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나 좋아서 쓰는 향수, 프레시 슈가 레몬

향은 취향의 영역이다. 정답이 없다. 누군가의 인생 향수는 누군가의 불호 향수일 수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향’이란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향은 취향의 영역이다. 정답이 없다. 누군가의 인생 향수는 누군가의 불호 향수일 수…

2020. 04. 09

향은 취향의 영역이다. 정답이 없다. 누군가의 인생 향수는 누군가의 불호 향수일 수 있다. ‘모두가 좋아하는 향’이란 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향도 저 향도 그 향도 모두 좋아하는 사람은 어쩌면 좋아하는 향이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진지한 소리부터 늘어놓느냐고? 오늘 얘기할 향수에 대해 밑밥(?) 좀 깔아놓는 거다. 아 참, 나는 글 쓰고 향 만드는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진지한 척하느라고 자기소개도 빼 먹었네.

1400_photo-1515377905703-c4788e51af15 (1)

그렇다고 엄청나게 레어한 향수를 소개할 거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으른미 뿜뿜 하는 진한 가죽 향이라던가, 코 끝이 찡-한 느낌의 메탈릭한 향을 소개할 거라면 멋있는 척부터 하는 게 더 쉬우니까. 하지만 부끄럽게도(?) 상큼한 레몬과 달달한 설탕을 합친, 프레쉬(fresh)의 향수 슈가 레몬 얘기를 할 거다… 김빠지나?

1400_24-4

프레쉬? 그 마스크 팩으로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 프레쉬? 거기서 향수도 나와? 그런 의문이 드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프레쉬는 의외의 향수 맛집(!)이다. 다양하지는 않지만 프레쉬 아이덴티티를 꼭 빼닮은, 신선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 위주로 향수 라인업이 꾸려져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자몽 향의 헤스페리데스. 내 마음에 든 슈가 레몬은 그중에서도 좀… 레어템이(라고 생각한)다.

1400_24

조향에서 레몬을 쓰는 것은 의외로 까다로운 일이다. 너무 친숙하기 때문이다. 친숙한 게 무슨 문제냐고 생각하겠지? 레몬 향은 우리의 일상 생활용품에서 많이 쓰인다. 당장 우리 집 주방 세제만 해도 레몬 향이다. 청소용품, 핸드 워시, 탈취제, 심지어 변기 세정제, 모기약까지 레몬 향이 두루 쓰인다. 적응의 동물이자 학습의 동물인 인간은, 그리하여 레몬 향을 맡을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고급’이 아닌 ‘저렴’을 떠올린다. 친숙함의 방향성이 문제인 것이다.

1400_24-12

그래서 대부분의 향수에서는 같은 시트러스라도 베르가모트(베르가모트가 뭔지 모른다면 지난 콘텐츠를 참고할 것)이나 자몽, 라임 혹은 만다린 같은 향들을 활용한다. 하지만 슈가 레몬은 무려 레몬을 앞세웠고, 그 점이 참 마음에 들었다. 인간의 무의식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슈가 레몬은 이름답게 레몬 향으로 시작한다. 레몬 향을 보완하기 위해 유자와 만다린도 쓰였다고 한다. 유자는 레몬 향에 쌉쌀함을, 만다린은 무게감을 더했을 것으로 보인다. 시트러스의 물결이 한차례 지나가면, 뒤이은 향에서는 ‘슈가’의 면모가 나타난다. 리치 플라워와 오렌지 블로썸의 희고 달달한 꽃냄새가 풍기는 것이다.

1400_24-7

슈가 레몬의 재미있는 포인트는 소다 느낌이 나는 부드러운 향이 더해져 있다는 점이다. 그 향 때문에 단순한 레몬 향이 ‘레모네이드’ 혹은 ‘레몬 솜사탕’처럼 풍성하고 다채롭게 바뀐다. 이렇듯 같은 향이라도 키가 되는 향(노트), 즉 키 노트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결과물이 달라진다. 나는야 끈기의 조향사! 그 향이 너무너무 인상적이어서 온갖 향료를 다 뒤져서 무엇인지 찾아냈다. 그리고 그 향료는 나의 두 번째 향수 Knitty hug에서 ‘키 노트’로 쓰이기도 했다. (막간의 홍보 타임!)

1400_24-9

나에게는 이렇게 매력적인 슈가 레몬이지만, 이 향을 싫어하는 사람도 꽤 많다. 에X킬라 냄새가 난다고 한다거나, 화장실 방향제 아니냐고 한다거나… 흑흑. 그때마다 주춤하긴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아무리 그런 말을 들어도 난 이 향이 좋은걸.

1400_24-11

요즘 SNS에 들어가면 향수를 뿌려서 헌팅을 당한다던가 이성을 유혹한다는 식의 광고가 많이 보인다. 향수 하나로 스킨쉽이 증가하고 연인 관계가 돈독해진다는 광고도 봤다. 하지만 나처럼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는 향수를 뿌리는 사람도 있다. (물론 좋아해 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저 그 향이 좋아서 말이다.

사람들이 멋있다고 얘기해줄 만한 옷만 입으려고 한다면,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을 수 없다. “넌 왜 맨날 까만색만 입냐” 핀잔하는 사람이 있어도 블랙을 고수한다면 그건 내 스타일이다. 그렇게 입었을 때 가장 기분 좋고 나답다는 느낌이 들 것이다. 향도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좋다고 얘기해줄 만한 향만 찾을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향이 뭔지 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좋아하지 않는 향이라도 상관없다. 내가 좋으니까. 내가 좋은 게 좋은 거다. 당신도 그런 향을 하나쯤은 갖길 바란다.

1400_ahronjeon_insta

About Author
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