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SNS의 노예다. 내 욕망의 근원은 대부분 SNS에서 온다. 가끔은 버겁기도 하다. 나 빼도 지구의 모든 사람들이 좋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힙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 같은 기분. 나의 비루한 현실과 스마트폰 속의 화려함의 간극이 너무 커서 우울해하고 괴로워한다.
인사가 늦었다. 오랜만에 술 리뷰로 돌아온 에디터M이다. 오늘은 최근 SNS를 뜨겁게 달군 술을 들고 왔다. 아아 참으로 영롱한 모양새다. 보는 순간, ‘아 이건 가져야 해!’를 외쳤다. 속이 훤히 내비치는 투명한 병 안에 담긴 로제 와인이라니. 맛보기도 전에 일단 인증부터 하고 싶어지는 모양새가 아닌가. 하지만 미리 스포를 하자면 맛도 충분히 좋다.
그래서 이 술의 이름은 뭐냐고? 이름은 일레븐 미닛. 아니, 저스트 텐미닛도 아니고 11분이라니. 이 애매한 시간은 뭘까 궁금했는데, 이 11분이란 이름은 로제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왔다. 로제 와인을 만드는 과정은 이렇다. 적포도의 껍질을 제거한 뒤 으깨 포도 주스를 추출한다. 그리고 포도 껍질과 이 주스를 잠시 만나게 해서 핑크빛의 색과 로제 와인 특유의 맛을 낸다. 그 시간이 바로 11분이다. 그러니까 일레븐 미닛은 검붉은 포도 껍질과 포도의 알맹이가 만나는 시간인 셈이다.
자 그럼 이 어여쁜 아이를 조금 더 찬찬히 살펴볼까. 라벨을 살펴보는 일은 보물찾기 같다. 숨어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게 설레고 신난다. 이번엔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까. 꽃과 나비가 그려진 원형의 라벨의 중간이 뻥 뚫려있다. 동그란 구멍을 따라 어떤 문구가 쓰여있다.
“ODI ET AMO”
해석하면 미워해 그리고 사랑해다. 크으. 기원전 1세기에 사랑을 노래했던 시인, 카툴루스다. 이 시는 이천 년을 이어온 연가다.
동그랗게 에워싼 카툴루스와 시 그리고 그 사이 빈 공간 사이로 장밋빛 로제 와인이 보인다. 그 뒤에 희미한 무언가가 비친다. 무엇일까. 바로 카툴루스가 사랑했던 여인, 이 애틋한 연가의 주인공 클라우디아. 한잔 한잔 와인을 비울수록 클라우디아의 모습이 점점 더 선명해진다. 술이 없어질수록 더 잘 보이는 사랑하는 여자의 얼굴이라니. 일레븐 미닛은 어쩌면 몇 천 년 전엔 금지된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한 그들에게 바치는 헌정주인 걸까.
코르크 마개 대신 유리 마개를 사용했다. 유리 마개에는 한 마리 나비가 그려져 있는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 정확히 아는 기분. 정말 작은 것 하나까지도 아름답다.
일단 한 잔을 따른다. 동그란 잔을 따라 복합적인 꽃향기가 올라온다. 봄이다. 꽃향기, 여름 과일 향기, 보슬보슬한 털이 있는 복숭아의 향이 느껴진다. 처음엔 좀 싱겁다 싶었는데, 술을 넘기고 끝 맛이 너무 좋아 입맛을 쩝쩝 다신다.
향긋하고 산뜻한 맛이라 어떤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진한 맛의 비스테카 티라미수와도 궁합이 좋고, 파스타, 피자 어떤 음식이든 잘 어울리겠다.
청순했다가 섹시했다가 이 투명한 술은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알코올 도수는 12.5%로 생각보다 도수는 높다. 차갑게 마셔야 그 맛이 배가 된다. 다만, 맛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얼음이 녹으면 금방 싱거워지니 조심하자.
지난번에 리뷰한 릴레 블랑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고운 핑크빛의 와인도 분명 좋아할 거라 확신한다. 여름날의 한낮과 닮은 술이다. 영롱하고 아름답다. 좋은 날 여러분과 함께 이 와인을 마시고 싶다. 즐겁고 아름답게. 우리 인생은 맛있는 술만 마시기에도 너무 짧으니까. 다들 이 좋은 술을 마셔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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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