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오렌지, 레몬, 자몽, 만다린, 라임, 베르가모트… 이 과일들은 ‘시트러스’라고 불린다. 향수는 분사 직후부터 시간에 따라 크게 탑노트-미들노트-베이스노트(혹은 라스트노트)로 나뉘어지는데, 시트러스는 향수에서 탑노트를 담당하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향수에 시트러스가 포함되어 있는데, 탑노트에서 발향을 끌어올려주고, 확산성을 담당하고, 상큼하고 기분 좋은 첫 느낌을 준다.
시트러스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신 것을 못 먹는 사람도 묘하게 향은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중요하고 매력 있는 향조이지만, 당연히 한계점도 있다. 탑노트에서 가장 먼저 나서서(?) 향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대신, 지속 시간이 짧다.
시트러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생각할 거다. 시트러스로만 이뤄진 향수는 없나? 탑노트 위주로 발향되고 지속력이 짧다는 위험 요소가 있지만, 시트러스를 중심으로 향수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일에 도전(?)한 것이 바로 아틀리에 코롱이라는 브랜드다.
아틀리에 코롱의 모든 향수는 시트러스에서 출발한다. 향 또한 시트러스와 허브 노트를 메인으로 한다. 첫 에디션 발매가 2010년,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이니 아틀리에 코롱은 나름 신생 브랜드라고 할 수 있겠다. 향수 업계에서는 몇십 년 또는 몇백 년 역사를 내세우는 곳이 꽤 많지만, 사실 역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100년 전 사람들이 좋아한 향을 우리가 지금 여기서 똑같이 좋아하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대신 아틀리에 코롱은 10년 동안 여러 조향사들과 협업하며 42가지 향수를 만들어내며 다양한 라인업을 갖췄다.
사실 시트러스 향의 두 번째 한계점은 계절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트러스 향은 ‘봄, 여름용’이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향수들을 설명하거나 소개할 때 자연스럽게 가볍고 상큼한 향은 봄, 여름에 쓰기 좋다고 말하게 된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 시트러스의 새콤쌉쌀한 향과 찬 바람이 만났을 때의 그 기분이 얼마나 좋은데!
특히 아틀리에 코롱의 베르가모트 솔레이는 사계절 내내 언제 사용해도 좋을 시트러스 향이다. 베르가모트는 시트러스의 일종인데, 굳이 따지자면 생김새는 한라봉에서 울퉁불퉁함을 더한 것처럼 생겼고 색깔은 라임처럼 연두에 가까운 초록색이다. 사실 베르가모트의 실물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먹어본 적도 없다. (식용으로는 거의 쓰지 않는 것 같다) 다만 우리가 마시는 얼그레이 티가 홍차에 베르가모트 향을 입힌 것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많이 마시긴 한 것 같다.
향수에 있어서 베르가모트는 특히 사랑받는 향료다. 오렌지는 너무 달콤하고, 레몬은 생활 용품(세제, 손세정제 등)에 많이 쓰여서 친숙하지만 고급스러운 느낌은 아니고, 자몽은 독특한 게 매력이 될 때도 단점이 될 때도 있고, 만다린은 좀 남성적이고, 라임은 직관적이고…. 하지만 베르가모트는 무슨 향과 매칭시켜도 웬만하면 잘 어울린다. 약간의 달콤함과 쌉쌀함, 그리고 허브의 그린한 느낌도 살짝 느껴지면서 고급스러움을 뽐낸다. 게다가 탑노트와 미들노트를 부드럽게 이어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에, 내세우지 않더라도 많은 향수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베르가모트를 중심으로 한 향수라니! 이름답게 첫 향은, 신선한 베르가모트 향이 가득하다. 오렌지나 자몽의 껍질을 닮은 쌉쌀한 향에 블랙 페퍼를 더해서 그런지 독특한 느낌이 든다. 살짝 달콤한 뉘앙스도 느껴지는데, 뭔가 낯선 달콤함이다. 찾아보니 카다멈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약간 한방 냄새라고 느낄 법한 카다멈이 베르가모트의 달콤함을 묘하게 이끌어낸다.
정리하자면 시트러스의 상큼함, 블랙페퍼와 만나 독특한 느낌을 내는 쌉쌀함, 카다멈이 이끌어내는 묘하고 이국적인 달콤함이 이 향수의 첫 느낌이다. 남성적인 것 같으면서도 달콤하고, 시크한 것 같으면서도 청량하다. 마치 뜨거운 여름볕 아래 푸른 바다를 보며 바닷바람을 한껏 맞는 것처럼 이질적이고도 기분 좋은 느낌. 아, 이래서 ‘베르가모트 솔레이’구나. 솔레이(soleil)는 프랑스어로 태양, 햇빛, 햇볕이라는 뜻이다.
베르가모트 느낌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변화되는 지점에는 라벤더가 있다. 라벤더의 힘차고 강한 초록(!)의 느낌과 쌉쌀한 풀향이 베르가모트와 무척 잘 어울린다. 덕분에 라벤더의 향까지도 시트러스처럼 느껴지는 착각을 일으킨다. 사실 베르가모트와 라벤더의 어코드(향이 잘 어우러지는 조합)는 많은 향수에서 쓰이는데, 특히 시원한 느낌을 내는 남자 향수에서 자주 보인다. 그런데 베르가모트 솔레이는 여기에 자스민을 더해서 향에 무게감과 달콤함, 부드러움을 더해줬다. 덕분에 시간이 지나면서 남성스럽다기보다는 중성적인 느낌으로 향이 자리 잡는다.
가벼운 향이니 만큼 탑노트와 미들노트가 다소 빠르게 지나간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다행히 베르가모트 솔레이의 베이스는 앞의 향의 장점을 잘 유지하며 잔잔해지는 방향으로 변한다. 향수의 향조 설명 중에 베이스 노트에 Oakmoss 혹은 moss라는 표현이 종종 보일 텐데, 이건 이끼 냄새라고 보면 된다. 저수지에 낀 물냄새 가득한 이끼는 아니고, 나무에 핀 이끼에 가깝다. 나무 냄새보다는 약간 물기가 있고, 풀냄새보다는 부드럽고 무겁다. 이끼 향이 베르가모트의 쌉쌀한 느낌과 라벤더의 풀 냄새를 이어받으며 향을 잔잔하게 이끌어간다.
굳이 향을 조각조각 나눠가며 설명했지만 전체적으로 하나라고 느껴질 만큼 조화롭게 잘 만들어진 향이다. 사람들에게 멋짐을 뽐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향수로 자기 자신의 리프레시를 꾀하고 싶을 때, 그럴 때 시트러스 향은 도움이 된다. 칙칙한 날씨가 계속되는 요즘, 베르가모트 향의 상쾌한 햇볕을 마음껏 쬐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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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아론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에세이스트, 프리랜서 에디터, 향수 브랜드 ahro의 조향사까지. 예술적 노가다(?)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