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병(?)을 치료하려면 아이패드를 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현대인의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아이패드가 갖고 싶어지면 실제로 가지게 될 때까지 계속 생각이 난다는 단순한 의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아이패드를 사용해 봐야 이게 나에게 정말 필요한 기기인지를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거든요.
그만큼 아이패드의 역사는 사용자뿐만 아니라 제조사인 애플 입장에서도 그 용도를 찾는 여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첫 아이패드부터 그랬죠. 2010년 1월에 있었던 이 아이패드 발표를 직접 봤었는데, 이때 인상 깊었던 건 바로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의 시연을 평소처럼 서서 하는 게 아닌, 소파에 앉아서 했다는 점입니다.
소파에서 여유롭게 앉아 아이패드로 웹 브라우징을 하거나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잡스를 보고만 있어도 애플이 이 당시에 아이패드를 어떤 목표로 만들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의 아이패드는 완벽한 ‘콘텐츠 소비 기기’ 였습니다. 당시 애플이 써드파티 앱의 예시로 보여준 것들 또한 뉴욕타임스와 같은 신문 앱과 게임, 스포츠 앱(메이저리그 공식 앱) 등 모두 읽거나 보는 앱들이었습니다. 그나마 생산성을 챙겨보겠다고 애플판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 iWork를 아이패드로 옮겨오고, 당시 나오던 맥 키보드에 아이패드 독을 붙인 듯한 물건인 키보드 독이 나오기도 했었지만요.
아이패드는 아이폰의 화면을 크게 늘린 기기였습니다. “아이폰이 이미 있는데 뭣하러 그냥 크기만 늘린 아이폰을 사겠냐”라는 냉소를 피할 수 없었죠. 사실 이 비판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화면 크기를 늘린다고 해서 새로운 용도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요. 대화면이 주는 쾌적함은 분명하지만, 그것 때문에 이미 아이폰을 갖고 있는 사람이 60만 원 넘게 추가 투자하느냐는 또 다른 얘기였으니까요.
그래서 애플은 매번 새 아이패드가 나올 때마다 아이폰과는 다른 차별화를 위해 고군분투해왔습니다. 레티나 디스플레이를 넣고 동세대 아이폰보다 성능이 더 강력한 칩을 쓰는 등 하드웨어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았죠. 이러한 노력들은 2015년, 아이패드 프로의 발표와 함께 정점을 찍습니다. 12.9인치의 널찍한 화면을 탑재함과 동시에, 퍼스트 파티 키보드 액세서리인 스마트 키보드 폴리오를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이패드가 가진 생산성의 판도를 바꾼 전설적인 액세서리, 애플 펜슬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스타일러스는 필요 없다”라고 했던 스티브 잡스의 철학을 버렸다는 비난을 듣긴 했지만, 덕분에 아이패드는 맥이나 아이폰과 다른 정체성을 지니게 되는데 성공합니다. 필기를 자주 하거나, 그림을 그리고, 캘리그래피를 하는 분들에게는 아이패드가 정말로 유용한 컴퓨터가 되었죠. 스마트 키보드 폴리오 또한 당시 인텔 맥북과 비교해 훨씬 긴 배터리 사용 시간을 자랑했습니다. 이동하면서 글을 쓰기에 아이패드가 최적의 플랫폼이 되도록 해주었습니다. 저도 아이패드 프로를 사용했을 때 스마트 키보드 폴리오의 덕을 많이 봤습니다. 스마트 키보드 폴리오는 이후 트랙패드까지 달린 매직 키보드로 진화했습니다.
이때 즈음부터 애플은 아이패드가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대체한다는 내러티브를 밀기 시작합니다. 악명 높은 “컴퓨터가 뭐죠?” 광고부터, “당신의 다음 컴퓨터는 컴퓨터가 아니다”라는 광고 카피도 아이패드 프로를 확실히 “차세대 컴퓨터”로 밀어주려는 애플의 움직임이 보이는 부분이었죠.
이번에 새로 나온 2024년형 아이패드 프로도 이러한 애플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애플은 원래 “Mac”을 의미한다는 M 시리즈 칩의 최신작인 M4를 아이패드 프로에서 먼저 데뷔시켰습니다. 애플 기기 역사상 가장 최첨단 디스플레이도 아이패드 프로에게 몰아줬고요. 애플 기기 역사상 가장 얇은 두께는 말할 것도 없겠죠.
아이패드 프로가 나올 때마다 “가격이 왜 이리 비싸냐”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사실 전 아이패드 프로가 비싸지는 건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애플이 당대의 최첨단 기술을 집약해 놓은 제품이이 바로 아이패드 프로니까요. 예를 들어 탠덤 OLED는 사실 대량 생산되는 모바일 기기에는 처음으로 적용되는 기술로, 아이폰에 쓰이는 OLED보다도 앞서는 기술입니다. 한 디스플레이 산업 애널리스트는 X에 “탠덤 OLED 패널과 M4 칩의 부품 가격을 생각하면 아이패드 프로는 생각보다 저렴하게 책정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1인치 탠덤 OLED 패널 한 장의 부품 가격만 200달러 후반대(약 35만 원 이상)에 달한다고 하니 그 주장이 조금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전 아이패드 프로의 하드웨어 가치 자체는 맥북보다 충분히 더 높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패드가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 충분하거나, 아니면 정말로 아이패드가 아니면 일을 못 하는 프로페셔널들도 많습니다. 특히 위에 얘기한 대로 애플 펜슬은 일러스트레이터나 캘리그래퍼 등의 디지털 아티스트들에게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고, 모바일 기기 중에서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최첨단 기술이 들어간 탠덤 OLED와 iPadOS에 들어간 HDR 레퍼런스 모드를 조합하면 HDR 콘텐츠를 제작하는 영상 제작자들에게 HDR 환경에서 정확한 색상을 맞추는데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아이패드 프로가 정당화될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걸 넘어서 그냥 아이패드 프로가 엄청난 가성비를 자랑하는 수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의 아티스트 태블릿은 보통 자체적인 PC는 아니어서 작업용 PC에 추가로 얹어서 구매해야 하고, 레퍼런스용 모니터는 보통 수천만 원을 호가하니까요.
하지만 이러한 하드웨어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맥북과 아이패드의 가격을 비교하게 되는 근본적 이유는 위에 나열한 특정적인 사용 케이스를 제외하고는 단순히 콘텐츠를 즐기는 것에서 벗어나 아이패드가 가져다주는 전반적 작업 경험이 맥북과 비교해서 눈에 띄게 나은 점이 있냐에 대해 애플이 명확한 해답을 못 내놓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iPadOS가 아이패드의 하드웨어, 특히 이번 프로에 들어간 최신 M4 칩이 가진 잠재력을 살리기에는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는 것이죠. 애플이 듣어 작년에 파이널 컷 프로나 로직 프로 등의 자체 프로 앱들을 아이패드용으로 내놓았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iPadOS의 성능 관리 시스템은 아이폰을 위한 운영체제인 iOS를 기반으로 합니다. 배터리 사용 시간에 우선순위가 맞춰져서 백그라운드에서 돌아가는 작업들에 많은 제약이 따릅니다. 하다못해 최대 2TB의 SSD를 선택할 수 있는 ‘컴퓨터’에서 클라우드 스토리지나 개인 서버에 있는 원격 파일을 로컬 스토리지에 고정해 두는 기능이 아직도 없다는 건 크리티컬한 요소죠. 아이패드로 기사 좀 쓰려고 하니까 시스템이 용량 확보를 위해 원고 파일을 아이패드에서 지워버리는 바람에 다시 받아와야 해서 기다리고 있는 지금도 좀 어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패드가 진정한 ‘컴퓨터’가 되기 위해 가장 큰 걸림돌은 아직 플랫폼 전체가 애플 앱 스토어의 강력한 규제 속에 갇혀 있어서 macOS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강력한 앱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개발자들이 iPadOS가 가진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아이디어를 선보인다고 한들, 애플이 앱 스토어 정책에 위배된다며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앱은 빛을 보는 게 어렵죠. 물론 웹앱들이 구세주가 될 수 있겠지만, 애플이 사파리 브라우저의 기능을 데스크탑 버전에 비해 성능을 너프시키기도 했고, EU를 제외하면 다른 브라우저 엔진들도 허용하지 않고 있으니 이쪽에서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노력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써드파티 앱 개발사들은 이러한 아이패드의 소프트웨어적, 그리고 정책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전문 앱들을 아이패드로 옮겨왔습니다. 대표적으로 동영상 편집 앱인 루마퓨전이나, 애플 펜슬을 이용해 다양한 그림을 그리는데 최적화된 프로크리에이트, 강력한 수기 노트테이킹 앱인 굿노트, 그리고 어도비의 포토샵과 라이트룸의 아이패드 버전도 있습니다. 이 앱들 모두 일반 사용자들 뿐만 아니라 전문적인 일을 하는 프로들에게도 맥이나 윈도우 PC 대신 아이패드를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메인 컴퓨터로 받아들이는데 기여를 했죠.
애플도 맥에 있었던 아이무비와 개라지밴드를 아이패드로 옮겨오는 것을 시작으로, 꾸준히 맥용 앱들을 아이패드로 옮겨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부족했죠. 결국 작년이 되어서야 맥에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프로용 동영상 편집 앱인 파이널 컷 프로와 오디오 편집 앱인 로직 프로를 아이패드용으로 출시했고요.
애플이 iPadOS에서 보이는 태도가 이해가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용자는 개발자의 의도를 벗어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제품을 망가뜨릴 수 있고, 애플은 사용자들을 이런 문제로부터 보호하고 싶은 거겠죠(그러면서 30%의 앱 스토어 수수료도 챙기고요). 그리고 최소한 아이폰에서는 이 논리가 어느 정도는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패드를 진정 차세대 컴퓨터라고 하고 싶다면, 그만큼의 자유도를 사용자들에게 부여해야 합니다. 진정한 생산성은 제한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제한을 풀어냄으로써 이뤄지는 것이니까요. 애플은 아이패드가 미래를 이끄는 기기이고,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기능을 선보인다고 말합니다. 하드웨어만 보면 충분히 동의합니다. 이제 소프트웨어에서도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합니다.
가혹한 말들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저는 사실 아이패드 프로의 ‘진짜 컴퓨터 실험’이 성공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가벼우면서 강력한 컴퓨터를 부담 없이 휴대하면서 쓸 수 있다는 건 IT 덕후로서는 꿈이 현실이 되는 거니까요. 저도 이 꿈을 가지고 5년 전에 아이패드 프로와 애플 펜슬, 그리고 나중에는 매직 키보드까지 구매해서 사용했었습니다. 하드웨어는 너무 만족했지만, 결국 iPadOS가 주는 다양한 제한에 부딪혔습니다. 혹자는 “(iPadOS가) 컴퓨터답게 쓰는 것을 막으려고 저항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는데, 정말 그런 기분이었달까요. 결국 맥북의 가장 큰 문제였던 배터리가 애플 실리콘과 함께 해결되었고, 아이패드 프로는 미니로 바꾸고 맥북 프로를 구매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에는 아이패드 프로가 제가 맥에서 하는 일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만은 계속 품고 있습니다.
팀 쿡은 이번 이벤트의 마지막을 다음 달에 있을 WWDC를 기대하라고 말하고 끝냈습니다. 물론 이번 WWDC의 최대 화두는 AI고, 그 부분에 많은 관심이 쏠리겠지만, 제가 관심이 가는 부분은 과연 WWDC가 이번 아이패드 프로의 하드웨어에 걸맞은 iPadOS를 내놓을 것인가입니다. 과연 아이패드는 진짜 컴퓨터가 될 상일까요? 다음 달을 기다려봐야겠습니다.
About Author
이주형
백수가 되었지만, 백수가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에디터이자 팟캐스터. IT가 메인이지만 관심가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 나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