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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 추석에 뭐 먹었어?

에디터들이 추석에 먹은 음식 9
에디터들이 추석에 먹은 음식 9

2025. 10. 16

10년 전에 나는 페이스북에 이런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다. “10년 뒤 추석 연휴, 휴가 하루만 쓰면 10일 동안 쉴 수 있음.” 좋아요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날이 오길 기다렸건만, 사는 게 바빠서 그날이 올해인지도 몰랐다. ‘2025년이면 37살인가? 으아, 말도 안돼.’ 10년 전의 나는 분명 이런 생각도 했을 텐데, 이제는 오히려 젊었을 때가 더 아득하다. 계단 내려갈 때 무릎도 안 아프고, 새벽까지 놀아도 하나도 안 졸린 때가 내게도 있었을 텐데. 아무튼, 다른 에디터들은 지상 최대의 황금연휴를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했다. “추석 연휴에 뭐 먹었어요?


지난 추석엔 일본 북해도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엄마, 아빠, 남동생까지 이고 지고 말도 통하지 않는 옆 나라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상당한 고행길이다. 아빠는 새벽 4시면 기상해서 배를 곯으며 날 기다렸고, 아침잠이 많은 동생은 매일 아침 연행되듯 호텔 조식당에 끌려 내려왔다. 일 년 내내 마주 앉아 밥 먹을 일이 드문 우리 네 식구가 아침, 점심, 저녁을 같이 챙겨 먹다니. 끼니마다 맛있는지 먹을 만한지를 빚 독촉하듯 물어댔다. 워낙에 리액션에 인색한 가풍이라 “엄청 맛있는데?” 소리 한 번 듣기가 요원하다. 그 와중에 짜다, 달다, 비싸다… 가족 여행에서 나오지 말아야 할 3대 금기어는 모두 나와버렸다. 그러다 오타루 시내의 바닷가 근처에 있는 간이식당에 들어갔는데, 허름한 가건물에 위치한 실내 포장마차 같은 곳이었다. 성게알 덮밥이나 장어덮밥이 맛있다고 하던데 아빠는 굳이 오징어찜을 먹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배가 든든한 메뉴를 먹어야지!”하고 잔소리를 하면서 결국엔 오징어찜을 주문했다. 그런데 웬걸?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오징어가 있다니. 한 입 씹으니 야들야들하게 짓이겨지며 고소한 맛을 낸다. 간도 적당하고 식감도 좋고 향도 좋았다. 정신없이 먹어 치우고 오징어를 시키길 잘했다고 히죽히죽 웃었다. 차를 타고 삿포로 시내로 돌아오면서도 오징어 얘기는 끊이질 않았다. 값도 싸고, 맛있고, 아빠가 메뉴를 잘 골랐고, 우리가 아무도 모르는 숨은 맛집을 발굴한 게 틀림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가족 여행은 고행이었다. 그래도 어떤 순간에는 즐겁고, 맛있고, 애틋했다.


입맛에도 역마살이 있는지 하루에도 여러 가지 음식을 먹는 편이다. 점심에 한식을 먹었다면 저녁에는 한식을 피하려고 한다. 삶은 짧고 먹을 음식은 많으니까. 그런 점에서 가족과 모여서 삼시세끼 한식만 먹게 되는 명절이 오면 금세 한식에 물리곤 한다. 올해 추석도 오랜만에 한식을 며칠 내내 먹었다. 올해는 외식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프릳츠에 갔다. 추석 다음 날부터 위장이 속삭였기 때문이다. “쿨타임 찼어. 실장님 스페셜을 먹으러 가. 당장.” 프릳츠의 실장님 스페셜은 바삭한 페이스트리, 복숭아의 새콤한 맛을 돋우어주는 단맛의 커스터드 크림, 두툼한 황도의 식감까지 내가 좋아하는 식감과 맛을 모두 모아둔 선물 같은 빵이다. 거기에 진한 롱블랙을 곁들이자 맛도 삶도 균형을 찾은 듯했다. 시나몬롤을 먹으러 밴쿠버에 가듯이, 실장님 스페셜을 먹으러 서울에 사는 것 같다. 가끔 명절이면 친구들이랑 농담을 한다. “나 죽으면 차례상에 빵과 커피를 올려놔 줘라. 마카롱도 좋고.” 그런데 이거 농담 아냐.


올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난해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음이 아팠던 할아버지는 홀로 지내기 대신 할머니 곁에서 함께하길 택하셨다. 그래서 부모님은 처음으로 텅 빈 시골집에서 추석을 보내셨다. 나도 텅 빈 집에서 추석을 보냈다. 업무가 생겨 함께 내려가지 못했고, 몸까지 아파 황금 같은 연휴 대신 구리 같은 시간을 보냈다. 아쉬운 마음에 컨디션이 좋아지자마자 힐링 장소인 에스프레소바로 향했다. 그래서 올 추석에는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추석에도 문을 열어주신 상냥한 사장님 덕분. 출근 시간에 열고 퇴근 시간에 닫아 문턱도 밟기 힘들었던 곳에 간만에 온 것만으로도 기뻤는데, 여전히 맛도 좋았다. 피노와 피콜로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다. 컵을 쌓는 것이 정석인 만큼 3잔을 마셨다. 거기에 사장님이 챙겨주신 따뜻한 크루아상과 베리잼까지 함께하니 이 정도면 정을 나누는 명절의 맛을 본 것 같다. (홀로 보낸 추석도 따뜻하게 만들어준 에스프레소바는 보라매에 위치한 파세로 @passero_espresso)


하루 연차를 내면 무려 10일을 쉴 수 있다고? 이건 못 참지.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던 금요일 밤, 하루 종일 뒹굴거리다 연휴의 끝자락을 붙잡아보려는 심정으로 동네 친구들을 긴급 소집했다. 접선 장소는 동네 단골 주점. 후드티만 입고 다니던 대학생에서 이젠 어엿한 직장인이 된 친구가 퇴근 후 빳빳한 재킷을 입고 등장했다. 한번 신나게 놀려준 뒤, 항상 먹던 모츠나베를 주문했다. 진한 육수에 채소와 고기, 소 대창을 넣고 바글바글 끓여 먹는 모츠나베는 돈은 없고 술은 많이 마시는 대학생들에게 꽤 가성비 좋은 안주였다. 왜냐하면 육수 추가가 가능하기 때문! 건더기를 거의 다 먹어갈 때쯤 육수를 추가하면 소주 두 병은 더 마시고도 남을 훌륭한 안주가 된다. 소주 한 잔, 국물 한 입, 다시 소주 한 잔, 국물 한 입. 그러다 누군가가 ‘100억 부자 vs 무일푼 차은우’ 따위의 유치한 밸런스 게임 주제라도 던지면 그날은 다 같이 집에 못 들어가는 거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마음껏 안주를 주문할 수 있는 으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육수를 추가했고 여전히 차은우를 선택했다.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자 친구들아…


우리 집 명절 음식 중 독특한 게 있다면 바로 코를 찌르는 삭힌 홍어. 제대로 삭힌 홍어에 묵은지와 두툼한 삼겹 수육을 함께 먹는 홍어삼합이야말로 별미 중의 별미다. 냄새는 지독해도 그 감칠맛은 다른 요리와 비교할 수가 없다. 이 맛을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 안타까울 따름… 어릴 때는 매번 명절마다 상에 홍어가 올라오는 탓에 모두들 즐겨 먹는 명절 음식인 줄 알았다. 지역 특혜는 아니고 부모님의 고향은 두 분 다 충청도. 그저 전국 곳곳에 일터가 있던 아빠의 직업 특성 탓에 다양한 특산물을 먹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남아있는 어릴 적 기억은 가족들이 모두 모인 명절 할머니 댁, 어른들 앞에서 아빠가 나에게 홍어를 처음 먹여주던 모습이다. 홍어를 입에 쏘옥 넣어주며 “먹고 코로 흥-해”하고 아빠가 재밌어했던 기억. 그때의 첫맛은 기억 안 나도 지금 이렇게 잘 먹고 있는 것 보면 훗날 이렇게 술상을 같이하려던 아빠의 계획은 성공적이었던 듯하다. 올해는 와인만 편애하는 엄마를 위해 복분자 와인과 함께 페어링을 즐겼다. 홍어가 호불호가 심한 음식인 줄은 꽤나 나중에야 안 사실. 엄마도 아빠와 결혼해서 함께 살기 전까지는 입에 못 대는 음식이 많았다 했다. 아빠의 조기교육 덕에 아빠와 입맛이 동기화되었고, 홍어삼합을 좋아하는 진정한 아재 입맛의 여성으로 자라났다. 대체로 가리는 음식이 없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성향도 어쩌면 이런 배경 때문일지도!


<흑백요리사>만큼 전국적인 관심을 끌지 않지만 나 같은 먹보들이 좋아하는 연례행사가 있다. 바로 미쉐린 가이드 선공개. 미쉐린 가이드는 내년에 발표할 미쉐린 가이드를 그해에 몇군데만 미리 공개하는데, 홈페이지에 들어가지 않으면 알기도 어렵고 화제성도 없기 때문에 먹보가 아니면 잘 모른다. 이번에 공개된 곳은 서울과 부산을 포함하여 총 14군데. 그중에 소카키리 스즈라는 소바 식당에 갔다. 인적이 없는 청구역에서 내려 골목으로 꺾으면 여기에 무슨 식당이 있어?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두둥! 식당이 등장한다. 소바가 메인이다. 오리고기, 텐푸라, 소 힘줄을 사용한 다양한 소바가 있고, 나는 8시간 이상 찌고 조린 청어가 올라가는 니신 토로로 소바를 주문했다. 가격은 2만 원. 소바는 일본에서 먹었던 것처럼 툭툭 끊어지면서도 메밀 향이 나서 여행의 기분을 소환하는 맛이었고, 무엇보다 청어조림이 정말 좋았다. 청어의 결이 반건조처럼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었고, 그만큼의 감칠맛도 품고 있었다. 사실 다음 주에 도쿄 여행을 간다. 친구는 그때까지 일식은 안 먹어야겠네, 라고 말했지만 참을 수 없었고, 후회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양은 좀 적은 편이고, 텐푸라, 계란말이, 카모로스 등 각종 일품 요리와 하이볼도 있으니 저녁 시간에 가도 좋을 것 같다.


연휴 내내 우중충했지만 딱 하루 볕이 좋았다. 나들이 운전은 이번에도 한석 님의 몫이었다. 내 면허가 장롱에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눈치없이 한참 먼 ‘강화도’를 외쳤지만 결국 좀 더 가까운 드림파크에 가기로 했다. ‘장인어른 차에 얹혀 다니는 게 벌써 몇 년째고…’ 다녀오는 내내 마음이 우중충했다. 나들이 마무리는 집 근처 돼지갈빗집. 집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조금 늦게 오신 한석 님은 소주를 주문했다. 아내는 또 눈치 없이 굴었다. ‘아빠, 술 드시려고 차 대놓고 오신 거죠?’ 나는 집게와 가위를 들고 그 어느 때보다 집중했다. 차도 못 태워 드리는데 고기까지 태울 순 없지. 양념갈비를 뒤집고 또 뒤집었다. 잘 익은 고기와 안도감을 함께 삼키며 다짐했다. 설에는 꼭 운전석에 앉아 강화도에 가리라.


일 년 전 미리 끊어둔 티켓. 영영 오지 않을 것 같던 튀르키예 여행이 드디어 시작됐다. 연휴가 끝나고 3kg이 늘 만큼 먹고 또 먹었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잊히지 않는 식사가 있었다. 튀르키예 유일의 미쉐린 2스타 레스토랑, TURK FATİH TUTAK이다. 튀르키예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곳은 첫인상부터 남달랐다. 메뉴판도, 코스 설명도 없이 오로지 셰프가 짜놓은 흐름에 따라 식사가 시작된다. 이상하게도 그게 편했다. 다음 메뉴를 궁금해하지 않고 오직 눈앞의 한 접시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식사는 총 세 막으로 이루어졌다. 도착하면 먼저 네 가지의 에피타이저가 시작을 알리고, 이어서 식당으로 이동해 아홉 가지 본 코스가 시작된다. 마지막엔 주방 투어와 함께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디저트로 마무리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짜인 하나의 연극 같았다. 그 무대 위에서 나는 관객이자, 동시에 주인공이었다. 수많은 요리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홍합밥 미디예돌마. 향신료로 양념한 밥을 홍합살과 함께 껍질에 넣고 쪄내는, 길거리에서 몇백 원으로 쉽게 먹을 수 있는 튀르키예 국민 간식이다. 이곳에서는 그 홍합밥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했다. 홍합 껍데기를 바삭한 과자로 만들어 한입 크기로 내놓았고, 껍질의 짭짤한 풍미와 홍합의 감칠맛이 어우러졌다. 그 맛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멀리 왔는데도, 어쩐지 고향의 맛 같았다. 미쉐린 2스타는 ‘길을 돌아서라도 가볼 만한 곳’, 3스타는 ‘그곳을 위해 여행을 떠날 만한 곳’이라고 한다. 별의 개수로는 다 표현할 수 없지만, 나에게 이 식사는 다시 튀르키예로 돌아가고 싶게 만든 이유가 됐다. 언젠가 이곳이 3스타를 받게 된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할 거다.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집은 최근 두 가지 희소식이 생겼다. 내게 말끔한 중고차가 한 대 생겼다는 것. 그리고 작년에 조혈모 세포이식 수술을 받은 어머니의 건강이 많이 나아졌다는 것. 추석 연휴가 시작된 금요일 개천절, 대학병원 정기검진을 빼면 외출이 드문 모친께서 말씀하셨다. “우리 가족 다 같이 바람 쐬러 가면 좋겠어.” 주말에 기름도 넉넉히 채웠고 세차도 말끔하게 끝냈다. 상쾌한 기분으로 출발한 김씨네 드라이브는 인천국제공항 옆 왕산해수욕장에서 위기를 맞이했다. 엄마 딸이 남자친구랑 가봤다는 ‘바닷가 분좋카’는 이미 연휴를 즐기려는 가족 단위 손님으로 이미 만석. 하필 해변에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한다. 우리 가족 텐션 완전 ‘파묘’, 파국을 막기 위한 대안이 필요하다.

“한정식집으로 가자.” 엄마 딸이 제안한 승부수였다. 검색해보니 파라다이스 호텔 옆 오피스텔에 상다리가 휘도록 반찬을 많이 깔아주는 한정식집 ‘마마님’이 있었다. 뜨끈한 솥 밥, 식감이 부드러운 고기구이, 손이 많이가는 밑반찬, 유약이 예쁘게 발린 도자기 그릇. 어른들이 좋아할 요소가 한가득이었다. 네 식구 모두에게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구색을 잘 맞춘 ‘한정식집’을 섭외하는 능력은 아무래도 명절마다 도움이 될 것 같다. 올해는 엄마 딸에게 한 수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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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