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M4 아이패드 프로가 등장했을 때, 저는 아이패드가 컴퓨터로써 가진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번 WWDC에서 발표할 iPadOS에서 일부 개선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때 나열했던 문제점 중 단 하나, 파일 앱에서 파일을 아이패드에 고정시킬 수 있는 기능만 추가되었거든요. 여전히 iPadOS는 아이패드 프로의 하드웨어를 활용하기 매우 어려운 플랫폼이며, 많은 사람들이 아이패드 프로의 잠재력을 끌어올리기에는 아직 걸림돌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리뷰를 진행하면서 저는 아이패드 프로를 구매하기로 했습니다. 어쩌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됐을까요? 제가 몇몇 장소에서 아이패드 프로를 써보면서 느낀 점을 중심으로 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합니다.
KTX 안에서
아이패드 프로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부산에 다녀올 일이 있었습니다. 늘 들고 다니던 맥북 대신 아이패드 프로를 챙겨 들고나갔습니다. 여행 때는 늘 더 가벼운 셋업을 선호하지만, 가끔씩 갑자기 일을 하게 될 상황을 생각해서 늘 노트북을 챙겨 다녔었거든요.
KTX에 탑승한 후에는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영화를 보기로 합니다. 이날은 마침 미국의 독립기념일이어서 ‘인디펜던스 데이’를 봤습니다. 이번 아이패드 프로의 새로운 탠덤 OLED 디스플레이는 HDR 영화를 보는데 최적의 화질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밝기입니다. HDR 콘텐츠를 시청할 때의 1,600 니트 뿐만 아니라 일반 화면에서의 최대 밝기도 1,000 니트여서 웬만한 야외에서는 가독성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거기에 색도 정확해서 사진을 보정하는 데도 유용했습니다. 이 화면만으로도 업그레이드의 가치는 충분해 보입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KTX 안에서는 팟캐스트를 편집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취미(?)로 IT 소식들에 대한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최근 들어 아이패드로 편집을 즐겨합니다. 이전부터 맥용 로직 프로 X으로 편집을 했었지만, 아이패드 미니에 아이패드용 로직 프로를 설치해 봤다가 실망을 맛본 적도 있었습니다. 맥에서 편집하던 파일도 제대로 불러오지 못하고, 정작 어떻게든 불러왔다 하더라도 상당히 버벅거렸거든요. 아무래도 로직 프로가 팟캐스트보다는 짧은 음악을 편집하기 위한 도구이다 보니 그런가 싶긴 했는데, 많이 아쉬웠죠.
그러다가 찾은 것이 바로 Ferrite이라는 앱입니다. 팟캐스트나 음성 인터뷰 등을 편집하는데 최적화된 이 앱을 써보니 맥에서 편집하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편집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M4의 빠른 작업 처리 속도 덕분도 있었지만(이전에 이 앱을 아이패드 미니에서 써봤을 때보다 훨씬 빠릿빠릿한 속도를 보여줍니다), 애플 펜슬에 최적화된 인터페이스 덕분이었죠. 항상 애플 펜슬을 사놓고 실제 작업에서는 활용하는 일이 많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배터리가 거의 다 닳을 때까지 사용했으니까요. 아이패드 프로가 단순히 넷플릭스 머신이 아니라 작업용 기기로서 충분히 기능하고 있다는 거죠.
이번 애플 펜슬 프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스퀴즈’ 제스처와 햅틱 모터가 내장된 점일 겁니다. Ferrite에서는 기존에 있었던 더블 탭 제스처와 스퀴즈 제스처에 모두 커스텀 동작을 설정해 둘 수 있는데요. 이렇게 동작을 실행할 때마다 애플 펜슬이 살짝 진동하면서 동작을 확인해 주는 듯한 피드백이 확실히 만족스럽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필압 감지 기능이 크게 필요하지 않아서 그냥 USB-C 단자가 달린 기본 펜슬을 구매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스퀴즈 제스처를 제대로 사용해보니 비용이 높아지더라도 애플 펜슬 프로가 주는 메리트가 분명하다는 생각입니다.
팟캐스트 편집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서는 찍은 사진을 백업하기로 했습니다. 아이패드 프로에는 썬더볼트 단자가 있죠. USB-C SD 카드 리더를 꽂고 파일 앱에 연결하면, 제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사진들을 알아서 전송해줍니다. 이 사진들은 나중에 집에 가서 라이트룸으로 보정해줄 생각입니다. 물론 아이패드에서도 라이트룸을 통해 사진 보정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저는 아직은 라이트룸 클래식이 더 편하네요. 물론 급한 상황이라면 아이패드로 보정을 할 수 있으니 안심입니다.
서울역사박물관
프리랜서로서의 장점은 어디서든 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동에 대한 압박 없이 집에서 바로 일할 수 있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외부에서의 볼일이 있거나, 단순히 기분 전환을 위해 밖에서 일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곳은 바로 광화문 근처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입니다. 엄숙함을 어느 정도 지켜야 하는 분위기 덕분에 카페보다 조용하고, 집에서 커피를 미리 싸가면 커피값도 절약할 수 있죠. 서울역사박물관 안에는 책도 읽고, 개인 학습이나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다수 마련돼 있는데, 여기에 자리를 잡고 작업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이럴 때 아이패드 프로는 맥북보다 훨씬 가벼운 짐을 쌀 수 있어 좋습니다. 이 방면에선 무게가 가벼워진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이번 아이패드 프로가 더 얇아지고 가벼워진 것에 대해 굳이 그렇게까지 만들 필요가 있었냐는 의견도 많이 보았지만, 아이패드를 실제로 들고 다니면서 많이 쓰는 제 입장에서는 성능에 해가 되지 않는 전제로 경량화는 무조건 좋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매직 키보드와 같은 다른 액세서리를 붙이고 다닌다면 더더욱 그렇겠죠. (사실 화면을 자체적으로 빛을 낼 수 있는 OLED로 바꾸면서 더 이상 필요 없어진 백라이트 부분만큼 얇아진 게 아닐까 싶습니다)
두께가 얇아졌지만 그렇다고 배터리에서 불리해진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배터리 용량은 제가 사용한 11인치 모델 기준으로 비교했을 때 기존 28.65Wh에서 31.29Wh로 9%가량 늘었습니다. 물론 여전히 맥북 에어보다 적은 용량이지만, iPadOS가 전력 관리를 과도하게(?) 하는 덕분에 배터리가 소모되는 속도도 훨씬 예측하기 쉬운 편이고, 무엇보다 더 오래갑니다. 그래서 밖에 일하러 나갈 때 무조건 충전기도 같이 챙겨가는 맥북과 달리, 아이패드는 아침에 완충해두기만 했다면 하루종일 일을 해도 배터리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죠. 그 덕분에 배낭이나 노트북용 슬링 백을 챙겨야 하는 맥북과 달리, 아이패드는 그냥 적당한 사이즈의 슬링 백에 액세서리 몇 개만 같이 넣어서 더 가볍게 들고 다닐 수 있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일을 주 업으로 하고 있기에 키보드 액세서리는 필수입니다. 이번에는 매직 키보드 대신 마우스와 키보드를 따로 들고 다니는 선택을 했습니다. 예전 같이 아이패드를 단순히 노트북 대용으로 쓴다면 당연히 매직 키보드를 쓰는 것이 좋은 선택이지만, 특히 애플 펜슬 프로로 팟캐스트까지 편집하기 시작하면서 매직 키보드를 필요에 따라 탈착하는 것보다는 키보드와 마우스를 따로 들고 다니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는 판단이었죠. 상황에 따라 폼 팩터를 바꿔서 쓸 수 있다는 점이 아이패드 프로의 큰 장점인데, 이렇게 따로 들고 다니는 것을 통해 그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죠. 실제로 테이블에서 일하다가 조금 쉬고 싶으면 아이패드만 소파 좌석으로 가져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시청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애플의 정품 스마트 폴리오 케이스는 하나의 큰 개선점이 하나 있었는데요, 바로 스탠드로 세웠을 때 각도를 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앉는 의자의 높이와 상대적인 책상의 높이 등에 따라 적당한 각도를 조정해 줄 수 있는 셈이죠. 저처럼 키보드와 마우스를 따로 들고 다니신다면 필수인 액세서리입니다. 가격은 좀 비싸지만요.
이 날 주로 한 작업은 사실 이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중간에 포토샵을 써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아이패드에도 포토샵은 있으니까요… 응? 아이패드에서는 수정이 안 되는 레이어가 있군요. 아직도 아이패드 버전과 데스크톱 버전이 완전히 호환이 안 된다니. 이럴 때는 결국 집에 있는 맥북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어떻게 햐나고요? 아이패드에서 원격으로 접속하는 거죠. 저는 Jump Desktop이라는 앱을 활용했는데요, 네트워크 환경만 좋다면 맥을 직접 쓰는 속도로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간단한 포토샵 작업뿐만 아니라, 장시간 돌려야 하는 팟캐스트 오디오의 프로세싱 작업도 가능합니다. 물론 영상 편집처럼 무거운 데이터 전송이 필요한 작업은 조금 무리일 수는 있겠네요.
모든 건 쓰기 나름, 하지만…
iPadOS의 소프트웨어적 제한에 대한 이야기는 일부러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지겹도록 한 얘기고, 제가 진짜로 알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제한을 뚫고 아이패드 프로를 정말 잘 활용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으니까요.
결론적으로, 몇몇 작업을 제외하고는 아이패드 프로에서 대부분의 작업을 무난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적응이 필요한 부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앱들의 도움으로 아이패드에서도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는 것은 저도 예상하지 못한, 만족스러운 결과였습니다. 이번 리뷰를 통해 사용한 아이패드 프로(512GB Wi-Fi)의 가격이 179만 원이었던 것이면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죠.
아이러니한 것은, 제가 아이패드에서 한 생산적인 작업들 모두 써드파티 개발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리뷰를 아이패드에서 작성하는 데 쓴 Ulysses나 팟캐스트를 편집하는데 쓴 Ferrite, 그리고 맥과 원격으로 연결하는데 쓴 Jump Desktop 모두 써드파티 앱이었으니까요. 물론 하드웨어와 운영체제, 아이클라우드, 그리고 앱 스토어라는 에코시스템은 애플이 만들어낸 것이지만, 결국 제가 애플이 깔아 둔 iPadOS의 제한들을 다 뚫을 수 있었던 건 개발자들이 애플이 깔아 둔 제한들을 우회하거나 정면 돌파해서 가능했던 것이죠.
요즘 애플이 개발자들과 척을 지는 이야기들이 들려오는 게 참 씁쓸한 게 이런 이유에서 입니다. 어차피 애플이 아이패드의 소프트웨어 스토리를 개선할 생각이 없다면, 이러한 개발자들이 좀 더 많은 걸 할 수 있도록 제한을 풀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입니다. 저에게 179만 원이라는 가격이 가성비가 있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 건 화려한 화면과 날아다니는 프로세서를 넣어준 애플보다도 그 화면과 프로세서가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준 써드파티 개발자들이었으니까요. 결국 앱 개발사에게도 애플이 조성한 생태계가 필요하고, 애플 역시 제품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개발사들의 활약이 필요한 공생 관계란 이야기입니다.
어찌 됐든, 아이패드 프로를 구매할 때 결국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가격을 내가 정당화할 수 있을까?”일 것입니다. 결국 쓰기 나름인 것이죠. 지난 기사에서도 얘기했지만, 저는 아이패드 프로가 그 하드웨어를 생각하면 비싼 가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애플은 지금 넣을 수 있는 최첨단의 기술들을 모두 아이패드 프로에 넣었으니까요. 문제는, 이 최첨단 하드웨어를 내가 애플이 걸어둔 소프트웨어적 제한 내에서 활용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기에 자신이 없다면, M2 아이패드 에어나 10세대 아이패드를 선택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이렇게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아이패드 프로는 그 경계선을 모호하게 합니다. 더 얇은 두께와 가벼운 무게, 그리고 그 화면이 계속 아른거리죠. 내가 아이패드를 얼마나 쓰는지를 감안하면, 이 정도 돈은 써도 되지 않을까 계속 자신에게 물어보게 됩니다.
그래서 저도 제 자신에게 물어봤습니다. 음, 충분히 잘 활용한 것 같은데… 사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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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테크에 대한 기사만 10년 넘게 쓴 글쟁이. 사실 그 외에도 관심있는 게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