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당에 다녀왔습니다. 임정식 셰프가 이끄는 정식당은 뉴욕과 서울 두 곳에 있는 한식 베이스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입니다. 한국에서보다는 미국에서 더 유명할 겁니다. 뉴욕에서는 한식당 최초로 미쉐린 3스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서울 지점은 아직 2스타입니다.
제가 돈이 좀 더 많았다면 망설임 없이 디너 코스를 선택했을 테지만, 다음 주에 치과에서 치료도 받아야 되고, 아무튼 돈 쓸 일이 많기 때문에 런치 코스로 예약을 했습니다. 런치 코스의 가격은 20만 원입니다. 한 끼에 20만 원짜리 점심을 먹으면 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무신사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티셔츠 4장을 살 수 있고, 민병철유폰 전화 영어를 두 달치 결제할 수 있는데…’ 하지만 놀랍게도 훌륭한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런 생각은 사라지고 맙니다. 비교할 수 없는 만족감을 주기 때문이죠. ‘그 돈이면…’ 같은 태도로 모든 가치를 돈으로 치환하는 건 사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점점 더 느끼게 됩니다. 서론이 길었는데, 서둘러 시작해보겠습니다. 20만 원짜리 정식당은 과연 ‘한번쯤’ 갈 만한가? 그게 궁금했다면 도움이 될 겁니다.
반찬, 캐비어, 전복 등등이 오늘의 코스입니다. 보통 파인다이닝의 메뉴는 저런 식입니다. 정확히 어떤 요리인지 알 수 없게 요리 이름을 써놓고 상상하게 만든 다음에 깜짝 놀라게 만드는 극적 효과를 노리기 때문인지는…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런식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메뉴판 오른쪽을 보면 추가로 시킬 수 있는 음식도 있습니다. 제일 유명한 게 ‘맛있는 김밥’이라 추가 주문했습니다.
메인 메뉴는 한우 말고 오리를 선택했고, 디저트는 돌하르방으로 했습니다. 만약 기회(?)가 된다면 ‘울릉도 메이플’도 먹어보는 걸 추천합니다. 울릉도 메이플은 예전에 다른 행사에서 먹어 본 적이 있는데, 돌하르방과 비교하면 더 맛있더라고요.
1. 반찬
코스의 첫 번째는 보통 아뮤즈 부쉬라고 해서 한 입에 쏙 들어가는 음식이 나옵니다. 이 친구들의 역할은 “우리 이런 음식 하는 레스토랑이다”라는 걸 보여주면서 입맛을 돋우는 건데요. 정식당은 한식 레스토랑인만큼 아뮤즈 부쉬가 아닌 ‘반찬’이라는 이름으로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두부 요리입니다. 중앙에 무덤(?)처럼 생긴 건 명란에 감태를 올린 겁니다. 감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건 들기름, 그 아래에 두부가 숨어 있습니다. 두부는 셰프가 직접 내렸는데, 고소한 콩 맛이 강하지 않아서 단맛 없는 푸딩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숟가락으로 모두 비벼서 먹으면 된다고 했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탓에 따로 따로 먹었습니다. 그래도 맛있었습니다.
육회 토스트입니다. 브리오슈 빵 위에 트러플 소스와 한우 안심 육회가 버무려진 채 올라가 있고, 그 위에는 파마산 치즈를 곁들였습니다. 트러플이 들어가니 육회보다는 타르타르에 가까웠는데, 브리오슈 빵이 폭신하게 육회의 식감을 받쳐주는 게 기분이 좋았습니다.
장어 밥 요리입니다. 장어를 부드럽게 조리한 다음, 직접 만든 고추장 양념을 발라 숯에 그을려서 조리했다고 합니다. 장어 밑에 말려 있는 건 쌀부각이고, 그 안에는 블루베리와 샐러리 피클을 곁들인 비빔밥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 작은 요리 하나에 많은 게 들어가 있죠? ) 장어는 살짝 매콤한 편이고, 다른 ‘반찬들’과 마찬가지로 식감의 균형이 아주 좋습니다.
푸아그라 무스 타르트입니다. 아래쪽에는 푸아그라와 생크림을 이용한 무스, 그 위에는 얇게 슬라이스한 배, 그 위에는 수정과로 만든 젤리를 올렸습니다. 수정과, 고추장, 육회처럼 한국적인 음식을 매력적으로 조합할 줄 아는 게 정식당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마지막 반찬은 능이 버섯을 우려낸 따뜻한 스프입니다. 스프라고 소개를 해줬지만, 약간 바디감이 있는 차 같은 느낌이었고요. 감칠맛이 좋고, 단맛도 있어서 입맛을 확실히 끌어올려주는 음식이었습니다. 이건 중간중간에 마셔도 되고, 한번에 마셔도 되고 자유롭게 하면 됩니다. 반찬 중에서는 저는 이게 제일 좋았습니다.
2. 캐비어
개인적인 얘기이긴 한데, 저는 캐비어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환장하지도 않는 편입니다. 높은 평가를 할 확률이 낮다는 뜻입니다. 로얄 칼루가 캐비어를 줄전쟁이 귀에 올렸고, 밑에 깔린 육수는 훈연한 생선뼈를 활용한 지리 육수에 동치미를 곁들여서 산뜻하게 표현한 음식입니다. 돌돌 말린 줄전쟁이 속에는 오이가 들어 있습니다. 숟가락으로 캐비어, 줄전쟁이, 육수를 한 번에 떠서 먹으면 됩니다. 동치미의 신맛이 툭 치고 들어오는 게 재밌긴 했지만, 저는 신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 음식에서는 감동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세비체 좋아하는 분은 좋아할 것 같습니다.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식기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괜찮은 식기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는데요. 이날 정식당에서는 자개 젓가락 받침을 발견했습니다. 저집이라는 젓가락 전문점에서 만드는 제품인데, 아쉽게도 위 사진 속 제품과 동일한 건 이제 판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른 디자인은 있으니 궁금한 분들은 구경가봐도 좋겠습니다. 링크는 [여기].
3. 전복
전복 자태가 영롱합니다. 극강의 부드러움을 느낄 수 있는(살면서 이토록 부드러운 전복은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전복이었는데요. 압력 밥솥에 전복을 한 시간 정도 찌고 나서, 한 번 더 숯에 구워서 훈연향을 입히는 방식으로 조리했습니다. 사진에서는 안 보이지만 전복 밑에는 백김치가 숨어 있어서 같이 먹으면 궁합이 좋아요.
그릇 중앙에 있는 레몬색 소스는 뵈르블랑 소스라고 해서 프렌치 요리에 많이 쓰는 소스인데 화이트와인 비네거와 버터를 베이스로 하고, 전복을 찌고 남은 육수를 가미해 감칠맛을 더했다고 합니다. 설명만 들어도 맛이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고, 실제로 먹으면 다층적 레이어가 느껴지는 정말 맛있는 소스입니다. 어떤 재료를 찍어 먹어도 훌륭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소스랄까요. 그 옆을 둘러싼 초록색 소스는 방아로 만든 오일입니다. 방아는 경상도에서 주로 먹는 향신채인데, 조금 호불호가 있을 수도 있어요. 저는 극호. 고수는 싫어해도 방아는 좋아합니다.
4. 맛있는 김밥
‘맛있는 김밥’은 특별 대우하는 마음으로 사진을 두 장이나 넣었습니다. 이 김밥은 아마 한국에서 가장 비싼 김밥 한 줄이 아닐까요? 깁밥 한 줄에 2만 8,000원… 저도 마음 먹지 쉽지 않았습니다. 맛은 말해 뭐합니까, 훌륭하죠.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다른 음식과는 결이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훨씬 더 직관적인 맛이었습니다. 어렵고, 복잡하고 깊고 그런 것 없습니다. 입에 넣자마자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바삭하게 튀긴 김부각 속에 트러플, 한우 안심 불고기가 밥과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한 손으로는 김밥을 살포시 쥐고, 다른 한 손으로 버터나이프를 들어, 옆에 있는 트러플 아이올리 소스를 쓱쓱 발라 먹으면 됩니다. 한국인에게는 단맛, 쓴맛, 짠맛처럼 유전자에 각인된 맛이 ‘불고기 맛’이라는 게 있잖아요. 고급스러운 불고기 맛입니다. 대신 단맛을 줄이고, 풍미를 끌어올린 불고기 맛에 가깝습니다. 언젠가 정식당이 재해석한 ‘불고기’라는 음식도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참고로 김밥에 쓰는 쌀은 종종 바뀌는데 이날 사용한 쌀은 태안의 알찬미였습니다.
5. 제주 옥돔
아, 이것도 굉장했죠. 제주 옥돔를 부드럽게 찐 다음 뱅어포를 찹쌀풀에 발라 붙였습니다. 조리한 방식을 들으면 정말 지극정성입니다. 그 다음 팬에 조리에서 바삭한 식감과 풍미를 더 살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보리밥, 멜젓 소스, 튀긴 멸치, 직접 담근 갓김치를 잘라서 버무렸습니다(안 보이겠지만).
음식 설명이 끝나면 서버가 주전자에 담긴 육수를 그릇에 조르르 부어주는데요. 국물은 잔치국수에서 모티브를 얻은 멸치 육수 베이스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육수에 있는 건지, 보리밥 밑에 깔려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김 오일도 어딘가 들어가 있어서 미역국 같은 뉘앙스도 들었습니다. 갓김치는 오독오독, 보리밥은 탱글탱글, 뱅어포는 바삭바삭, 온갖 식감 대잔치였습니다. 한국인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든든한 한 그릇이었습니다. 이런 만족감은 양식에서는 느끼기 어렵잖아요.
6. 오리
이건 오늘 먹은 코스 중에 가장 아쉬웠습니다. 단, 지금까지 평가가 모두 그랬지만 저의 입맛에 기반한 후기이니 참고만 해주세요. 우선 재료는 경북 봉화산 오리의 가슴살과 껍질을 썼습니다. 10일 정도 드라이 에이징한 오리를 팬에 조리해서 껍질의 쫄깃함을 살린 후, 오븐에서 부드럽게 저온조리(콩피)한 다음, 마지막에는 아카시아 꿀을 발라 마무리했습니다. 아카시아 꿀을 발랐다고 해서 특별히 단맛이 강하 건 아니었습니다.
소스가 오리 고기 옆으로 하나씩 있는데, 갈색 소스는 포트와인을 이용한 소스인데 처음 들어보는 소스여서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고, 왼쪽 소스는 그릭요거트와 참외를 이용한 소스입니다. 저는 그릭요거트 소스가 더 좋았습니다. 가장 왼쪽에 올려진 건 피클링한 참외, 그린빈, 오리 다리를 건조해서 만든 잼과 세이지로 만든 페스토가 숨겨져 있습니다. 오리 요리가 3일 전부터 서빙된 신메뉴라고 해서 어떠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그냥 맛있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맛은 있었지만 크게 임팩트는 없었습니다. 오리의 고유한 매력은 잘 안 느껴졌습니다.
7. 감태 잣국수
그리고나서 엄청난 요리가 나왔는데, 이날 먹었던 최고의 메뉴, 감태 잣국수입니다. 감태가 함유된 면에 감태 퓨레로 양념을 했고, 들기름으로 고소한 풍미를 더했습니다. 육수는 한우 양지 육수를 베이스로 가평잣을 곱게 갈아 넣었다고 합니다. 사진에서는 안 보이지만 옆에 직접 담근 백김치과 물김치가 있어서 곁들여 먹으면 됩니다. 콩국수처럼 보이지만 맛은 완전 다릅니다. 콩국수처럼 바디감이 있지도 않고, 조금은 라이트한 목넘김인데 잣의 풍미가 굉장하고, 감태와 함께 먹으면 서로 맛을 상호폭발시킵니다. 이 음식을 따로 판다면 3만 원이어도 먹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양은 이것보다 많이 해서요.
8. 술지게미
메인 음식이 끝나고 디저트로 넘어가기 전에 입안을 정리해주는 역할의 디저트입니다. 막걸리를 발효하면 생기는 침전물을 술지게미라고 하는데, 그걸 끓여서 알코올과 발효취를 날린 후 소르베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막걸리 맛이 나는 소르베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디저트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짧게 씁니다.
9. 돌하르방
제주를 형상화한 정식당의 시그니처 디저트입니다. 워낙 다양한 재료가 들어가 있어서 버라이어티한 식감을 느낄 수 있는 재밌는 디저트입니다. 비주얼은 남다르고, 맛은 어디선가 먹어본 맛있는 맛입니다.
마지막에는 차와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다과가 준비되고, 영수증도 함께 나옵니다. 차는 선택할 수 있는데, 저는 아이스 귤피를 추천합니다. 귤 껍질로 만든 차인데, 쉽게 맛 볼 수 없으니까요.
혼자 밥을 먹는 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2인 손님이었는데요. 방문하기 전에 찾아보니 이곳에서 프로포즈를 하는 커플도 있고, 상견례를 하는 커플도 있더라고요. 가격이 비싼 만큼 중요한 날 방문하는 것도 물론 좋고, 미식가 친구들과 함께 가는 것도 좋으니 기회가 되면 한번쯤 가보면 좋겠습니다. 20만 원은 물론 비싸지만, 이렇게 많고 다양한 메뉴를 누군가와 혼자 가지 않고 혼자 먹을 수 있다는 건 코스 요리의 큰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임정식 셰프가 흑백요리사 시즌2에 출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예약하기 힘들어지기 전에 방문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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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