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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그 커피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것들이 있다. 뻔하긴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김춘수 <꽃>에 나오는 구절처럼 말이다. 내가...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것들이 있다. 뻔하긴 하지만 내가 가장…

2017. 05. 24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쉽게 지나쳐 버리는 것들이 있다. 뻔하긴 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김춘수 <꽃>에 나오는 구절처럼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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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에디터H와 내가 푹 빠져있는 커피가 있다. 볼품없는 이름과 패키지 때문에 쉽게 지나쳐버리는 그 이름. 베트남에서 온 인스턴트 커피 G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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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립 커피 내리는 여자로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지만, 사실 난 ‘인스턴트 커피파’다. 커피는 나에게 삶의 활력이요, 낙이다. 아직 잠들어있는 정신을 깨워야 할 아침, 도무지 써지지 않는 문장 때문에 키보드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순간, 나는 어김없이 커피의 힘을 빌린다. 천천히 시간을 갖고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도 좋지만, 약으로 마시는 커피는 빠르고 효과 좋은 놈이 최고다. 이럴 땐 바로 마실 수 있는 인스턴트커피만한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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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커피는 요즘 매일같이 나에게 활력을 수혈해주는 놈이다. 깊고 진한 맛의 뜨거운 커피를 목구멍으로 흘려보내면, 식도부터 위장까지 찌르르 꿈틀대며 정신이 깨어난다. 저기 발끝 모세 혈관까지 카페인을 공급해줄 검고 찌인한 커피. G7 블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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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의 서랍을 뒤져보세요.
아마 다들 G7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걸요?”

어쩌면 여러분도 이 커피를 보고 무릎을 칠지도 모른다. 아 나 이거 봤어. 그래 맞다. 보긴 했지만, 싸구려 커피처럼 생긴 패키지 때문에 별 기대 없이 흘려보내는 그 커피.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그 커피 G7. 자꾸 이 이름을 되뇌는 이유는 여러분 모두 이 커피를 기억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거 정말 꽤 괜찮은 커피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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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은 베트남에서 왔다. 베트남은 커피 강국이다. 베트남은 무려 1857년부터 커피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벌써 150년이 넘는 시간이다. 밥 먹고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씩 하는 문화가 자리 잡은지 이제 막 10년 정도인 우리나라와 달리, 베트남의 커피 역사는 장구하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픈 경험을 통해 커피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베트남은 오랜 커피 역사만큼 다양한 커피 문화가 발달하기도 했다. 오죽하면, 베트남 주요 수출 항목 중 하나가 커피일까. 베트남의 전통 커피는 유리컵 위에 양철 필터를 올려 진하게 내린 후 여기에 연유를 타서 마신다. 기본적으로 굉장히 강하게 로스팅한 원두를 진하게 내려 여기에 달달한 연유를 더해 맛을 중화시킨다. 달콤하고 진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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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7은 베트남에서 맛볼 수 있는 커피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아주아주 진한 맛이다. 찬물에도 쉽게 녹는 고운 입자의 가루는 얄팍한 패키지와는 달리 양이 많다. 너무 진하게 마시는 걸 싫어하는 엄마와 동생은 이 한 봉지를 반으로 나눠서 마시곤 하더라. 난 진한게 취향이라 한 봉지 다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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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물을 부으면, 저을 필요도 없이 가루가 녹으면서 고소한 향기가 주변을 가득 메운다. 이 향이 얼마나 자기주장이 강한지 한밤중에 몰래 이 커피를 타고 있으면, 방에 있던 동생이 득달같이 달려 나온다.

“언니 커피 타? 그럼 나도 한 잔 만.”

세상에서 제일 얄미운 게 라면 끓일 때, 한입만 먹겠다고 숟가락 얹는 사람이요, 그다음이 커피 탈 때 머그잔 들이대는 사람이다. 아아, G7은 도무지 몰래 마시기 힘든 존재감 넘치는 커피다. 강하게 로스팅한 커피의 기름진 향이 검고 진한 커피색만큼이나 강하게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에디터H는 이걸 참기름 향기라고 표현하더라. 정확한 표현이다. 커피콩의 기름진 맛을 한껏 끌어올린 깊고 진한 향. 이 향은 맛에도 그대로 녹아있다.

이혜민(@editor_hyemin)님의 공유 게시물님,

만약 당신이 하늘보리 맛이 나는 맹숭맹숭한 커피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G7 커피를 좋아하리라고 장담한다. 진득한 커피는 입안에서 끈덕지게 달라붙어 내 정신을 채찍질한다. 강한 맛은 얼음을 잔뜩 넣어 아이스 커피로 마셔도 기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다. 차가운 온도에도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남아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주장한다.

Processed with VSCO with ke1 preset[공유 강동원 다 필요없어. 난 너만 있으면 돼]

G7 커피의 가장 큰 매력은 뭐니뭐니해도 가격이다. 한 번이라도 마트나 편의점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사본 사람은 알거다. 우리가 자판기 커피라며 싸구려 취급했던 그 커피가, 공유가 앞치마를 곱게 두르고 타주던 그 커피가 사실 만만한 가격은 아니라는 것을. 여름 내내 먹으려고 100개들이 박스를 사려고 했다간 생각보다 큰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30개씩 사려면 더 비싸다). 그런데 G7은 참으로 관대하다. 100개들이 한 봉지가 7,000원 대. 나는 70원 짜리 커피를 마시고 있는 셈이다. 이토록 맛있는 커피가 심지어 싸기까지 하다니. 완벽해. 공유가 아무리 잘생겨도 난 베트남을 택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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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당신은 참으로 맛있는 커피였다. 우후죽순으로 생긴 그저 그런 카페의 커피를 마시느니, 나는 차라리 집에서 3초 만에 만들 수 있는 G7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택하겠다. 그럼 저는 이만, G7 마시러 갑니다. 마감하고 마시는 커피가 원래 가장 맛있는 법이거든요.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