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혹독한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에디터B다. 나는 6개월에 한 번씩 부모님과 약속을 하는데, 더 이상 돼지가 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처음 약속하던 때가 생각난다. 아마 3년 전이었지. 엄마는 내게 슬슬 살이 찌는 거 같다며 다음 추석 때까지 원래 몸무게로 돌아가라고 잔소리 비스무리한 약속을 하자 했다. 난 언제나 그렇듯 스스로를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그거 뭐 어렵냐고 했는데, 해마다 살은 쪘고 지금은 최고 몸무게를 갱신 중이다.
서울에는 참 맛있는 게 많다. 그게 내가 살이 찐 이유다. 그리고 나는 이 술을 보면 내가 정말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세상에는 아직 맛보지 못한 술이 너무 많은 거 같아서. 오늘 소개할 술은 벌꿀로 만든 술, 고스넬스 미드(Gosnells mead)다.
아는 맛과 모르는 맛 중 뭐가 더 무서울까. (3초 쉬고) 정답은 모르는 맛이라 생각한다. 아는 맛은 머릿속 음식지도를 유지시킬 뿐이지만, 모르는 맛은 세계관을 무한히 확장시킨다. 카오팟의 맛을 알면, 솜땀이 궁금해지고, 솜땀의 맛을 알면 태국 음식을 전부 먹어보고 싶고, 그 생각은 곧 동남아 음식 전반에 대한 호기심으로 확장된다. 무서운 건 모르는 맛이다.
술도 그렇다. 서대문구의 알콜애호가 상위 10%쯤 되는 나는 새로운 술에 유독 관심이 많다. 마셔 본 술은 크게 끌리지 않는 편인데, 처음 보는 술이라면 군침을 흘린다. 길에서 내가 침 흘리는 걸 보면 새로운 술을 본 거라고 생각해달라. 갑자기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 같으니, 황급히 본론으로 들어가자. 고스넬스 미드는 벌꿀술이다.
벌꿀술? 벌꿀로 술도 만들어? 그렇다. 벌꿀로 술을 만든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 집에 있는 그로테스크한 말벌 담금주와는 다르다. 이건 북유럽의 바이킹들이 즐겨 먹은 꽤 역사가 있는 술. 오래 전 북유럽에 살던 바이킹의 사후세계관만 봐도 미드가 얼마나 역사 깊은 술인지 알 수 있다.
바이킹의 전사들은 용맹하게 싸우다 죽으면 발할라의 세계로 간다고 믿었다. 그곳에서는 낮에는 전사들이 배틀로얄을 벌이고, 저녁에는 무한 리필 돼지고기와 벌꿀주를 마신다고 한다. 그 옛날 바이킹에게는 고기와 미드가 있는 곳이 천국이었던 셈이다.
[발할라 사진은 당연히 없고, 대충 이런 느낌이 아닐까 싶어서 가지고 왔다. 출처는 드라마 <Northmen: a viking saga>의 스틸컷]
그럼 이쯤에서 갑작스럽게 퀴즈를 하나 내보려고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술은 무엇일까? 1번 곡주, 2번 과실주, 3번 벌꿀주.
정답은 ‘아무도 정확히 모름’이다. 오천 년 전 수메르인이 곡주를 마셨다는 기록이 남아있지만, 학자들은 사실상 기록만 없을 뿐 와인이나 벌꿀주가 더 오래되었을 거라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효모가 당분을 와구와구 먹으면 알콜을 만들어내는데, 포도나 꿀 자체에 당분이 있어서 이 과정이 간단하다. 이런 이유로 포도주나 벌꿀주가 최초의 술이 아니었을까 짐작하는 거다.
벌꿀주를 뜻하는 미드(mead)라는 단어가 꽤 생소할 거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오래전 유럽에서 미드가 인기를 끌었지만 벌꿀 공급량이 그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가격이 올랐고, 사람들은 대체재로 포도주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드는 센터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하긴 포도주가 얼마나 맛있는데, 비싼 미드를 고집할 필요는 없었겠지. 미드가 중심에서 밀려나는 계기는 한차례 더 있었는데, 전혀 관련 없어 보이지만 16세기의 종교개혁 때문이었다. 이전까지 유지하던 화려한 종교의식을 축소시키고 예배에 사용하던 양초의 수도 줄였는데, 이 양초에 벌집이 사용되었다. 양봉업자들은 양초 판매량이 줄어들자 어쩔 수 없이 벌꿀의 가격을 올렸고, 미드의 가격은 또 한 번 오를 수밖에 없었다. <서프라이즈>에나 나올 법한 흥미로운 이야기다.
[벌꿀주가 좋아서 미드양조장을 만들어버린 토마스 고스넬. 출처는 고스넬스 홈페이지]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이 아는 맛보다 무서운 건 모르는 맛이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내가 갖고 싶은 게 없으면 직접 만드는 대단한 사람들이 아닌가. 고스넬스 미드를 만든 토마스 고스넬 역시 그런 사람이다.
그는 미국 동부를 여행하다가 우연히 벌꿀주를 맛보고 ‘그래, 이 맛이야’ 싶었다. 런던으로 돌아온 토마스는 곧장 양조장을 만들고 미드를 만들기 시작했고 2013년에 영국 전통방식의 벌꿀주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게 만든 미드가 그다음 해에 영국 왕실의 공식 만찬주로 지정되기도 했으니 품질도 인정받은 셈.
와인에서포도의 품종이 중요하듯, 미드도 어떤 꿀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고스넬스 미드는 스페인산 오렌지나무꽃의 꿀을 원료로 사용했다.
지금까지 출시한 제품은 총 6종이다. 가장 기본적인 제품은 오른쪽 끝에 있는 고스넬스 런던. 다른 향이 가미되지 않은 오리지널 벌꿀주를 맛보고 싶다면 바로 이 고스넬스 런던을 마시면 되겠다.
언뜻 봤을 때 벌꿀주처럼 보이지 않는 술도 있다.
말린 히비스커스 꽃을 사용한 히비스커스 미드는 레드와인처럼 보이기도 하고, 구즈베리와 아쌈티를 사용한 고스넬스 구즈베리는 노랗다기보다는 복숭아 빛깔에 가깝다는 인상이다.
맥주의 주원료로 사용되는 홉을 사용한 미드도 있다. 자몽향과 시트러스향이 강한 캐스케이드 홉을 사용한 고스넬스 홉드 미드 그리고 감귤향이 나는 시트라홉을 이용한 시트라 시 미드.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개할 제품은 빈티지 2018 미드다.
다른 제품의 벌꿀 함량이 15%인 것에 반해, 런던산 꿀로 만든 빈티지 2018 미드는 무려 26%다. 한정 생산되었다는 이 미드는 병마개 디자인에서부터 꿀이 흘러내리는 듯해 더 고급스러워 보인다. 알콜도수는 빈티지 2018 미드가 12도, 나머지는 모두 5.5도.
나도 미드를 맛보는 건 처음이라 굉장히 설렜다. 잔에 따르고 마시기 전에 느껴지는 꿀의 향이 은은했다.
꿀로 만들었다고 하니 굉장히 단맛이 날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꿀의 단맛이 강하진 않지만 그 존재감은 확실히 느껴질 정도랄까. 다른 에디터들과 함께 나눠 마셨는데 특이하게도 곡주의 맛이 난다고 입을 모았다. 정말 동동주 같은 맛이 살짝 났다. 꿀로 빚었는데 어쩜 이런 맛이 날까.
스파클링 와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약간의 탄산이 있으며, 맛이 입안에 오래 남는 편이었다. 겨우 한 모금 마시고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달짝지근한 맛이 흔적이 입안에서 계속 감돌았다. 아 이거 캐릭터가 확실하구나.
6종 모두 맛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어울리는 안주가 있겠지만, 나는 미드는 꼭 고기와 함께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아래에 있다.
‘와인’하면 조도가 낮은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 떠오르는데, 미드는 다르다. 찬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서늘한 북유럽의 어떤 도시가 생각난다. 코펜하겐이나 스톡홀름 같은 곳 말이다. 그래도 어떤 느낌인지 모르겠다고? 그럼 겨울이 찾아온 <왕좌의 게임> 속 한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술과 안주를 나무 테이블 위에 투박하게 차려놓고 마시는 이런 분위기 말이다. 바이킹의 저녁 식사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추위와 싸우기 위해 술을 많이도 마셨겠지.
미국 미드 제조협회(American mead Makers Association, 실제로 이런 게 있다)의 2014년 업계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미드 매출이 42%가 증가했다고 한다. 반면 같은 해 와인 판매량은 6.2%에 불과했다. 판매량 증가에는 <왕좌의 게임>이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판매자들과 언론은 분석하는데 그럴 만도 한 것이 드라마 속에서 언급되는 ‘meat and mead’라는 조합이 그쪽 세계관의 술자리 기본 세팅이기 때문이다. 양꼬치엔 칭따오, 치킨엔 맥주처럼.
[왓챠플레이에서 실행한 <왕좌의 게임>의 한 장면]
드라마에서 여러 번 언급되기도 하는데, 시즌6 에피소드1 18분 30초를 보자. 산사 스타크가 “meat and mead at my table”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산사가 배고파서 술 한 잔 주문하는 게 아니라 기사 브리엔의 충성 맹세를 받아주는 진지한 장면이다. 기사의 맹세를 받아줄 때 공식적으로 외우는 답변이 있는데 그 대사 안에 미드라는 말이 들어간 것이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미드가 술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글 자막에서는 술과 고기라고만 번역되어서 잘 모를 수밖에 없겠더라. 드라마에 대한 얘기는 여기까지.
이 외에도 미드와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허니문이라는 단어의 어원도 노르웨이의 전통이다. 결혼 후 한 달 동안 미드를 마시면 부부의 금실이 좋아진다고 믿었다고 하더라. 부부 금실에 좋은 술이 어디 미드뿐일까. 신혼인데 뭔 술인들…
하지만 미드는 벌꿀로 만들었다. 이 점이 내게는 아주 중요하다.
음주가 가능한 법적 성인이 된 이후 내가 참석한 술자리 횟수는 수백 번에 달하지 않을까. 그중 평범한 술자리는 가물가물한 기억이 된 지 오래다. 우리가 왜 만났는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어떻게 헤어졌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새로운 술을 마셨던 때는 선명하다. 02학번 선배가 가져온 양칫물 맛이 나던 아랍의 술, 스무 살 때 처음 마셨던 이과두주.
고스넬스 미드가 당신 입맛에 맞을지 안 맞을지 모른다. 에디터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렸으니까. 하지만 벌꿀주를 마시던 그 장면은 몇 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처음은 언제나 강렬하니까.
About Author
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