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흔히 말하는 ‘빠순이’ 시절 한번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됐다. TV 속 오빠보다는 옆집 오빠가 좋았다. 꽃처럼 어여쁜 아이돌보다 땀냄새나는 남학생이 더 궁금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쪼끄만 계집애가 오만하게도, 보답받지 못할 마음은 시시하다고 여겼으니까.
못 가진 게 많은 인생이지만, 누군가의 삶을 닮고 싶다는 생각은 거의 해본 적 없다. 그런 내가 오래도록 격렬하게 사랑하고 동경해온 캐릭터가 있다. 1979년생 이효리. 설명이 필요없는 그 여자.
2003년으로 타임워프해보자. 이효리의 첫 솔로 앨범은 엄청났다. 텐미닛. 제목만 들어도 전주가 머리 속에 들리는 것 같다. 따, 딴. 10분 동안 한 남자의 멘탈을 꿀꺽 잡숫겠다는 도발적인 가사. 카고바지 위로 드러난 탄탄한 복근. 스물 넷의 이효리에게 홀리는데는 10분이나 필요하지 않았다. 아름답고, 근사하고, 빛나 보였다. 나는 언니처럼 되고 싶었다.
그녀는 몸매를 드러내지 않아도 예뻤다. 불공평할 만큼 태생이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다. 설령 사랑하지 않더라도. 미워하더라도. 한 번 더 돌아보게 만드는 사람. 자신만만하게 웃어재낄 때의 주름잡히는 눈모양이나, 엉망으로 흐트러져도 스타일링한 것 같은 헤어스타일. 이질적일 만큼 솔직한 화법. 조금만 틈을 주면 튀어나오는 걸쭉한 섹드립. 몸짓 하나 하나가 시선을 사로 잡았다. 다듬지 않아도 예쁘고, 작정하고 다듬으면 더 예뻤다. 정말이지 ‘섹시 디바’같은 촌스러운 수식어로 가두기엔 너무나 특별한 캐릭터였다.
물론 텐미닛 이효리의 등장은 2017년에도 분기마다 등장하는 ‘섹시 퀸’들의 등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은 신문 연예면의 단골 메뉴였다. 이효리의 가슴이, 이효리의 코가, 이효리의 남자가. 관음의 시대에 이만큼 소재가 무궁무진한 뮤즈는 없었다. 한 캐릭터가 가진 이미지가 소진돼 버리면, 대중의 관심은 순식간에 바닥 난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효리는 살아 남았다.
시작은 ‘오프 더 레코드’였다. 이효리의 온 집안에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일거수일투족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동경하는 스타의 사생활을 이토록 치밀하게 엿볼 수 있다니. 어지러울 만큼 사치스러운 경험이 아닌가. 나는 그 방송을 모두 챙겨봤다. 재밌었냐고? 글쎄. 그녀의 삶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다. 텐미닛의 이효리처럼 화려하지 않았고, 더러는 우울했으며,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알고있다. 방송이라는 게 보여주려고 의도한 이미지에 초점을 맞출 수 밖에 없다는 걸. 애초에 방송으로 삶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을리도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소비하는’ 이효리에게 변화가 생긴 건 분명했다.
이효리를 뮤지션으로서 바라본 적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녀가 부른 노래를 차례대로 훑다보면 삶의 모습과 가치관이 바뀌어가는 게 고스란히 보인다. 이효리가 부른 노래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다르지 않아>라는 캠페인 송. ’골든 12’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멤버들과 함께 부른 노래인데, 음원 수익금을 동물보호시민연대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효리의 변화는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대중에게도 내비칠 만큼 투명했다. 함께 다니던 친구 무리가 달라지고, 가는 곳이 달라지고, 스타일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졌다. 화려한 삶을 동경하던 고등학생이 어른이 되는 동안 언니는 거짓말 처럼 다른 사람이 됐다.
나는 멋진 걸 배웠다. 삶은 이전까지의 나와 결별한듯 바뀔 수도 있고 그렇게 달라져버려도 우스운 게 아니라는 걸. 오늘은 없으면 죽고 못산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내일은 아무 의미도 없을 수 있다는 걸.
언젠가 ‘이효리’를 리뷰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야 쓰게 됐다. 솔직히 말하자면 ‘효리네 민박’ 때문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이 눅진하게 늘어진 새벽. 잠이 안오면 말똥한 눈을 비벼뜨고 넷플릭스에서 이효리의 집을 훔쳐본다. 이상할 만큼 마당이 넓은 집에서 다정한 남편과 살 비비며 사는 일상. 조용히 잠들 수 있는 삶을 꿈꿔서 제주도의 소길댁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잊혀지는 게 두렵다는 솔직함. 이렇게 마음껏 사랑만 하며 살 수 있는 건 돈이 많기 때문이라며, 화면 밖의 삶을 감싸는 말. 아, 어느새 우리가 이런 귀한 캐릭터를 갖게 됐구나.
이효리는 ‘아이콘’이다. 단순히 음악이나 스타일을 좇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 자체를 동경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콘텐츠가 된다. 온통 동떨어진 이야기 뿐인 세상에서, 효리네 민박 속 이야기는 손에 닿을 듯 가까운 로망이 된다. 대단한 사람도 필요 없고, 장엄한 서사시도 거추장스럽다. 출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손잡이 하나에 의지해 휘청이면서도 간직할 정도의 꿈. 우리는 이효리가 아니고, 끝내 이효리가 될 수 없을 지라도 꿈꾸게 하는 힘. 우리에겐 현실을 등지지 않은 판타지가 필요했다.
요즘 입버릇처럼 “제주서 살고 싶다”는 말을 한다. 이효리 병이다. 20대 때는 그 당시 이효리의 화려한 삶을 동경했다. 그리고 30대가 된 지금은 마흔의 이효리처럼 살고 싶다. 아직은 조금 더 훔쳐보고 싶다. 언니처럼 살고 싶으니까.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