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사케에 빠져들고 있는 뉴비 객원 에디터 김은아다. 깨끗하게 맑게 청량하게, 그러나 가볍지는 않게. 사케를 생각하면 이런 문장이 떠오른다. 똑같이 투명해 보이지만 때로는 멜론주스, 때로는 포카리스웨트 같기도 한 이 술, 사케를 마시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한자도 일본어도 모르는 까막눈이어도 괜찮다. 사케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사케 완전 기초 입문 가이드.

일단 충격 사건. 사실 사케는 사케가 아니다. 일어로 사케(酒)는 술, 그러니까 모든 종류의 주류를 통칭하는 말이다. 우리가 ‘사케’할 때 떠올리는 맑고 청명한 그 술은 바로 니혼슈(日本酒), 그러니까 ‘일본주’다. 일본 전통 방식으로 만든 쌀 발효주라는 의미다. 일본 주세법은 ‘쌀과 물, 누룩을 이용해 만든 발효주’만을 니혼슈로 인정한다. 때로 양조 과정에서 알코올이 추가되기도 하지만, 완성된 니혼슈의 알코올 도수는 22% 아래여야 한다. 보통 니혼슈의 도수는 12~16% 정도니 와인(13%)이나 소주(16%)를 즐기는 이들의 입맛에 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왕 공부를 시작한 김에 몇 가지만 더. 새로운 나라의 술을 탐험하려면 어쩔 수 없이 약간의 외국어 공부가 필수다. 그래서 한 나라의 술을 마시는 것은 곧 그 나라의 문화를 맛보는 셈이기도 하다. 말과 맛을 모두 탐험하는 것이니.

일본어를 몰라도 사케를 마셔봤다면 ‘준마이 다이긴조’ 같은 용어는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이건 쌀을 깎아낸 정도를 의미하는 ‘정미율’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정미율이 70%라면, 쌀을 30% 깎은 알맹이만 술로 만든다는 의미다. 더 많이 깎아낼수록 쌀의 불순물이 제거되고 순수한 알맹이만 남을 테니, 깔끔하고 섬세한 맛을 느낄 수 있다. 향에서도 다채로운 아로마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정미율이 낮은 사케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쌀 자체의 구수함과 감칠맛은 덜 깎아냈을 때 풍부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 다시 말하면, 정미율이 높으면(쌀을 덜 깎으면) 구수하고 묵직한 맛을, 정미율이 높으면(더 많이 깎으면) 섬세하고 가벼운 맛을 낸다.

예를 들어, 면세점에서 가격이 저렴해서 ‘면세점 사케’로 불리는 ‘닷사이 23’은 정미율이 23%다. 그 조그만 쌀 알갱이의 1/5 정도만 사용한다는 의미인데, 덕분에 쌀 본연의 순수한 맛과 깨끗하고 투명한 질감을 지닌다는 평을 받는다.
이제 사케 이름의 단서를 풀어볼 차례. 정미율이 60% 이하일 경우 ‘긴조’, 50% 이하일 경우 ‘다이긴조’라고 한다. 다이긴조는 쌀의 반 이상을 깎아냈다는 의미다. 사케에 따라 양조 과정에서 주정(양조 알코올)을 첨가하기도 한다. 양조 알코올을 첨가하지 않고 쌀과 누룩만으로 빚는 술은 ‘준마이’라고 부른다. 만약 정미율 50%에 주정을 첨가하지 않은 사케라면 이름에 ‘준마이 다이긴조’가 붙게 되는 것.

때로는 사케 라벨에서 플러스(+), 마이너스(-)가 붙은 것을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주도(酒度)’라는 기준으로 달콤함과 드라이한 정도를 의미한다. 플러스(+)가 붙은 양수는 숫자가 높을수록 드라이하고, 마이너스(-)가 붙은 음수는 달콤한 정도를 나타낸다.
이제 라벨만 보더라도 1차적으로 그 술에 대한 단서를 읽을 수 있을 터. 진짜 공부를 시작해 보자. 원래 술 공부는 마시면서부터가 진짜니까. 입문자가 사케의 매력에 제대로 빠져들게 만들 5만 원 이하의 술을 골라봤다.
사라 준마이 긴조

청순해 보이는 하늘색의 라벨에서 호감이 가는 사케. 그렇지만 역사는 꽤 깊다. 사이타마 지역에서 1894년부터 술을 빚어온 키타니시 양조장의 제품이다. 5대째 술을 만들며 쌓은 기술력을 담아 요즘 소비자들의 입맛을 겨냥한 술이다. 양조장이 위치한 지역의 지하수를 길어서 사용하고, 술을 짧게 열처리만 거치는 덕분에 신선함이 살아있는 맛을 느낄 수 있다.
정미율 50%로, 리치와 백도의 매끄러운 단맛과 상큼한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여기에 청포도 같은 산미가 어우러지면서 입안을 마무리해준다. 라벨이 주는 느낌처럼 산뜻하달까. 술의 콘셉트가 ‘향기·단맛·신맛이라는 3가지 요소의 하모니’라는데, 그 말처럼 복합적인 맛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단, 알코올 특유의 맛이 살아있기 때문에 사람에 따라 ‘불호’ 포인트가 될 수도. 생선회와는 언제나 좋고, 담백하고 가벼운 안주류에 곁들이기 좋다. 과일을 곁들인 루콜라 샐러드나 생선회를 활용한 세비체, 칼라마리 튀김 정도?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루프톱에서 시원한 온도로 홀짝홀짝하기에 딱 어울리는 술. 가격은 4만 원대 중반.
시치다 준마이

이자카야를 즐겨 찾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 ‘칠전(七田)’이라고 써진 이 사케의 라벨을 본 적이 있을 듯하다. 대중적이고 가격대로 합리적이라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사케. 에디션에 따라 라벨의 색이 주황색, 엷은 흰색 등으로 다양하다. 사케 입문자라면 연두색 레벨의 준마이부터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다.
맵고 짠 음식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한국 술 시장에서는 맛이 분명하고, 어느 정도 보디감도 있는 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와인으로 예를 들면, 맛이 또렷하고 묵직한 디아블로 카베르네 소비뇽이 ‘국민 와인’으로 불리는 것처럼. 그런 점에서 풍부한 질감을 가진 시치다 준마이는 한국인 애주가들의 입맛에도 잘 맞는 사케일 것 같다. 특히 양조장이 있는 사가현의 두 가지 쌀을 사용해 쌀의 감칠맛이 입안을 맴돈다. 동시에 멜론과 청사과의 과즙을 마시는 듯한 상쾌한 단맛도 느낄 수 있다. 어느 정도 무게감이 있는 덕분에 간이 센 음식에 곁들여도 무리가 없다. 굽네치킨의 고추바사삭 같은 닭요리에도, 김치찜 같은 얼큰한 안주에도 충분히 어울릴 듯하다. 가격은 4만 원대 초반.
카이운 이와이자케 토쿠베츠혼죠조

아예 집에 한 병을 사두고 그날의 무드에 따라 시원하게 또는 따뜻하게 마시고 싶다면 이 술이 괜찮은 선택이다. 어떤 온도에서도 최적의 맛을 보여주는 올라운더 사케에 가깝기 때문. 시즈오카 지역의 도이주조에서 만드는 술인데, 이곳은 일본의 내로라하는 술 경연에서 셀 수 없는 수상 기록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맛은 경쾌하고 산뜻하다. 바나나와 요구르트 같은 부드러움과 함께 허브의 신선함이 어우러진다. 덕분에 끝맛이 깔끔하다. 야키토리 오마카세에서 이 술을 발견한다면 더없는 선택이 될 것 같다. 담백한 연골이나 안심, 기름지고 짭조롬한 츠쿠네, 간장 소스를 바른 주먹밥까지 다양한 메뉴와 모두 잘 어울리니까.
일본에서는 축하할 자리에 이 술을 함께하기도 한다. 이름의 ‘카이운’이 운을 틔운다는 개운(開運)을 의미하기 때문. 합격이나 승진 등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면 이 사케를 사놓고 ‘운’이 함께하길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가격은 3만 원대 초반.
미이노고토부키 준마이 긴조 +14 오카라구치

‘슬램덩크 사케’로 일본이고 한국이고 한동안 품절대란을 빚었던 술. 라벨 그대로, <슬램덩크>에 헌정하는 술이다. 그렇다고 요즘 편의점에 넘쳐나는 뜨내기 컬래버레이션 술이라고 생각하면 섭섭하다.
엄밀히 말하면 <슬램덩크>보다 사케가 먼저이기 때문. 작품의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는 자신이 즐겨 마시는 사케의 양조장 이름(미이노코토부키)을 따서 캐릭터의 이름을 붙였다. 그 캐릭터는 바로 정대만(마츠이 히사시)!
여기에 화답해 양조장에서도 정대만의 백넘버인 14를 전면에 새긴 사케를 발매한 것. 라벨뿐 아니라 알코올 도수도, 주도(酒度)도 모두 14로 통일했다. 발매일도 작품 속 정대만의 생일에 맞췄다니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담뿍 느껴진다.
보통 주도가 +6 이상이면 매우 드라이한 술로 꼽히는데, +14이니 단맛은 거의 없이 드라이함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단맛의 빈자리는 또렷한 산미가 채운다. 일본에서 이 사케의 맛을 설명할 때 ‘칼날에 베인 듯 날카롭다’는 묘사가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은은하게 풍기는 청사과와 레몬, 라임의 뉘앙스는 더위에 지친 입맛을 깨워주기에 딱 좋다. 소비뇽 블랑의 짜릿한 산미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케. 덕분에 조개류 해산물과 더없는 궁합을 자랑한다. 5만 원대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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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일로 여행하고, 취미로 술을 씁니다. 여행 매거진 SRT매거진 기자, 술 전문 뉴스레터 뉴술레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