데, 나도 추운 겨울이 지나기 전에 다시 이곳을 친구들과 찾아오고 싶었다.
- 종로구 종로 18길 32
- 평일 10:00 – 22:30 / 토요일 10:00 – 19:00(일요일 휴무)
평균율
평균율 역시 발견하지 쉽지 않았다. 한자로 작고 조그맣게 적힌 간판만 달랑 있을 뿐이다. 을지로에 있는 대부분의 공간들이 이렇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 의심하고 또 의심하며 걸어가야 한다. 홍대나 강남에 ‘나 여기 있어요!’하고 소리치는 것 같은 네온사인을 좋아하지 않는 터라 내게는 이런 보물찾기가 더 취향에 맞긴 했다. 알만한 사람만 오라는 도도한 매력.
2층으로 올라가면 오래된 철문이 나오고, 문을 열기도 전에 문틈 사이로 재즈가 새어 나온다. 난 이때부터 느꼈다. 평균율이 나의 을지로 1픽이 될 거라는걸.
평균율은 바이닐 뮤직 카페&펍이다. 모든 음악을 바이닐로 재생하며 낮에는 커피 밤에는 술을 판다는 뜻이다. 커피가 제조되는 Bar 옆에는 두 개의 턴테이블이 있고, 공간 양 끝에 위치한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음악이 흘러나왔다.
상당한 막귀력을 자랑하는 나는 바이닐 특유의 질감 같은 것은 느끼지는 못하지만, 노래가 좋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나의 드립커피를 제조해줬던 바리스타는 틈틈이 가득 진열된 바이닐을 뒤지며 다음에 재생할 노래를 준비시켜놓곤 했다. 바리스타였다가 DJ가 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평균율이 더 마음에 들었다. 바이닐을 고르고, 교체하기 위해 턴테이블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는 그 모든 것이 평균율에서 느낄 수 있는 공간의 매력이었다.
- 서울 중구 충무로4길 3
- 커피 12:00 – 17:30 Bar 18:00 – 24:00(일요일 휴무)
에이스포클럽
에이스포클럽은 옛날 이화다방이 있던 자리에 새로 생긴 ‘낮카밤바(낮엔 카페 밤엔 바)’다. 60년간 을지로를 지켰다는 이화다방은 을지다방처럼 어르신들이 찾아 담소를 나누고 쌍화차를 마시는 그런 공간이었다. 이 카페가 다른 ‘힙지로’의 성지와 다른 이유다.
빈 공간이나 사무실을 카페나 식당으로 바꾼 곳들과는 달리 에이스포클럽은 기존의 다방을 물려받았다. 실제로 이곳의 주인은 이화다방이 힘을 잃어가는 모습이 안타까워 개조를 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입구와 간판에는 여전히 이화다방이라는 이름이 흔적처럼 남아있다.
이곳은 낮에는 카페, 밤에는 술을 파는 곳이지만, 낮이라고 커피만 팔지는 않는다. 낮술은 언제나 환영. 주종은 맥주, 하이볼, 와인과 위스키, 칵테일까지 상당히 다양하게 취급하고 있었다. 커피 종류는 아메리카노, 플랫 화이트 등 네 종류에 불과한 것에 비해 주종이 훨씬 많은 것을 보니 이곳은 확실히 술 마시기에 더 좋은 곳 같았다. 테이블 수가 많지 않아서 손님이 가득 차도 시끄러울 것 같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인테리어 하지 않고, 인더스트리얼이라고 말하는 카페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도 스타일이라면 스타일이겠지만 무성의를 스타일이라고 우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에이스포클럽은 목재로 장식된 인테리어에 이화다방의 60년을 잇는 따뜻한 이야기까지 더해진 공간이다.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가 조화로운 공간이었다.
- 중구 을지로105 2층
- 평일 12:00 -24:00 / 금요일 12:00-02:00 / 토요일 14:00- 02:00 / 일요일 17:00-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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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