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애플이 창립 50주년을 맞이합니다. 1976년 4월 1일,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서 시작한 애플은 이제 시가총액 4조 달러에 육박하고, 25억 명의 사용자를 거느린, 지구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거대 IT 기업으로 자랐어요.
이 50주년을 기념해, 그 역사를 뒤돌아보며 지금의 애플을 만든 사건들을 정리해 봤습니다.
1985년: 스티브 잡스, 애플에서 쫓겨나다
1980년대 초반의 스티브 잡스는 애플 II의 성공으로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서른도 되지 않은 나이였던 잡스는 이 당시 자만심이 치사량 수준이었다고 해요. 이 오만함이 대놓고 드러났던 것이 바로 처음으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GUI)를 사용한 컴퓨터 리사의 개발에 자신이 관여하지 못하자 옆에 비슷한 개념의 매킨토시 개발팀을 차려서 둘을 경쟁시킨 사건이었죠. 결국 리사는 매킨토시(를 민 잡스)의 팀 킬로 처참히 망했고, 매킨토시 역시 역사에 남기는 했으나 당시에는 큰 성공은 아니었다고 하죠.

이러한 잡스의 행태는 당시 애플의 CEO였던 존 스컬리에게 눈엣가시로 보였습니다. 재밌게도 스컬리는 잡스가 “남은 평생 설탕물만 팔 겁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미래를 만들 겁니까?”라는 유명한 말로 펩시에서 직접 모셔 온 인물이었습니다. 이에 잡스는 1985년의 어느 날, 임원 회의에서 자신과 스컬리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카리스마가 있지만 실제로 눈에 띄는 업적이 없었던 공동창업자보다는 회사의 안정적인 경영을 원했던 임원들과 나중에는 이사회까지 스컬리를 택했고, 잡스는 결국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애플에서 쫓겨난 잡스는 이후 전문가용 워크스테이션을 만드는 NeXT(넥스트)를 창업했고, 성능을 홍보할 수단으로 조지 루카스가 가지고 있던 루카스필름 산하의 애니메이션 부서를 사들이는데, 그곳이 바로 픽사였습니다.

픽사에서 잡스의 경영 태도는 애플에서의 통제 광 시절과는 정반대였다고 전해집니다. 사실상 회사 경영과 관련된 몇몇 결정에만 관여할 뿐, 영화 제작과 같은 크리에이티브와 같은 면에서는 아예 손을 뗐다고 해요. 픽사 직원들은 잡스를 그냥 ‘관대한 투자자’ 정도로만 인식했을 정도라고 하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는 전문가들에게 맡기고, 그들의 의견을 들을 줄도 알게 된 것이죠. NeXT 워크스테이션을 연계해 홍보하겠다는 잡스의 원래 계획은 말아먹었지만, 1995년에 개봉한 <토이 스토리>는 대성공을 거두고, 잡스 자신 역시 커리어 면에서 부활의 초석을 마련합니다. (이후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할 때, 픽사의 지분 50%를 갖고 있던 잡스는 디즈니에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개인주주로 이사회에 합류하게 됩니다.)
물론 픽사는 3D 애니메이션 업계에 큰 획을 그었지만, 1985년에 잡스가 쫓겨난 게 왜 지금의 애플을 만들었을까요? 이때 잡스가 애플에 남았다면, 역설적으로 지금의 애플은 있기 어려웠을 겁니다. 더 나아가, 잡스의 오만함 때문에 아예 회사가 망했을 수도 있죠. 잡스는 픽사에서 자신이 틀릴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능력을 키우게 되었습니다. 이는 이후 애플에 돌아오고 나서 여러 방면에서 큰 도움이 됩니다.
1987년: 존 스컬리의 ‘지식 탐색기’, 컴퓨팅의 미래를 거의 완벽하게 예측하다

존 스컬리는 위와 같이 잡스를 쫓아내고, 애플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게 만든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로만 알려진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스컬리는 펩시에 있을 때는 브랜드를 가리고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코카콜라와 맛을 비교하게 했던 블라인드 테스트 광고 등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바 있고, 잡스가 쫓겨난 후 최소한 1980년대가 마무리될 때까지는 애플을 잘 이끌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특히 스컬리는 잡스가 애플로 데려오기 전까지만 해도 IT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애플로 이직하면서 꾸준히 IT 산업과 그 기술에 대해 독학하는 노력파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1987년에 공개한 ‘지식 탐색기 (Knowledge Navigator)’라는 개념은 스컬리를 향후 애플뿐만 아니라 당장 현재까지도 IT 산업의 전반적인 미래를 소름 끼치게 맞춘 예언가로 만들어줬죠.
지식 탐색기는 스컬리가 당시에 쓴 ‘오디세이: 펩시에서 애플까지’라는 자서전에서 나오는 개념입니다. 그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지식 탐색기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21세기 초반에 등장할 차세대 매킨토시는 ‘지식 탐색기(Knowledge Navigator)’라는 이름의 놀라운 환상의 기계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지식 탐색기는 세상을 탐험하는 도구가 될 것이며, 인쇄기만큼이나 세상을 뒤흔들 만한 도구가 될 겁니다. 사람들은 지식 탐색기를 이용해 도서관, 박물관, 데이터베이스, 또는 기관 기록 보관소를 자유롭게 탐험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이 도구는 오늘날의 정교한 컴퓨터들이 그러하듯 단순히 이러한 훌륭한 자료들의 문턱까지 데려다주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비밀에 깊게 들어가 해석하고 설명함으로써 방대한 양의 정보를 개인 맞춤형의 이해하기 쉬운 지식으로 변환해 줄 겁니다.”
뭐가 떠오르지 않나요? 바로 인터넷과 이를 탐험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이 글이 처음 쓰인 1987년은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아직 인터넷도 발명되기 전이었습니다.
이후 애플이 공개한 지식 탐색기에 대한 홍보 영상을 보면 지금은 익숙한 몇 가지 개념이 더 등장합니다. 접을 수 있는 태블릿과 문서 공동 편집과 화상 회의, 그리고 턱시도를 입은 모습을 한 가상 어시스턴트까지. 여기에 등장한 거의 모든 개념이 현실화했거나, 현실화를 앞두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 정도 능력의 인공지능 어시스턴트는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하지만요)
애플의 PDA 라인업인 뉴턴은 사실 지식 탐색기의 시발점으로서 등장한 제품이라 봐도 됩니다. 스컬리가 가지고 있는 비전을 당시 시대에 최대한 가깝게 구현한 제품이었죠. 하지만 이래저래 큰 성공을 보진 못했고, 결국 1997년에 돌아온 스티브 잡스에 의해 라인업 전체가 엎어집니다.
사실 지식 탐색기는 이 기사를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영상을 처음으로 보면서 미래에 대해서 이렇게 소름 끼치게 예측해 낸 존 스컬리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죠. 애플로 이직할 때 IT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선구안을 가졌던 셈입니다.
1996년: 애플, NeXT(그리고 잡스)를 사 오다

잡스가 쫓겨나고 11년이 흐른 후의 1996년의 애플은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지나치게 세분화된 매킨토시 라인업과 게임 콘솔 사업과 같은 무분별한 사업 확장은 애플의 재정 상태를 더욱 나쁘게 만들었죠. 거기다가 야심 차게 준비하고 있던 차세대 운영체제인 ‘코플랜드’의 개발이 엎어지면서, 맥 OS마저 경쟁자인 윈도우에 기술적으로 뒤처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애플의 경영진은 차세대 OS를 직접 개발하기보단 외부에서 사 오기로 했습니다. 개발을 완전히 다시 시작하는 거보단 사 오는 게 더 쌌으니까요.
후보는 잡스의 NeXT가 개발한 NeXTSTEP과 재밌게도 잡스가 쫓겨나고 매킨토시 사업부를 차지했던 전 애플 임원 장 루이 가세가 이끄는 BeOS로 압축됐는데, 결국 NeXT가 최종 승리하면서 잡스는 11년 만에 계약직 고문 자격으로 애플로 돌아오게 됩니다. 잡스에 따르면, 당시 애플은 파산까지 90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요.고문뿐만 아니라 돌아온 공동 창업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기존 경영진을 몰아내고 1997년 9월에 임시 CEO를 맡은 잡스는 곧바로 제품군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약 3,000명을 해고하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동시에 마이크로소프트에게서 투자를 받는 등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NeXTSTEP을 맥에서 구동할 차세대 운영체제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25년 전인 2001년에 출시한 Mac OS X입니다.

사실 잡스가 돌아와서 회사를 과감히 정리한 덕분에 애플이 살아남게 된 것도 중요하지만, NeXTSTEP은 2026년에도 애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2007년 아이폰 발표 당시에 잡스가 “아이폰은 OS X을 구동합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의 iOS는 Mac OS X 기반으로 개발되었고, 그 말은 즉 NeXTSTEP이 2010년대-2020년대에서 가장 성공적인 운영체제의 조상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iOS 개발자라면 초창기 API 중 ‘NS’로 시작하는 메소드가 많았던 걸 기억할 텐데, 바로 NeXTSTEP의 약자입니다.) 이후에 iOS에서 파생된 iPadOS나 watchOS, visionOS, tvOS 모두 NeXTSTEP에서 유래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NeXTSTEP은 애플이 NeXT를 인수하고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애플 제품들의 소프트웨어적 근간이 되어주고 있는 셈입니다.
2001년: 디지털 허브, ‘애플’의 출발점이 되다

(Apple)
2001년에 애플은 ‘디지털 허브’ 전략을 선보였습니다. 디지털카메라와 캠코더, MP3 플레이어 등 다양한 기기들을 연결하는 중심에는 디지털 허브, 즉 맥이 있다는 것이었죠. 이 전략의 일환으로 애플은 아이무비와 아이튠즈 같이 다양한 기기들과 소통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도 직접 MP3 플레이어를 개발하기로 합니다. 당시 MP3 플레이어는 MP3 파일을 재생할 수 있는 MP3 CD플레이어와 64~256MB 정도 용량을 탑재한 플래시 메모리 플레이어, 아니면 노트북용 하드디스크를 탑재한 HDD형 플레이어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애플은 노트북용 하드디스크(2.5인치)보다 더 작은 1.8인치 하드디스크를 이용해 아이팟을 만들어냈죠.
판매 초기에 아이팟은 점유율이 지금보다도 낮은 맥에서만 사용할 수 있어서 성공적이라 보긴 애매했습니다. 임원들은 아이팟을 윈도우에서도 쓸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잡스를 설득했고, 잡스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바뀐 잡스의 성격 덕분에 아이팟은 윈도우도 지원하게 되었고, 이후 판매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Apple)
아이팟의 성공은 애플이 맥 말고도 다른 디지털 기기들을 고려하게 되는 밑거름이 되었고, 자연스럽게 2007년의 첫 아이폰으로 이어졌습니다. 애플은 또한 아이팟을 위해 개발한 기술들을 아이폰에도 적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중 아이팟 나노에 처음으로 적용한 플래시 메모리는 이후 아이폰뿐만 아니라 맥에까지 플래시 메모리의 사용을 확장하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이팟이 남긴 또 다른 유산은 바로 지금도 남아 있는 아이튠즈를 이용해 음악이나 연락처, 사진 등을 동기화하는 기능입니다. (지금은 맥의 경우 파인더가 이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맥이 디지털 라이프의 중심이 된다는 6년 전의 디지털 허브 전략이 아이폰의 초창기에도 역시 먹혀들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은 스마트폰의 사양이 고도화되고 클라우드 기술이 발전하면서 디지털 허브의 중심은 맥이 아니라 아이폰을 대표로 하는 스마트폰과 클라우드가 되었지만, 하나의 기기가 디지털 라이프의 중심이 된다는 당시 애플의 디지털 허브 전략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
2007년에 아이폰을 발표하는 그 자리에서, 잡스는 ‘애플 컴퓨터’라는 사명에서 뒤에 붙어있던 ‘컴퓨터’를 떼어버리고 ‘애플’로 변경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제 단순히 컴퓨터만 파는 게 아닌, 소비자의 디지털 라이프를 묶은 솔루션을 파는 본격적인 IT기업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디지털 허브는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애플의 강점인 ‘애플 생태계’의 출발점이었던 셈이죠.
2003년: 애플 서비스의 시작이 된 아이튠즈 스토어
아이튠즈 스토어는 아이팟이 출시되고 2년 뒤에 나왔습니다. 아이팟은 그때까지만 해도 직접 구한 음악을 아이튠즈를 통해 아이팟에 동기화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문제는, 당시에는 ‘냅스터’나 ‘소리바다’ 등을 대표로 한 음악의 불법 다운로드가 공공연했던 시대였어요. 그래서 아이팟도 불법 다운로드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개인적으로 음악을 사랑했던 잡스는 아이팟 사용자들이 쉬우면서 합법적으로 아이팟에 넣을 음악을 직접 구매할 수 있는 아이튠즈 스토어를 만들기로 합니다.

(Kim Kulish / Corbis via Getty Images)
잡스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이튠즈 스토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역시 음반사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앨범 전체를 파는 게 아닌 개별 곡만 살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잡스의 고집에 음반사뿐만 아니라 일부 아티스트도 반대했었다고 해요. 하지만 이미 불법 다운로드로 앨범이 쪼개진 마당에 결론적으로 음반사와 아티스트 입장에선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2003년에 아이튠즈 스토어가 론칭했죠.
아이튠즈 스토어는 음악 시장에 적잖은 영향을 줬습니다. 물론 MP3 플레이어의 등장 덕분이기도 했지만, 곡별로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사람들이 앨범 전체를 듣기보단 원하는 노래만 찾아 소비하는 현상이 아이튠즈 스토어를 기점으로 더 강해졌어요. 결국 1970년대에 유행했던 싱글이나 미니 앨범같이 몇 곡만 담아서 출시하는 것이 다시 관행으로 자리잡게 되었죠. 아이튠즈 스토어는 이후 구독형 음악 서비스인 애플 뮤직으로 탈바꿈했습니다. (재밌게도 잡스는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곡들을 소유하길 원할 거라며 구독형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반대했다고 하네요)
한편, 아이튠즈 스토어는 지금 애플이 내는 매출의 큰 축을 담당하는 서비스 매출의 신호탄이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애플이 매출의 30%를 가져가는 ‘서비스 수수료’의 개념도 아이튠즈 스토어에서 처음 생겼어요. 이후에 등장한 앱 스토어 역시 기존 아이튠즈 스토어의 결제 체계 기반으로 만들어졌고, 지금 애플의 유료 서비스들의 결제 체계는 이 아이튠즈 스토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2005년: 맥, 인텔 프로세서로 이주하다
맥은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꾸준히 발전해 왔습니다. 이 중 2005~2006년에 단행한 인텔 프로세서로의 이주는 여러 이유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Apple)
당시의 맥은 IBM과 모토로라가 공동 개발한 파워PC 아키텍처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첫 아이맥이나 조개 모양의 아이북 등 애플 부활의 신호탄을 날린 맥들 모두 파워PC 기반이었죠. 하지만 IBM과 모토로라는 당시 뜨기 시작한 노트북을 위해 같은 성능을 내는 데 있어 더 적은 전력을 사용하도록 아키텍처를 개선하는데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애플은 직전까지 파워PC 맥을 홍보할 때 대놓고 비교하던 인텔에게 손을 내밀었고, 2005년 여름 세계개발자회의(WWDC)에서 맥의 인텔 이주를 발표합니다. 그러고는 다음 해 1월에 아이맥과 맥북 프로를 출시하며 본격적인 이주를 시작합니다.
맥이 인텔 프로세서로 이주하면서 한 가지 부대 효과가 따라왔는데, 바로 같은 아키텍처를 쓰게 되었으니, 윈도우를 설치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애플은 이를 놓치지 않고 윈도우를 설치해서 구동할 수 있는 부트 캠프를 발표했어요. 인텔 맥의 이러한 윈도우 호환성은 우리나라와 같이 당시 윈도우에 크게 의존하던 나라의 소비자가 맥을 선택지에 넣을 수 있게 되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처음에는 부트 캠프 덕분에 안심하고 맥에 입문한 분들도 많을 거예요.
맥의 인텔 이주는 14년 후에 다시 이뤄지는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하기도 한) 애플 실리콘으로의 이주와 많이 닮았습니다. 정확히는, 애플은 인텔 이주를 통해 배운 것들을 애플 실리콘 이주에 한 번 더 사용했다고 보면 됩니다. 전환 기간에는 파워PC와 인텔 아키텍처에서 모두 구동할 수 있는 ‘유니버설’ 앱으로 개발하도록 개발자들을 독려하고, 아직 유니버설 버전이 없는 앱들을 위해 파워PC 앱을 인텔에서 구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에뮬레이터인 로제타를 운영체제에 탑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철저한 준비 덕에 인텔 이주는 2009년 OS X 스노우 레퍼드에서 파워PC 관련 코드를 빼면서 3년 만에 완료하였습니다.
아, 그리고 또 다른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애플 실리콘으로 맥을 이주한 건, 인텔 프로세서의 전성비(전력 소모 대 성능 비율)가 더 이상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확히 14년 전 애플이 인텔로 이주하기로 한 이유와 같은 이유였죠.
2006년: 인텔, 아이폰용 칩의 개발을 거절하다

애플은 아이폰의 개발을 시작할 때, 맥의 플랫폼 이주를 시작하면서 상당히 가까워진 인텔에 아이폰을 위한 칩의 개발 의뢰를 하게 됩니다. 이미 아이팟에서 ARM 아키텍처 기반의 칩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OS X을 기반으로 아이폰의 소프트웨어(이후 iOS)를 개발하고 있었기에 맥에 쓰는 것과 비슷한 x86 기반의 인텔 칩을 사용하는 게 더 낫겠다는 판단이었죠.
하지만, 이 협상은 최종적으로 결렬됩니다. 잡스는 “인텔이 조직적으로 너무 느려서 아이폰의 발전 속도를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지만, 당시 인텔 CEO였던 폴 오텔리니는 “애플이 보내온 주문량과 단가를 계산해 봤을 때 인텔에 이득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라고 회상했어요. 결국 애플은 이미 아이팟용 ARM 아키텍처 칩을 공급하고 있던 삼성에 칩 개발을 의뢰했고, 결국 삼성이 개발한 칩이 아이폰에 탑재되었습니다.
물론 이제 20년 가까이 지났기에 아는 거지만, 이 결렬은 인텔 입장에선 지금까지도 영향을 주고 있는 뼈 아픈 실수였습니다. 물론 아이폰은 극비 프로젝트였기 때문에 칩 의뢰를 받아들였을 때조차 인텔은 애플이 무엇을 개발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을 테지만, 그럼에도 인텔은 이에 따라 사실상 모바일을 놓쳤고, 스마트폰의 혁신을 강 건너에서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어요. (물론 당시 인텔이 데스크탑에 최적화된 x86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아이폰에 들어갈 만한 칩을 개발할 능력이 있었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요.)
무엇보다 인텔에 뼈아픈 것은 이 결정이 지금의 애플 실리콘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씨앗이 되었다는 점이에요. 아이폰을 위해 ARM 칩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필요성을 느낀 애플은 2008년 P.A. 세미라는 반도체 업체를 인수했고, 이 인력은 2010년 첫 아이패드에 탑재된 A4를 시작으로 iOS 기기를 위한 맞춤형 칩과 더 나아가 2020년에는 맥의 애플 실리콘 이주의 신호탄이었던 M1을 개발하는 핵심 인력이 되었죠. 그리고 이 M1을 기점으로 애플은 인텔과 완전히 결별하게 됩니다.
오텔리니는 2013년에 CEO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진행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인텔의 내부 계산이 완전히 잘못됐으며, 아이폰이 이 정도로 큰 제품이 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회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인텔이 아이폰 칩의 개발 및 생산을 거절한 건 꽤 큰 실수였음을 인정한 셈입니다.
2010년: 스티브 잡스, “플래시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을 쓰다
2000년대에 컴퓨터를 사용했다면 플래시라는 이름에 아련한(?) 추억을 가진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 당시 웹은 플래시가 없으면 과장 좀 보태서 반은 볼 수 없었죠. 마시마로, 졸라맨과 같은 플래시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다양한 플래시 게임들, 유튜브 등 다양한 동영상 임베드, 그리고 심지어 네이버 지도와 같은 웹 앱들까지 한때 플래시로 동작했었어요.
하지만 웹에서 이렇게 플래시의 인기가 엄청나지만, 애플은 2007년 아이폰에 이어 2010년 아이패드에까지 플래시를 탑재하지 않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이 문제는 아이패드의 대표적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스티브 잡스는 애플 홈페이지에 ‘플래시에 대한 생각’이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먼저 어도비가 창업된 순간부터 애플은 한때 어도비 주식의 20%를 소유하는 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성능과 전력 소모, 보안 문제, 그리고 어도비만의 독점적인 기술이라는 점을 들며 아이폰과 아이패드에 플래시를 탑재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잡스는 편지를 “어도비는 과거를 뒤로 한 애플을 비판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 미래를 위한 훌륭한 HTML5 도구 개발에 더 집중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라는 강한 어조로 마무리했습니다.
잡스가 이렇게 강한 어조의 편지를 쓴 건 애플과 어도비의 복잡한 역사가 얽혀 있기도 합니다. 잡스가 편지에서 언급한 대로 애플은 1985년에 어도비에 자본을 투자하기도 했고, 초반에는 어도비도 맥을 우선 개발 플랫폼으로 지정하고 대부분의 제품을 맥으로 먼저 출시했었어요. 하지만 맥의 점유율은 계속 떨어지고, 애플이 파산 직전까지 몰리자, 어도비는 생존을 위해 윈도우를 우선 개발 플랫폼으로 바꿨죠.
이후 잡스가 돌아오고, 아이맥을 준비할 때 디지털 허브 전략의 일환으로 사용자들이 캠코더로 찍은 영상을 편집할 수 있는 새로운 영상 편집 앱의 개발을 요청했지만, 어도비는 묵살했습니다. (결국 애플은 직접 만들어야 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아이무비입니다.) 이후에 새로운 운영체제인 Mac OS X이 나왔을 때도, 어도비는 자사 제품을 OS X용으로 새로 쓰는 투자에 상당히 소극적이었고, 잡스는 이때 어도비에게 앙금을 품었다고 해요. 그 앙금이 플래시를 빌미로 터져 나온 게 아니냐는 분석이죠. 실제로 편지의 말미에도 “어도비는 OS X을 제대로 지원하는 버전을 내놓은 마지막 대형 개발사입니다”라는 문장을 통해 이를 넌지시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플래시와 관련된 잡스의 주장은 근거가 없진 않았어요. 실제로 이후 당시 iOS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을 이끌던 스콧 포스톨이 한 재판에서 증언한 바에 따르면, 애플과 어도비는 플래시를 아이폰에 탑재해 보려 했지만, 성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플래시를 아예 막아버리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밝혔어요. 한편, 안드로이드는 플래시를 전면 도입했지만 실제로 성능 문제로 논란을 겪다가 결국 4.1 버전부터 다시 플래시 지원을 제거했습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실제로 플래시 대신 HTML5와 앱 스토어를 밀었던 애플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이후 랜섬웨어의 주된 감염 경로로 플래시가 지목되었고, 어도비는 2020년 12월에 플래시 플레이어 지원을 완전히 종료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이미 웹 기술은 잡스가 예측했듯이 HTML5 기반으로 재편된 후였죠.
2010년: 맥북 에어, 미래 노트북의 청사진이 되다
첫 맥북 에어는 2008년에 스티브 잡스가 서류봉투에서 노트북을 꺼내는 퍼포먼스와 함께 등장했습니다. 당시에 맥북 에어는 가장 얇은 노트북으로 화제였지만, 실상은 그 얇은 섀시로 인해 엄청난 발열과 성능 문제에 시달렸고, 가격도 $1,799부터 시작하는 꽤 비싼 노트북이었어요. 이때의 맥북 에어는 대중적인 모델이라기보단 얇은 디자인을 위해 많은 부분을 희생한 시제기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중적인’ 맥북 에어가 나온 건 2010년입니다. 당시 잡스는 그 해 출시된 아이패드의 장점을 맥북에 녹이고자 했다고 말하며 비슷해 보여도 완전히 새롭게 설계된 맥북 에어를 발표했는데요. 이 새로운 맥북 에어는 여러모로 미래의 맥북과 타사의 노트북까지 영향을 미치는 기준점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맥북 에어에서 가장 큰 혁신으로는 SSD 기반의 새로운 아키텍처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노트북은 다소 느린 SATA 방식으로 2.5인치 하드디스크나 비슷한 크기의 SSD를 사용해야 했었죠. SSD라 해도 SATA의 병목 때문에 속도가 그다지 빠르진 않았습니다. 2010년형부터는 전 모델이 SSD를 채용하면서 시스템에 더 직접적으로 연결됐고, 이에 따라 전 세대와 비슷한 프로세서를 사용했음에도 성능이 비약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거기에, 더 이상 2.5인치 하드디스크를 위해 공간을 비워 둘 필요가 없어지면서 그 자리를 배터리로 채울 수 있게 되었죠. 여기에, 거의 반 가까이 내린 $999의 가격(한국 가격 129만 원)은 맥북 에어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SSD를 메인 저장장치로 사용하는 이 새로운 아키텍처는 2년 뒤 레티나 디스플레이 맥북 프로를 시작으로 모든 맥북 라인업에 조금씩 퍼졌고, 이 맥북 에어는 경량 노트북의 기준점과 같은 제품이 되었습니다. 인텔이 이후 ‘울트라북’이라는 인증 기준을 만들 때 맥북 에어를 참조해서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어요.
맥북 라인업의 근본이 된 맥북 에어는 이후 M1을 달고 다시 한번 가성비 노트북의 기준점, 그리고 애플 실리콘 전환의 선봉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2016년: 아이폰 7, 이어폰 단자를 없애 버리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아이폰 7이 이어폰 단자를 삭제한다는 루머를 처음으로 들었을 때, 반신반의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아이폰 7을 발표하는 키노트에서 진짜로 삭제한다고 했을 때 옛날 포트를 없애는 것도 “용기”라고 포장했던 기억도 나네요.
애플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늘 그렇긴 했지만, 이어폰 단자의 삭제는 선을 넘었다는 반응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었어요. 당시에 애플은 (처음으로 공식 지원하기 시작한) 방수 성능 향상과 (처음 정전식으로 바뀐) 홈 버튼의 진동 피드백을 담당하는 탭틱 엔진의 크기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이어폰 단자를 빼야 했다고 주장했죠.
물론 이 덕분에 혜택을 본 애플 제품이 있으니, 바로 아이폰 7을 발표하는 이벤트에서 같이 공개한 에어팟입니다. 에어팟은 요즘은 일상이 된 완전 무선 이어폰을 처음으로 상용화시킨 제품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에게 이 개념을 각인시킨 제품인 건 사실입니다. 물론 아이폰 7에는 라이트닝 이어폰과 함께 기존 3.5mm 이어폰을 쓸 수 있는 어댑터를 함께 제공했었지만, 많은 아이폰 7 사용자들이 그냥 에어팟을 구매했어요. 저도 미국에서 출시하자마자 구매했었는데, 당시 애플 스토어 직원이 “액세서리를 사려고 줄을 서는 걸 본 건 처음이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애플의 이런 행보는 삼성을 포함해 많은 스마트폰 제조사가 조롱의 대상으로 삼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결국 애플이 아이폰 7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어폰 단자를 하나둘씩 삭제하고 자신만의 무선 이어폰을 출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들어 MZ 세대 사이에서 다시금 ‘줄 이어폰’ 유행이 돌아오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어폰 단자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네요.
One more thing – 2020년: 애플 실리콘으로의 이주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미 위에서 애플 실리콘이 여러 번 언급된 걸 봤을 겁니다. 사실 모든 역사는 서로가 얽히고설킨 인과관계의 연속이고, 애플도 다르지 않습니다. 애플이 과거에 자의적, 혹은 타의로 한 선택들이 지금의 애플을 만든 것이죠.
애플 실리콘은 그 많은 예 중 하나입니다. 애플은 스컬리의 ‘지식 탐색기’의 초석을 다질 목적으로 개발한 초기 PDA인 뉴턴 메시지패드 시절부터 ARM 아키텍처의 잠재력을 보고 ARM이 생성될 시절에 초기 투자자로 참여했고, 뉴턴 메시지패드는 ARM 아키텍처가 상용 제품에 처음으로 쓰인 사례였습니다.
뉴턴 메시지패드를 대차게 말아먹으면서 ARM과 잠시 멀어진 애플이었지만, 2001년에 아이팟을 만들면서 다시 ARM 기반 칩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때 쌓인 경험이 인텔의 거절과 맞물려 아이폰에도 ARM 칩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되었죠.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된 여정은 애플이 탈인텔을 선언하고 애플 실리콘 맥이라는 종착지까지 왔습니다.
사실 애플 실리콘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모든 부분을 통제한다는 잡스의 엔드-투-엔드 접근 방식의 완성입니다. 그간 애플은 맥에 들어가는 메인 프로세서는 모토로라와 인텔 등의 타사 제품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애플 실리콘을 통해 이제 컴퓨터의 뇌라 할 수 있는 프로세서까지 직접 만들 수 있게 된 것이죠. 아마 잡스가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자랑스럽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애플 실리콘 맥이 종착지라고 했지만, 여러분이 지금 읽고 있는 이 이야기에서의 종착지일 뿐입니다. 애플 실리콘은 미래에 또 다른 새로운 결과를 낳을 테니까요. 당장 지난달에 출시한 맥북 네오는 100만 원 미만으로 출시한 최초의 맥북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며 저가형 윈도우 노트북 시장에 한 페이지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또다시 50년이 흐른 후에 애플 실리콘은 애플을 또 어떤 방식으로 변화시키게 될까요?
그 기사를 쓰려면 50년 동안 열심히 살아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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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테크에 대한 기사만 10년 넘게 쓴 글쟁이. 사실 그 외에도 관심있는 게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