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

먹고, 마시고, 사랑하라

안녕, 시칠리아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온 에디터M이다. 푸르고 따듯했던 시칠리아와 달리 서울은 춥고 회색빛이다. 오늘은 아름다운 시칠리아를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안녕, 시칠리아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온 에디터M이다. 푸르고 따듯했던 시칠리아와 달리…

2019. 11. 25

안녕, 시칠리아에서 한 달 살기를 하고 돌아온 에디터M이다. 푸르고 따듯했던 시칠리아와 달리 서울은 춥고 회색빛이다. 오늘은 아름다운 시칠리아를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가장 즐겁게 마셨던 술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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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0월, 서울로 돌아가는 날을 며칠 앞둔 어느 저녁. 시칠리아 동네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에서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도 보지 않고 마치 이탈리아 사람처럼 술을 주문하고 도란도란 담소를 나눈다. 에디터H는 프로세코, 나와 에디터B는 아페롤 스프리츠. 언제나 그렇듯 내가 에디터B에게 물었다(질문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석준아(B의 본명), 너는 한국에 돌아가면 뭐가 제일 그리울 것 같아?”

“저 많죠. 깔조네(피자의 한 종류로 빵 안에 피자 토핑을 넣고 구운 것을 말한다)랑
아페롤 스프리츠요.”

“어! 나돈데 이거 처음엔 별로였는데…”

“이 맛에 중독된 것 같아요.”

중독이란 표현이 참으로 적절하다. 작년에 아페롤에 대한 소개를 한 적이 있지만(그 기사가 궁금하다면 여기를 보자) 한 달 내내 마셨더니 이제 진짜 이 술이 무엇인지 쓸 준비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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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토랑에 들어가면 메뉴를 보기도 전에 웨이터에게 말한다. 아페롤 스프리츠 플리즈. 진득한 액체 속에 기포가 보글보글. 이 음료가 바로 식전주, 아페리티보의 대표 주자인 아페롤 스프리츠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오렌지빛 칵테일을 정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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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맛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처음 마시면 당황할 수 있다. 상상하던 맛과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고운 빛깔과 달리 꽤 쓰다. 아페롤 스프리츠의 맛을 두 단어로 설명하면 달콤 쌉싸름. 약한 오렌지 껍질 향과 각종 허브향도 느껴지기 때문에 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어렸을 적 먹던 브루펜 시럽이 생각나는 맛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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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식전주는 본격적인 식사를 하기 전, 입맛을 돋구기 위해 마시기 때문에 맛이 씁쓸한 경우가 많다. 여기에 프로세코의 기포와 달달한 맛, 약한 오렌지 향(색이 진하다고 오렌지 맛 사탕을 상상했다면 분명 실망할 것이다)이 섞여 있는데. 뭐랄까 약초를 물에 절인 뒤 오렌지 색소를 탄 것 같은 오묘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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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맛과 달리 만드는 방법은 너무 쉽다. 재료도 간단하다. 얼음과 아페롤 그리고 프로세코만 있다면 끝. 오렌지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대세에 지장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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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1. 와인잔에 얼음을 가득 채운다. 칵테일의 기본은 언제나 얼음을 넘치도록 채워주는 거다. 그래야 얼음이 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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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2. 프로세코(이탈리아 북동쪽에서 생산하는 화이트 와인 품종이지만, 대부분 탱크에서 대량으로 2차 발효시킨 이탈리아의 스파클링 와인을 말한다) 와인을 잔에 반 정도 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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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3.나머지 반을 선명한 오렌지빛의 아페롤로 채워준다. 이때 완전히 가득 차게 붓는 것이 아니라 아주 조금의 여유를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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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p 4. 마지막으로 탄산수를 살짝 부어준다. 해 질 녘의 하늘 같은 멋진 그라데이션을 잠시 감상한 뒤, 슬라이스한 오렌지를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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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레시피랄 것도 없다. 공식적인 레시피는 아페롤과 프로세코를 1대 1로 넣는 거지만, 독하다 싶으면 탄산수의 비율을 높이고 약하다고 느껴지면 아페롤 혹은 프로세코를 더 넣으면 된다. 그래서인지 김치처럼 레스토랑마다 맛도 모양도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묘하게 중독되는 맛이라는 건 공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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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마트에서는 직접 섞지 않고도 뚜껑만 따서 간단하게 마실 수 있는 아페리티보를 브랜드별로 꽤 다양하게 판매하고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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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페롤 스프리츠를 더 맛있게 먹는 방법은 그린 올리브를 곁들이는 거다. 그린 올리브의 씁쓸 시큼한 맛과 아페롤의 궁합은 너무 훌륭하다. 올리브를 먹으면 아페롤 스프리츠가 당기고 술을 마시면 다시 올리브가 당기니 무한대로 마시고 먹을 수 있다. 게다가 올리브는 살도 안 찌고(?) 배도 안 부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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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페롤 스프리츠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힙한 아페리티보(aperitivo, 식전주) 중 하나지만, 사실 아페리티보라는 단어는 식전주 문화 자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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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사람들은 보통 8시에서 9시 사이에 저녁을 먹는다.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8시까지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저녁이 이렇게 늦어서야, 이탈리아 사람들은 배가 고프지 않은 걸까? 대신 이탈리아에는 아페리티보 문화가 있다. ‘즐거운 저녁 식사를 연다’라는 의미의 아페리티보는 이곳에서 식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해 가볍게 칵테일을 즐기는 식전주, 혹은 식전주 문화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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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 정도가 되면 레스토랑이나 카페 앞에 아페리티보를 한다는 간판이 세워진다. 식전주와 함께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안주가 나오는 문화를 말하는데 가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지만 8유로에서 12유로 정도로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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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은 감자칩과 올리브, 차가운 햄 정도 나오는 간단한 구성부터 도저히 저녁을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화려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곳도 있다. 함께 마시는 술도 다양하다. 꼭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실 필요는 없다. 와인부터 맥주, 칵테일까지 안주와 한 잔의 술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하는 게 바로 아페리티보 문화의 핵심이니까. 쉽게 설명하면 우리나라의 해피 아워 같은 거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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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그중 팔레르모에서도 아페리티보로 가장 유명한 곳은 베스파 카페다. 한국에서부터 단단히 벼르고 찾아갔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공사 중이었다. 2번의 쓰린 고배를 마시고 떠나기 며칠 전에 겨우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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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간 베스파 카페는 분명 그럴 가치가 있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에 베스파 카페는 아페리티보를 즐기기 위한 젊은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모두들 거대한 플레이트를 앞에 두고 술을 마시며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흥이 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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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윙크를 남발하는 힙스터 웨이터에게 아페리티보 4인을 주문한다. 카페 베스파의 아페리티보 가격은 12유로.

bcut_DSC01089bcut_DSC01094[모히토부터 화이트, 레드 와인 그리고 아페롤 스프리츠까지 술도 다양하게 시켰다]

비싸다고? 나오는 양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한 걸 후회하게 될 걸. 이 가격엔 술 한 잔 값이 포함되어 있는 데다 파스타, 미니 햄버거, 차가운 햄 등등 사람 머릿수에 맞춰 나오는 메뉴는 다 먹고 오지 못한 것이 한 달이 지난 지금도 한이 될 정도로 맛이 좋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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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살기 하는 동안 많은 것들을 먹고 마셨다. 나는 혀를 즐겁게 하는 음식으로 여행지를 기억한다. 쓰고 단맛이 나는 아름다운 음료와 함께 화려한 안주를 맛보기 위해서라도 언젠가 다시 이탈리아에 가고 싶다.

그곳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사무실에 아페롤과 프로세코를 들여놨다. 아주 오래전에 일어난 일 같았던 시칠리아의 기억이 조금은 선명해진 것 같다. 그리움이 더 커지면 오렌지빛 술을 마셔야지. 그럼 회색빛인 이 서울도 오렌지색으로 물들일 수 있지 몰라.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