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요즘 재즈 듣는 재미에 푹 빠진 에디터 지정현이다. 전에도 야금야금 듣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재즈에 빠진 건 작년 도쿄 여행 이후다. 재즈 듣는 티를 내고 다녔고(있어 보이고 싶었다), 도쿄에 간다고 홍보하고 다니니, 주변 지인들이 한마디씩 했다. “재즈 킷사는 꼭 가봐요.” 그래서 하루는 날 잡고 킷사만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가게 하나하나가 너무 좋아서, 그냥 통째로 한국에 옮겨오고 싶었다.
일본의 재즈 사랑은 꽤나 유별나다. 재즈 킷사란, 일본 다방 문화인 ‘킷사’에 뿌리를 둔 공간으로, 재즈만 전문적으로 틀어주는 카페다. 그 말인즉슨, ‘재즈를 들으러’ 카페에 간다는 얘기. 당신이 도쿄에 갔다면, 재즈가 주도하는 질서에 벗어날 수 없다. 모스버거에도, 편집숍에도, 길거리 숍에도 재즈가 흐르기 때문.
그렇다면 차라리, 아예 재즈에 젖어버리는 것도 여행을 즐기는 방법 중 하나다. 필자가 직접 다녀온 재즈 킷사를 소개한다. 재즈가 뭔지 몰라도 괜찮다. ‘샤빠뚜비뚜바’ 스캣에 몸을 흔들 줄만 안다면, 충분히 즐거울 테니까.
여기서 잠깐!
방문 전 알아두면 좋은 내용들
재즈 킷사는 ‘감상’이 메인인 공간이다. 이곳의 주인은 당신이 아니라, 음악이다. 디테일에 진심인 일본답게, 재즈 킷사에도 음악을 깊이 즐기기 위한 몇 가지 에티켓이 있다. ‘돈 내고 갔는데 눈치까지 봐야 하나?’ 싶겠지만, 재즈가 주도하는 질서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싶다면, 아래의 가벼운 안내서를 한 번 훑어보자.
• 대화는 자제할 것.
기본적으로, 킷사에서는 대화를 자제해야 한다. 가게마다 규칙은 다르지만, 아예 ‘대화 금지’라고 써 붙여둔 곳도 있다. 표지판이 없더라도, 입장하는 순간 느껴질 거다. ‘아, 여긴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구나’ 하고. 가게에 따라선 ‘No Talking Time’을 정해두기도 한다. 보통 오후 6시까지이며, 그 이후엔 재즈 라이브나 바처럼 편안한 분위기로 운영된다. 동행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다면, 저녁 시간대를 추천한다.
• 음향 기기를 사용해선 안 된다.
개인 음향 기기 사용은 자제하자. 이곳은 마스터가 준비한 플레이리스트를 함께 듣는 공간이다. 나온 곡이 마음에 안 든다고 이어폰을 꺼내면,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다. 따로 적혀 있지 않더라도, 마스터의 선곡을 믿고 귀를 활짝 열어보자.
• 점심 식사를 판매한다.
킷사는 넓은 의미에서 ‘카페’다. 커피와 술은 물론, 간단한 식사도 파는 곳이 많다. 가게마다 다르지만, 대개 한 끼 정도는 해결할 수 있다. 토스트가 가장 흔하고, 어떤 곳은 마스터가 직접 끓인 카레나 수프, 샐러드를 낸다. 음식 맛이 훌륭한 곳도 있지만, 명심하자. 재즈 킷사는 어디까지나 ‘음악’이 주인공인 공간이라는 점을. 맛집 기대는 잠시 접어두는 편이 좋다.
[1]
이글스
Eagle Yotsuya
주소 | 요쓰야 (신주쿠), 도쿄도 신주쿠구 요쓰야 1-8-6 호리나카 빌딩 B1F
영업시간 | 월 – 금 11:30 – 23:00, 토 12:00 – 23:00 / 일요일 휴무
방문 난이도 下
노트북 사용이 가능할 정도로, 다른 킷사에 비해 규칙이 관대한 편이다. 재즈 킷사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은 입문자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음악 취향이 맞는 동행인이 있다면 함께 가는 것도 좋다. 단, 대화는 자제할 것!
요쓰야에 자리한 재즈 킷사 이글스는 1967년에 문을 연 장수 킷사다. 무려 50년 넘게 같은 자리를 지켜온 셈. 요쓰야는 신주쿠 동쪽 끝자락, 도쿄 중심부와 가까우면서도 주택가와 상업 지구가 어우러진 한적한 동네다. 그런 입지 덕분인지, 이글스엔 직장인을 비롯해 학생, 재즈 애호가, 관광객 등 각계각층의 손님들이 드나든다. 노트북 사용이 가능한 점도 다양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이유 중 하나.
지하로 내려가 묵직한 현관문을 열면, 빈티지 우드 패널로 둘러싸인 아늑한 공간이 펼쳐진다. 정면엔 뛰어난 성능으로 유명한 JBL 4344 MK2 스피커가 자리 잡고 있고, 좌석은 1인석부터 4인석까지 다양하게 준비돼 있다. 음악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다면 스피커 앞 1인석을 추천하지만, 볼륨이 꽤 큰 편이니 귀가 민감하다면 약간 거리를 두고 앉자.
주로 트는 음악은 60년대 재즈이나, 현대 재즈로 넘어가기 전 과도기 음반들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정숙 시간은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이 시간 동안에는 간단한 식사도 판매한다. 이글스 로고가 새겨진 후드티와 모자, 에코백도 판매하니, 공간이 마음에 든다면, 하나쯤 구매해보자. 나도 결국 후드티(4천 엔) 하나 데려왔다.
흘러나온 앨범
〈3 Bones and a Quill〉 – Gene Quill Quartet with Three Bones, 1959년
진 퀄(Gene Quill)의 알토 색소폰에 세 명의 트롬본 연주자가 더해진 협연 앨범. 경쾌한 스윙 리듬의 첫 곡 ‘Three Preacher’가 흐르자, 이글스의 우렁찬 스피커 사운드 덕분에 절로 발이 들썩였다. 스피커 앞에 앉아 있던 현지 청년도 ‘아, 이거지’ 싶은 표정으로 짧게 박수를 보냈다. 트롬본이 셋이나 되다 보니, 리듬 섹션의 변화와 각기 다른 연주 스타일을 구분해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2]
롬파치치
Rompercicci
주소 | 아라이야쿠시 (나카노구), 도쿄도 나카노구 아라이 2-45-11
영업시간 | 11:00 – 23:00 / 월요일 휴무
방문 난이도 上
중심지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나카노에 볼 일이 있고, 조용히 쉴 공간을 찾고 있다면 한 번쯤 들러보자. 연인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필담을 주고받으며 재즈로 분위기를 더하고 싶을 때 찾아가도 좋겠다.
나카노구 아라이야쿠시의 골목 안. 작은 개인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인 조용한 동네에 재즈 킷사 롬파치치가 있다. 이곳은 고전적인 킷사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더해진, 말 그대로 ‘모던 킷사’다. 하얀 나무 프레임과 옐로 스트라이프 천막. 첫인상은 귀엽고 다정하지만, 문 앞 안내 문구는 꽤 단호하다. “대화 금지. 이어폰 금지. 노트북 사용 금지.”
실내도 바깥만큼이나 따뜻하다. 화이트 우드 모티브는 내부 인테리어로도 이어지고, 테이블과 의자 모두 나무로 짜여 있다. 나는 비 오는 날에 이곳을 찾았는데, 마치 여행자를 맞아주는 산장 같은 인상을 받았다. 사용 중인 스피커는 1960년대 생산된 JBL C38 Baron. 레트로한 디자인과 포근한 음색으로 유명한 모델이다. 음악은 하드밥부터 모던 재즈까지, 부부 마스터의 취향에 따라 매일 조금씩 다르다. 재즈라는 장르의 넓은 결을 경험하고 싶다면, 좋은 선택지가 될 것이다.
롬파치치의 차별점은 메뉴다. 커피와 위스키, 케이크는 물론이고, 퀄리티 높은 음식도 판매하고 있다. 커피와 위스키, 케이크는 물론이고, 퀄리티 높은 식사 메뉴도 준비되어 있다. 파페네 토마토 크림 파스타, 크로크무슈, 쇼콜라와 바닐라 아이스크림까지. 연인과 조용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딱 좋다. 나는 비를 맞아 쌀쌀해진 몸을 녹이려고, 럼이 들어간 스파이스 코코아를 주문했다. 알싸한 향과 부드러운 단맛, 럼의 여운까지 균형이 잘 잡힌 맛. 술기운이 확 올라와 꾸벅꾸벅 졸았다만, 그만큼 편안하게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흘러나온 앨범
<Shiny Stockings> – Barney Kessel, 1977년
재즈 기타리스트 바니 케셀(Barney Kessel)이 일본에서 녹음한 앨범으로,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희귀 바이닐로 알려져 있다. 타이틀 곡 〈Shiny Stockings〉은 원래 카운트 베이시 오케스트라(Count Basie Orchestra)의 버전으로 익숙했지만, 케셀은 이를 보다 테크니컬하고 속도감 있게 해석해 신선하게 다가온다. 보사노바와 차분한 리듬의 쿨 재즈 풍 곡들도 수록되어 있어, 이 앨범 하나만으로도 다양한 재즈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3]
스윙
swing
주소 | 오쿠시부야 (시부야구), 도쿄도 시부야구 가미야마초 16-4 빌라 메트로폴리스 4B
영업시간 | 월-수, 금-토 12:00 – 23:00, 일 11:00 – 20:00, 매주 목요일, 매월 2,4째 주차 일요일 휴무
방문 난이도 中
시부야에서 기가 빨린 당신. 혼자 여행 중인 내향형이라면, 스윙(Swing)에 들러보자. 스윙 재즈라는 든든한 말동무가 조용히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시부야의 인파를 벗어나 요요기 공원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젊은 감각의 레스토랑과 취향이 또렷한 숍들이 모여 있는 오쿠시부야가 나타난다. 스윙은 그 오쿠시부 초입, 편집숍과 바가 함께 입점한 다용도 멘션 4층에 자리한 재즈 킷사다. 낮은 조도의 입구, 멘션을 개조해 만든 공간을 따라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비밀 아지트를 찾아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초록 벽에 블랙과 브라운으로 포인트를 준 실내. 우측으로는 기다란 바가 놓여 있고, 그 옆에 피아노와 스피커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벽면을 채운 바이닐에서 마스터의 재즈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스윙엔 묘한 중후함이 맴돈다. 자연스럽게 몸을 낮추게 되는 분위기. 마스터는 부산스럽지 않게, 최소한의 몸짓으로 조용히 응대한다. 가게 이름처럼, 스윙 재즈가 빈티지 스피커를 타고 경쾌하게 흐른다.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일본인들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곱씹게 된다.
시부야의 북적임에 지쳤다면, 스윙은 근사한 도피처가 되어줄 것이다. 입보다는 귀를 예민하게 세우고, 발끝으로 스윙 리듬을 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점심에는 카레도 판매한다고 하니 식사 겸 방문해도 좋겠다. 단, 오후 6시 이후엔 테이블 차지(500엔)가 붙으니 참고할 것. 비정기적으로 재즈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흘러나온 앨범
<The Magnificent Thad Jones> – Thad Jones, 1956년
하드 밥 시대를 대표하는 트럼페터 새드 존스(Thad Jones)의 대표 앨범. 오후 6시를 앞두고 테이블 차지를 피하려 일어서려던 순간, 은은하게 깔리는 트럼펫 소리에 홀린 듯 다시 자리에 앉게 됐다. 〈Billie-Doo〉가 흘러나올 땐 ‘맥주를 시켜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 각 연주자들의 앙상블을 유연하게 조율하는 드럼, 맥스 로치(Max Roach)의 연주에 집중해 들으면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4]
볼롱테르
Volontaire
주소 | 아카사카 (미나토구), 도쿄도 미나토구 아카사카 5-1-2 아카사카 엔젤 빌딩 2F
영업시간 | 12:00 – 02:00 / 매주 일요일 휴무
방문 난이도 中
간단한 술 한잔과 함께, 분위기 있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면 볼롱테르(Volontaire)를 추천한다. 마스터의 영어 실력이 유창하니,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자. 예상치 못한 대화가 여행의 재미를 더해줄지도 모른다.
일본 주요 청사와 대사관이 모여 있는 동네, 아카사카. 비즈니스 미팅이 잦은 지역답게, 고급 술집과 고풍스러운 식당이 즐비하다. 그 거리 한켠, 직장인들이 바쁘게 오가는 길목에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곳이 있다. 재즈 킷사 볼롱테르. 불어로 ‘지원자’라는 뜻의 이 이름은 다소 의외처럼 느껴질 수 있다. 재즈는 미국 음악인데, 왜 프랑스어 이름일까? 알고 보니, 1977년 개업 당시엔 샹송을 중심으로 한 공간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마스터가 가게를 인수하며 재즈 킷사로 변모한 것.
베이지 톤의 원목 바와 테이블, 붉은 융단이 공간의 포인트 컬러 역할을 한다. 고개를 돌리는 곳마다 푸른 식물이 시야를 채우고 있어, 은은한 생기가 유기적으로 흐른다. 그리고 그 중심엔 재즈가 있다. 볼롱테르의 가장 좋은 자리는 바다. 자리에 앉아 짜임새 있게 꽂혀 있는 바이닐을 바라보다 보면, 전설적인 연주가들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볼롱테르는 아카사카라는 동네에 잘 어울리는 어른의 공간이다. 고된 미팅을 마치고, 넥타이를 느슨히 풀며 이곳을 찾는 직장인을 상상해보자. 그에게 재즈는 위로이고, 위스키는 작은 기쁨일 것이다. 안주는 이곳의 자랑인 샌드위치로. 나는 저녁 시간이 가까워 커피 한 잔만 주문했지만, 다음에 들른다면 꼭 샌드위치도 맛보고 싶다. 참고로, 커피도 꽤 훌륭했다.
흘러나온 앨범
<Midnight Sun> – Moon Hawwon & Tsuyoshi Yamamoto, 2024년
재즈 싱어 문혜원(Moon Haewon)과 재즈 피아니스트 야마모토 츠요시(Tsuyoshi Yamamoto)의 협업 앨범. 굵직한 스탠더드 재즈 트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문혜원의 청아하고 흡입력 있는 보컬이 단연 돋보인다. 오프닝 트랙 ‘I Let a Song Go Out of My Heart’는 재즈가 지닌 낭만적인 매력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괜스레, 사장님이 한국인인 나를 의식해 일부러 틀어주신 건 아닐까 착각해본다.
일본의 점포가 매력적인 이유는, 가게 주인의 애정과 취향이 오롯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인 아저씨, 꽤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겠군’ 싶은 가게에 들어서면, 그 시간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어진다. 필자처럼, 누군가의 취향을 탐색하는 데에 재미를 느끼는 이라면 재즈 킷사 여행을 떠나보자. 재즈에 대한 진심 어린 태도를 엿보다 보면, 쉽게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오늘날, 시간으로는 살 수 없는 가치에 대해 되묻게 될 것이다.
About Author
지정현
브랜드와 라이프스타일을 탐구하는 에디터.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합니다. 마땅히 조명받아야 할 사람과 사물을 찾는 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