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글 써서 번 돈, 글씨 쓰는 데 쓰는 객원 에디터 오우리다. 글, 그림, 사진 등 여러 형태의 기록 모두 좋아하지만 가장 오랜 취미는 ‘글씨 쓰기’다. 나의 쓰기 생활을 더 즐겁게 만들어준 도구가 있다. 필통 속 볼펜과 연필의 자리를 야금야금 차지해 버린 만년필이다.
만년필에 빠진 계기는 단순하다. 아름다운 물성에 반했기 때문. 막상 사용해 보니 불편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불편한 만큼 섬세한 사용감에 더 깊이 빠져버렸다. 쓰면 쓸수록 자신의 필압과 필각에 맞춰 펜촉이 길드는, 가장 사적인 도구라는 점 또한.
상전 모시듯 아껴 다뤄야 하는 고급 만년필보다는 막 들고 다녀도 괜찮은 중저가형을 선호하는 편. 아직 만년필의 세계에 입문하지 않은 디에디트 독자들을 위해 입문용 만년필 6종을 소개한다. 이 중 여러분의 마음에 쏙 드는 반려 만년필이 있기를!
[1]
라미 사파리
LAMY Safari
독일 라미 사의 베스트셀러 ‘사파리’ 라인의 만년필. 대표적인 입문용 만년필이라 식상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빼놓을 수 없는 모델이다. 이제 막 만년필에 관심이 생긴 사회 초년생 때 선물로 받은, 나의 첫 만년필이기도 하다. 독일제인 만큼 믿고 쓰는 탄탄한 기본기와 호불호 갈리지 않는 단정한 디자인이 특징.
라미 사파리의 특징은 매년 새로 뽑아내는 다양한 컬러. 제품 업데이트 없이 컬러 장사만 한다는 혹평도 있지만 선택지가 다양한 건 누가 뭐래도 장점이다. 플라스틱 바디 특유의 가벼움도 특징인데, 이로 인해 피로감이 덜 하다는 평과 무게감이 아쉽다는 평이 취향 따라 나뉜다. 배럴 부분의 타원형 구멍으로 잉크 잔량을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만년필을 사용하려는데 잉크가 똑 떨어진 허탈함을 경험해 봤다면 저 작은 구멍에 매우 감사하게 된다.
만년필에 대해 무지했던 당시, 평소에 사용하던 메인 필기구를 라미 사파리 만년필로 대체하려다 실망만 크게 한 기억이 있다. 라미 사파리는 가장 가는 EF촉도 다른 브랜드의 EF촉보다 훨씬 굵기 때문. 낙낙한 잉크 흐름으로 두툼하게 써지는 만큼 종이에 따라 번짐도 꽤 있어 개인적으로 필기용보다는 메모, 낙서용으로 추천한다. 평소 굵은 글씨를 선호한다면 만족스러울 제품.
선물용 만년필을 찾는다면 ★︎★︎★︎★︎☆︎
나만의 개성이 중요하다면 ★︎★︎☆︎☆︎☆︎
- 제조국: 독일
- 닙 굵기: EF, F, M
- 닙 재질: 스테인리스 스틸
- 바디 재질: 플라스틱
- 잉크 충전 방식: 컨버터&카트리지 겸
- 잉크 잔량 확인: 가능
- 가격: 정가 6만 6,000원 | 최저가 2만 원대
[2]
세일러 영 프로피트
SAILOR YOUNG PROFIT
간헐적으로 사용하는 이벤트성 만년필 말고, 아무 종이에 여러 용도로 사용하기 좋은 세필촉 만년필을 찾아 헤맨 끝에 두 번째 만년필을 들였다. 만년필계의 하이테크 볼펜, 세일러 ‘영 프로피트’ EF촉이다. 만년필에 기대하기 힘든, 가늘디가는 펜촉을 찾고 있다면 세일러 만년필만 한 게 없다. 라미 사파리 EF촉과 비교하면 3분의 1 굵기로 느껴질 만큼 EF촉 중에서도 유독 가늘다.
같은 EF촉인데 브랜드마다 굵기가 다른 이유가 뭐냐고? 옷 사이즈처럼 만년필 닙 역시 국제 표준이 없기 때문. 만년필 닙 굵기가 표기상 같아도 실제 두께나 필감은 제조국이나 브랜드마다 크게 다른데, 그 차이는 주로 ‘한자 문화권 vs 알파벳 문화권’이라는 언어적 배경에서 비롯된다. 글자 획수가 많고 구조가 복잡한 한자나 한글을 쓰려면 정교한 획 표현이 중요해 세필촉이 선호되지만, 알파벳은 상대적으로 획이 적고 모양도 단순해 닙도 전반적으로 굵고 부드럽게 설계된다.
세일러 영 프로피트 EF촉은 바늘 촉이라 불릴 만큼 가는 편이라 작고 정교한 글씨를 쓰기 좋다. 만년필 전용 종이가 아니어도 번짐이 적고, 단단한 닙이 종이를 가르며 사각거리는 필감이 특징(이 부분은 호불호가 갈린다). 세일러 영 프로피트 EF촉을 만난 덕에 나의 일상 필기구를 만년필로 완전히 갈아타게 된다.
하이테크 볼펜을 좋아한다면 ★︎★︎★︎★︎★︎
부드러운 필감을 원한다면 ★︎☆︎☆︎☆︎☆︎
- 제조국: 일본
- 닙 굵기: EF, F, M, B
- 닙 재질: 스테인리스 스틸
- 바디 재질: 스테인리스 스틸
- 잉크 충전 방식: 컨버터&카트리지 겸용
- 가격: 정가 9만 9,000원 | 최저가 7만 원대
[3]
파이롯트 프레라
PILOT PRERA
두 번째 만년필 입양 후 몇 년이 지나고 파이롯트 프레라를 새로 들였다. 이유는 하나다. 잠깐 발만 담그려 했던 잉크의 세계에 빠져버리고 말았기 때문. 만년필은 기본적으로 기록 도구지만, 잉크 놀이의 세계이기도 하다. 세일러 영 프로피트의 가는 촉으로는 잉크의 색감이나 그라데이션을 온전히 즐기기 어려웠다.
은은한 바디 컬러와 크롬 포인트가 조화를 이루는 프레라는 가격대가 가늠되지 않게 세련됐다. 바디가 다소 짧지만 캡을 뒤에 꽂으면 안정적인 균형감이 생긴다. 마치 자석이 달린 듯 ‘딸깍’하고 시원하게 닫히는 손맛도 만족스럽다. 입문자용으로 늘 추천되는 모델답게 가격대도 부담 없다.
가장 인상적인 건 필감이다. 세필촉임에도 날카롭지 않고, 부드럽고 안정적이다. 굳이 단점을 꼽자면 컨버터가 작아 잉크를 자주 갈아야 한다는 것 정도? 컨버터 안에 잉크 굳음을 방지하는 쇠구슬 네 개가 들어있는 디테일 덕에 이 또한 용서된다. 파이롯트는 30만 원대든 3만 원대든 필감 차이가 없다고 할 만큼 브랜드 이름만 보고 사도 되는 만년필 브랜드다. 프레라의 디자인만 취향에 맞는다면 시필 없이도 자신 있게 구매해도 된다.
매끈한 필감의 세필을 원한다면 ★︎★︎★︎★︎★︎
손이 크고 두껍다면 ★︎★︎☆︎☆︎☆︎
- 제조국: 일본
- 닙 굵기: F, M
- 닙 재질: 스테인리스 스틸
- 바디 재질: 플라스틱, 크롬
- 잉크 충전 방식: 컨버터&카트리지 겸용
- 가격: 정가 5만 2,000원 | 최저가 2만 원대
[4]
세일러 투주 어저스트
SAILOR TUZU ADJUST
도대체 만년필이 몇 자루인 거냐고 묻는다면, 잉크 수에 비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고 답하고 싶다. 동시에 여러 잉크를 쓰려면 만년필도 그만큼 필요하기 때문이다(물론 딥펜도 만년필 수만큼 가지고 있지만…). 새로운 잉크를 사면 그 색에 어울리는 컬러의 만년필을 찾는다. 그렇게 들인 펜이 세일러 투주 어저스트. 오묘한 루비 잉크와 완벽하게 어울리는 바디에 눈이 갔고, 시필해 보니 그립감과 사용감 또한 마음에 든 것.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묵직하고 두툼한 그립감이다. 긴 바디와 두툼한 배럴, 삼각 그립까지. 손가락이 안정감 있게 자리 잡는다. 그립부가 회전된다는 점도 특징이다. 좌우 10도 이내에서 편한 각도로 고정할 수 있다. 만년필이 처음이거나 왼손잡이라면 이 그립부 회전 기능이 매우 유용할 거다. 닙을 끝까지 담그지 않고 펜촉 숨구멍까지만 담가도 잉크 충전이 가능하다는 점도 큰 장점.
세일러답지 않게 투박한 디자인이 개인적으로는 다소 아쉽지만, 손에 착 감기는 그립과 섬세한 여러 기능 덕에 자꾸만 손이 간다. 특히 손이 크고 굵은 편이라면 앞서 소개한 어느 만년필보다도 더 만족스러울 거다.
나만의 파지법이 있다면 ★︎★︎★︎★︎☆︎
클래식한 디자인을 원한다면 ★︎☆︎☆︎☆︎☆︎
- 제조국: 일본
- 닙 굵기: F, M, B
- 닙 재질: 스테인리스 스틸 + 크롬 도금
- 바디 재질: 플라스틱
- 잉크 충전 방식: 컨버터&카트리지 겸용
- 가격: 정가 6만 8,000원 | 최저가 5만 원대
[5]
카웨코 릴리풋
KAWECO LILIPUT
가볍게 들고 다닐 만년필이 필요하다면? 카웨코 릴리풋을 추천한다. 실물을 보면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독보적인 디자인의 미니 만년필이다. 슬림하고 단단한 총알 같은 외형은 고급 만년필 사이에서도 존재감이 뚜렷하다. 매일 필통에 넣어 다닐 만큼 애정이 깊지만, 이 쇠 맛 나는 디자인 때문에 비행기를 탈 때마다 종종 공항 수색대에서 필통을 열어 보여줘야 한다는 건 단점이라면 단점.
그새 일본 만년필에 익숙해진 손에는 카웨코의 필기감이 다소 거칠게 느껴졌다. 반면, 가벼운 알루미늄 바디와 비교적 묵직한 스테인리스 스틸 닙의 무게 차이 때문인지 무게중심이 펜촉 쪽에 있어, 종이에 닙이 내려앉는 듯한 밸런스는 만족스럽다.
아담한 크기와 단단히 잠기는 트위스트형 캡 구조 덕분에 포켓 펜으로 최적이다. 캡이 열리거나 잉크가 샐 걱정도 없다. 캡을 닫으면 10cm도 채 안 되지만, 뚜껑을 뒤로 돌려 꽂으면 12.6cm로 손에 쥐기 좋은 길이가 된다. 그럼에도 장시간 필기엔 피로할 수 있어 짧은 메모용으로 적합하다.
남다른 디자인을 원한다면 ★︎★︎★︎★︎★︎
데일리 만년필이 필요하다면 ★︎☆︎☆︎☆︎☆︎
- 제조국: 독일
- 닙 굵기: EF, F
- 닙 재질: 스테인리스 스틸
- 바디 재질: 알루미늄 (실버 기준)
- 캡: 트위스트식
- 잉크 충전 방식: 카트리지 (컨버터 사용 불가)
- 가격: 정가 10만 1,000원 | 최저가 5만 원대
[6]
파이롯트 라이티브
PILOT LIGHTIVE
가볍고(LIGHT) 역동성 있는(ACTIVE) 사용감을 모두 챙겼다는 뜻의 라이티브 만년필. 얇고 가벼운 플라스틱 바디치고는 길이가 길어 균형감이 잘 잡혀 있다. 더 이상 새 만년필을 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미끄러지는 듯한 필감에 깜짝 놀라 데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최저가가 1만 원대라는 걸 고려하면 말 그대로 ‘가성비 만년필’의 정석.
저렴한 가격에 걱정할 필요 없다.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파이롯트니까. 회전식, 버튼식, 대용량까지 다양한 파이롯트 컨버터와 호환 가능하다. 데일리 만년필을 찾고 있다면 잉크 충전 방식이 다양한 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포인트다.
그럼에도 저렴한 이유가 뭐냐고? 기본 카트리지 외에 컨버터는 따로 구매해야 하는 간단한 구성과 특수 합금 닙 때문. 어떤 마술을 부린 건지 스테인리스 스틸 닙과 필감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닙 종류가 F, M 중필만 2종이라 선택지는 적지만 잉크 놀이를 즐기기엔 제격이었다. 가격과 필감 모두 뛰어난 실용적인 펜을 찾는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을 제품.
가성비 최고의 만년필을 찾는다면 ★︎★︎★︎★︎★︎
세필촉을 원한다면 ★︎★︎☆︎☆︎☆︎
- 제조국: 일본
- 닙 굵기: F, M
- 닙 재질: 특수 합금
- 바디 재질: 플라스틱
- 잉크 충전 방식: 컨버터&카트리지 겸용
- 가격: 정가 3만 3,000원 | 최저가 1만 원대
오늘 소개한 6종 외에도 입문용으로 언급되는 만년필은 많다. 하지만 수많은 스펙 비교보다 중요한 건 직접 써 본 사람의 손끝 감각이라고 믿는다. 데스크에 앉아 정리한 정보 대신 내 손을 직접 거쳐 간 만년필만 자신 있게, 솔직하게 소개하고 싶었다. 나 역시 누군가의 진심 어린 사용기를 따라 첫 만년필을 골랐으니까. 오늘 이 기사가 누군가의 반려 만년필을 들이는 데 작은 힌트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