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에서 평양냉면이라는 음식을 처음 먹었다. 카카오톡으로 그녀는 “혹시 평양냉면 좋아하세요?”라고 물었다. 내 대답이 기억나진 않지만 결국 먹은 걸 보면 아마도 “오! 한 번도 안 먹어봤는데, 좋습니다” 정도로 말하지 않았을까. 그게 9년 전쯤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 사람은 왜 굳이 소개팅에서 평양냉면을 먹으려고 했을까. 미치도록 먹고 싶었던 걸까, 그 정도로 맛있었던 걸까, 아니면 나에게 평냉의 세계를 알려주고 싶었던 걸까. 다행인 건, 어떤 이들은 몇 번씩 먹어도 평냉의 맛을 모르는 경우도 있는데, 나는 처음 먹고 바로 반했다. 원래도 차가운 음식을 좋아하고, 육향을 좋아하기에 평냉은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음식이긴 했다. 이게 평냉과의 첫 만남 썰이다.
벚꽃의 공식 개화일은 여의도 윤중로에 있는 관측목의 개화 여부에 따라 정해지고, 내게 공식 여름은 평양냉면을 먹는 날이다. 올해 여름은 작년보다 조금 더 빨리 시작됐다. 2022년 문을 닫았던 을지면옥이 2년 만에 리뉴얼 오픈했기 때문이다. 오픈일은 4월 22일이었고, 나는 하루 늦은 23일 방문했다. 종로3가역을 나가는 계단에서 볕이 강하게 쏟아졌다. 아, 평냉 먹기에 좋은 날씨다. 역을 빠져나가는 모두가 마치 을지면옥으로 가는 것 같아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영업 시작 시간은 오전 11시 30분. 나는 11시 40분에 도착했다. 앞에는 70명이 대기 중이었다. 아직은 봄 날씨라 그렇게 덥지 않아서 웨이팅이 힘들지 않았다. 게다가 5층짜리 을지면옥 건물이 그늘을 만들어주니 기다릴만했다.
대부분은 2명 혹은 3명 이상으로 구성된 파티원이었고, 인근 직장의 샐러리맨처럼 보였다. 목에 건 사원증, 와이셔츠와 넥타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을 들으니 확실히 그랬다. 인상적이었던 건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지루해하거나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없었고, 마치 T익스프레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설레는 표정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마 나와 비슷한 사람인 것 같아서 유대감마저 느껴졌다. 음식 하나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 마뗑킴 바람막이를 입든 넥타이를 매든 성별이 어떻든 나이가 어떻든 냉면 하나를 먹기 위해 아침부터 줄을 선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랬다.
그리고 을지면옥은 캐치테이블 앱으로 예약할 수 없다. 그게 맞다고 본다. 젊은 손님만큼이나 어르신이 많은 가게에 캐치테이블을 쓰면 절반의 손님이 불편을 감수해야 할 테니까.
사실 을지면옥이 아니어도 을지면옥 스타일의 냉면을 즐길 수 있는 곳은 서울에 있다. 평양냉면은 크게 육향이 진한 우래옥 계열, 슴슴한 맛이 강한 장충동 계열, 파를 송송 썰고 고춧가루를 뿌리는 의정부 계열이 있고, 을지면옥은 의정부 계열에 속한다. 필동면옥, 을지면옥은 의정부 평양면옥의 두 딸이 가업을 물려받아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이기 때문에 꼭 을지면옥이 아니어도 갈증을 해소할 방법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기다린 이유는 세상엔 완전히 똑같은 평냉은 없는 법이니까.
12시 15분에 입장했다. 70명이 빠지는 데 3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5층 건물이라 수용할 수 있는 인원이 많기 때문에 회전율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매장은 시끌벅적하다. 서버는 친절하고, 부지런히 움직인다. 오픈한 지 하루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빛이 나는 것처럼 깔끔하다. 나는 일층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무려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위층으로 이동하는 건 어렵지 않다.
냉면이 나오는 속도 역시 상당히 빠르다. 주문을 하고 1분 만에 냉면이 나왔다. 거의 맥도날드급 속도다. 차가운 스뎅(스테인리스가 맞지만 스뎅이라고 해줘야 맛이 산다) 그릇을 양손으로 감싸쥐니 그리웠던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반가움이 느껴졌다. ‘아, 이 차가움’ 평냉을 먹을 때는 어쩐지 마음이 경건해진다. 기도는 하지 않았지만, 기도하는 마음으로 국물 한 모금 떠 마시고 면을 먹기 시작했다.
보통 평양냉면을 슴슴하다고 표현하는데, 나는 좀 다른 의견이다. 고기집에서 파는 냉면보다는 슴슴하겠지만 을지면옥으로 대표되는 의정부계열 냉면은 염도가 높은 편이다. 또, 을지면옥뿐만 아니라 평양냉면은 원래 염도가 높은 편이기도 하다. 전 세계적으로 봐도 고깃국물을 차게 먹는 방식 자체가 드물고, 음식이 차기 때문에 염도 자체는 높지만 음식이 차가워서 그렇게 못 느끼는 거라고 보면 된다. 나는 슴슴이라는 표현보다는 밸런스가 좋다고 말하고 싶다. 맵거나 짜거나 단맛 어느 하나가 지배적으로 두드러지지 않아서 균형감이 좋은 음식이 평양냉면이라고 생각한다.
맛 평가가 필요할까?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살짝 몇 자 적어 보자면, 메밀 향은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 편이다. 고춧가루, 파가 있는 국물과 함께 먹기 때문에 메밀 향이 처음에는 좀 가려진다. 그래도 씹을수록 입안에서 퍼지는 메밀 향은 당연히 있다. 처음 입에 넣었을 때와 조금씩 씹으면서 향이 변화하는 게 매력적이다. 그리고 메밀면이 지나간 자리에서 살짝 퍼지는 서늘한 금속의 맛이 있다. 메밀에서 무슨 금속맛? 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번주에 평냉을 먹으면서 다시 한번 음미해 보면 좋겠다. 사실 나도 몰랐는데, 정재훈 푸드라이터의 표현을 듣고 맛보니 비로소 느껴졌다.
에디터님은 어떤 평양냉면을 가장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다. 특별히 많이 먹어본 건 아니어서 무엇이 가장 좋은지 평가를 내리기도 힘들고, 먹어본 것 중에 하나를 고르기도 힘들다. 어떤 날에는 스타벅스 아메리카노가, 어떤 날에는 신맛이 강한 커피가 당기는 것처럼 그날의 기분 따라 좋아하는 냉면도 달라지니까. 그래서 어떤 냉면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괜히 <하트시그널>의 그 장면처럼 반문해주고 싶다. “평소에? 아니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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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