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곧 죽어도 한국에 살아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다. 한국 영화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다는 게 첫 번째, 한식당이 많다는 게 두 번째, 마지막은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외국에서 길게 살아본 적은 없지만(필리핀 6개월, 이탈리아 1개월),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어렵지는 않은 세상이라는 건 안다. 한식 역시 마찬가지다. 카타르에서도 훌륭한 한식당이 있으니까. 하지만 막걸리는 다르다. 쉽게 상할 수 있기 때문에 해외 유통에 어려움이 있고, 대기업 막걸리가 아니면 구경도 하기 힘든 게 현실이다. 오늘 소개할 막걸리는 한 모금 마시니 ‘서울에 살아서 참 다행이다’,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실험적인 막걸리였다. 사온서와 미소주방이 함께 만든 누룩악귀다.
사온서는 상수동에 있는 한식 다이닝바다. 두 번 방문해 봤는데, 서비스와 메뉴 구성이 훌륭해서 누군가 상수동에 가면 꼭 사온서를 추천한다. 믿을 만한 곳에서 막걸리를 만들었다고 하니 분명 퀄리티도 좋을 거라는 믿음이 있을 수밖에.
누룩악귀, 이름에서 느껴지듯 평범한 술은 아니다. 핼로윈을 겨냥해 만들어졌고, 매운맛이 나는 독특한 막걸리다. 들어간 재료를 보면 패션프루츠, 페퍼론치노, 핑크페퍼. 지금껏 나는 매운맛 막걸리를 구경한 적도, 먹어 본 적도 없다.
붉은색 라벨에 흰색 붓글씨로 쓴 듯 제품명이 강렬하다. 라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동시대 가장 악마적인 전통주를 출시합니다.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좋은 기운만 가득 채우길 기원하며, 새롭고 재미있는 컨셉의 전통주를 미소주방과 사온서가 합심하여 개발하였습니다. 누룩악귀를 드시고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새롭게 다가오는 신년을 좋은 기운으로 가득 채우길 기원합니다.”
나는 이 문장을 보며 ‘기운’에 대해 생각한다. 좋은 기운과 나쁜 기운, 외국 친구에게 ‘기운’을 무엇이라 번역할 수 있을까.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에너지? 포스? 그게 무엇이든 나는 기운의 힘을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 해도 존재하는 것들이 있지 않나. 정확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어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 기운도 그런 것이 아닐까. 사실 기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좋은 기운이 함께하길 바래어주는 마음은 그 자체로 따스하니까. 막걸리 한 잔이 친구에게 좋은 기운을 빌어줄 수 있다면, 몇 잔의 막걸리도 아깝지 않을 거다.
우선 향은 맵지 않다. 달짝지근한 과일의 단향이 느껴진다. 패션후르츠에서 오는 향인 것 같다. 색은 조금 탁한 빛깔이 돌고, 농도는 진하며, 탄산은 거의 없다. 혀에 닿는 순간부터 매운맛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하고 매움은 막걸리가 지나간 자리에서 불이 붙듯 스파크를 일으킨다. “매운맛이 느껴지는 신기한 맛이네?”가 아니라 “우와, 이 막걸리 왜 이렇게 매워?” 정도의 스코빌 지수다. 차가운 걸 마셨는데 맵다는 느낌이 오묘하고 이질적이다. 작년에 출시한 매운맛 붕어빵이라는 아이스크림이 있었는데, 그걸 먹었을 때 이런 느낌이었다. 매운맛이 주는 톡 쏘는 맛이 입안 곳곳에 짜릿한 흔적을 남긴다.
누룩악귀는 이벤트성으로 100병만 생산된 제품이기 때문에 시중에서 구하기는 힘들다. 꼭 이 막걸리를 먹고 싶다면 10월 28일 사온서에서 진행하는 디너 코스에 신청하는 것도 방법이다. 차림요리에 적혀 있는 메뉴가 손가락, 박쥐날개, 해골, 썩은뼈, 뇌, 무덤인데 당연히 컨셉이고 실제 제공되는 요리는 등갈비요리 같은 거라고 한다. 할로윈 컨셉이기 때문에 이렇다. 링크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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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