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술 마실 핑계를 만드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객원필자 김은아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같은 이유도 식상해져서 급기야 술 뉴스레터(뉴술레터 newsooletter.com)도 만들고 있다. 쓰려면, 마셔야하니까. 오늘은 요즘 가장 자주 마시는 주종인 와인 얘기를 할까 한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다. 이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 색을 거칠게 분류하면 빨주노초파남보로 뚝뚝 끊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7개가 아니라 7,000개가 될 수도 있는 섬세한 색의 연속이기도 하다.
어쩌면 와인 품종에 대한 설명도 이것과 비슷할 수 있다. 기본적인 특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카테고리 안에 묶이지 않는 와인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요 녀석은 카베르네 소비뇽이지만 카베르네 소비뇽답지 않게~” 같은 수식이 횡행하는 것이 이 바닥이랄까. 이제 막 와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와인 초보들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품종 가이드를 준비했다. 아래 설명을 읽어내려가다가, 자신의 마음을 건드리는 단어들이 많은 품종부터 섭렵해보자. 그리하여 점차 미세한 그라데이션을 맛보는 즐거움으로 뻗어 나가시기를.(편집자주: 아래 사진은 모두 해당 품종과는 무관한 사진이다.)
[1]
카베르네 소비뇽
Cabernet Sauvignon
이제 막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면 여기서부터 시작하자.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한 유명한 품종이다. 다양한 재료를 계량하기에 앞서 저울의 영점을 0g으로 맞추듯이, 당분간은 카베르네 소비뇽을 평균점으로 두어도 좋다. 그만큼 색, 맛 등 많은 면에서 레드 와인에 기대하는 특성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구하기도 쉽다. 만약 여러분이 아주 외진 동네의, 와인이라고는 단 한 종류만을 취급하는 가게에 간다면 그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일 확률이 높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세상에서 가장 많이 와인으로 만들어지는 포도인데, 아주 옹골찬 포도 품종이기 때문이다. 알은 작지만 껍질도 단단하고 웬만한 병충해나 온도변화에도 잘 버틴다. 와인 세계관에서 포도 껍질은 많은 것을 의미하는데, 껍질이 두께에 따라 흔히 떫은맛으로 표현되는 탄닌의 정도가 결정된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두꺼운 껍질 덕분에 탄닌, 보디감이 묵직하고 색도 짙다. 동시에 블랙베리 같은 과일 향과 산미가 풍부해 균형감을 고루 갖추고 있다. ‘시다, 떫다, 달다’처럼 어느 한 맛이 뾰족이 튀어나오지 않는 덕에 어떤 음식과도 매치하기 쉽다. 낮은 가격대의 와인이라도 웬만한 맛을 보여주는… 음, 지오다노 같은 품종이다.
[2]
메를로(멜롯)
Merlot
카베르네 소비뇽이 이렇듯 무난하고 대중적인 품종이다 보니, 대개 와인 초보자들에게 권해주는 와인도 카베르네 소비뇽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추천받은 와인이 너무 씁쓰레하거나 떫게 느껴진다면? 많은 이들이 이 단계에서 ‘역시 드라이한 와인은 맛이 없다’면서 스위트 와인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곤 한다. 그런데 성급하게 백스텝을 밟기 전에 ‘순한 맛’에 잠시 발을 들여보는 건 어떨까. 메를로가 바로 그럴 때 선택하면 좋을 품종이다.
메를로는 카베르네 소비뇽보다 얇은 껍질을 가진 품종으로, 탄닌이 적어 부드러운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장점 덕분에 와인 생산자들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블렌딩해 와인의 맛을 최대치로 이끌어낸다. 메를로가 카베르네 소비뇽의 터프한 캐릭터를 보완하고, 보디감을 좀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 라벨에 ‘카베르네 소비뇽’이라고 표기한 와인이라도 자세히 읽어보면 메를로를 일정량 블렌딩한 경우가 많다는 사실.
[3]
피노누아
Pinot Noir
피노누아의 맛을 설명할 단어를 고르는데 갑자기 배우 임시완의 얼굴이 떠오른다… 지금보다는 <미생>의 청초하고 가녀린 장그래 시절의 그가… 피노누아는 잔에 따를 때의 빛깔부터 곱다. 찐한 버건디에 가까웠던 앞의 두 품종과 다르게, 와인 아래로 잔을 들고 있는 손까지 비쳐보일 것 같은 투명한 보랏빛. 잔을 한 바퀴 돌리면 코로 부드럽고 향긋한 과일 향이 스며들어온다. 산딸기나 체리처럼 좀처럼 떫은맛을 찾기 힘든 붉은 과일 맛을 느낄 수 있다. <빨간 머리 앤>에서 앤이 다이애나에게 대접한 딸기술이 와인이었다면 아마 피노누아가 아니었을까.
피노누아는 마니아층이 두터운 품종이기도 한데, 특유의 반전 매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숙성된 피노누아는 사뭇 다른 캐릭터를 보여준다. 비에 젖은 나뭇잎과 흙, 버섯처럼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맛있는 피노누아를 마시면 이렇게 다양한 향과 맛이 엄마손파이처럼 겹겹이 레이어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꼽히는 로마네 콩티가 바로 피노누아로 만든 와인이다.
[4]
소비뇽 블랑
Sauvignon blanc
어릴 때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는 구절을 읽을 때면 떠올리곤 했다. 아주 새파랗고 단단한 청색의 송이에, 입에 침이 돌게 만들 정도의 날카롭도록 새큼한 산미를 지닌 포도알을. 소비뇽 블랑은 바로 그런 품종이다. 푸릇푸릇한 풀 냄새에 청사과와 라임처럼 온통 초롯빛의 것들을 한 아름 안아 든 상태로 코앞에 레몬즙을 흩뿌린 느낌. 그야말로 입을 상큼하게 뒤덮는 카리스마가 있다고 할까.
끝맛도 남다르다. 레드, 화이트 할 것 없이 대부분 와인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아스라이 사라질 때 소비뇽 블랑은 미련 없이 깔끔하게 사라진다. 이는 와인 숙성 단계에서 비롯되는 차이다. 보통 와인은 오크통에서 숙성하면서 술에 오크향이 천천히 스며든다. 이 과정에서 빵처럼 구수한 풍미, 부드러운 여운 등을 만들어내는데 소비뇽 블랑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스테인리스 탱크에서 아주 짧게 숙성하는 것이 전부다. 한여름 눅눅한 더위에는 <환승연애>처럼 길게 이어지는 아련함보다는 이런 깔끔한 마무리가 어울리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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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도네
Chardonnay
포도마다 잘 자라는 기후가 있다. 샤르도네는 외로워도 슬퍼도 굳세게 캔디처럼 자란 90년대 드라마 여주처럼 기후를 가리지 않고 서늘한 곳부터 무더운 지역까지 잘 자란다. 그리고 자신이 자란 곳의 DNA를 맛에서 내뿜는다. 서늘한 곳에서 자란 샤르도네는 사과, 배, 시트러스 같은 새콤한 풍미를, 온화하고 더운 곳에서 자란 샤르도네는 멜론, 복숭아, 바나나 같은 잘 익은 향이 난다. 화이트 와인이라고 소비뇽 블랑처럼 새침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샤르도네는 버터리한 맛으로 사랑받기도 하는데, 이것은 품종이 아니라 양조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날카로운 산미를 잡아내기 위해 발효 후 남은 효모를 와인에 넣고 섞어주는 유산 발효 과정을 거칠 때, 유질감이라고 하는 특유의 맛이 나온다. 샤르도네는 보통 오크 통에서 숙성하는데 토스트와 바닐라와 같은 구수하고 향긋한 꽃향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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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슬링
Riesling
리슬링은 달지만 달지 않다. 모스카토 다스티처럼 혀에서 바로 느껴지는 강렬한 단맛은 결코 아니다. 대신 복숭아나 살구처럼 몰랑하고 달콤한 과일 향이 코와 입을 감싼다. 평생 주량이 맥주 한 잔인 강경 스위트파 엄마와 ‘단 술은 술이 아니다’리고 주장하는 강경 드라이파 아빠가 함께 마시는 자리에서 리슬링을 고르면 이견이 없다. 리슬링은 과일뿐 아니라 꽃을 한 아름 식탁에 펼쳐놓은 듯 화사한 향기와 함께 흔히 ‘휘발유’ 아로마라고도 표현되는 꿀향을 느낄 수 있는데, 이 독특한 향기에 매료되면 빠져나오기 힘들다. 이렇게 풍성한 감각 때문일까. 봄이 와서 화사하게 꽃들이 피어날 때나, 가을이 와서 과일이 익어가는 계절에는 왠지 리슬링을 마셔줘야 할 것만 같다. 리슬링을 따르고 천천히 잔을 돌리면 달콤향 향이 퍼져나가 공간을 채운다. 행복이라는 향기의 디퓨저를 연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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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일로 여행하고, 취미로 술을 씁니다. 여행 매거진 SRT매거진 기자, 술 전문 뉴스레터 뉴술레터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