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소비를 예찬하는 맥시멀리스트 김규림이다. 몇 해 전, 처음으로 기계식 키보드를 들였다. 늘 위시리스트에 담겨 있었지만 선뜻 결제하지 못했던 키보드를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도구가 필요하다’라는 핑계로 과감하게 구매했다. 35만 원. 결제를 하면서 느꼈다. 음, 나 이제 정말로 어른이 되었구나.
초등학생 때 문방구에서 산 새 필기도구를 쓰고 싶어 자리에 앉아 공부를 했던 습성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하다. 새로운 도구에 등 떠밀려 움직이는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난히 무기력한 나날, 새로운 키보드를 들이면 거뜬히 한 달 정도는 화력이 오른다. 셀프 파이팅이 필요할 때 하나둘씩 사 모았던 키보드를 세어보니 열두어 개 정도가 된다. 그만큼 파이팅이 많이 필요했나 싶어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아무튼 키감, 디자인, 휴대성 등 각자의 이유로 사랑스럽고 유용한 키보드 중 가장 만족스럽게 쓰고 있는 모델 3개를 소개한다.
무용한 아름다움의 극치
[해피해킹 하이브리드 type-S]
앞서 소개한 35만 원 주고 산 나의 첫 키보드는 바로 해피해킹이다. 함께 일하던 개발자의 책상 위에서 본 이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그 키보드. 벼르고 별러 들인 이 친구를 처음 써본 순간 적잖이 당황했다.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인 키 배열에 심지어 상하좌우 키도 없다니? 며칠간 내내 연습해도 계속 오타가 나서 처음엔 배신감까지 들었는데, 중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을 꾹 눌러가며 오기로 계속 쓰다 보니 결국 적응에 성공했다. 적응만 한 달 넘게 걸렸지만 그 이후로는 돌고 돌아 묘하게 자꾸 손이 가는 게 이 키보드다. 이 정도면 키보드를 내가 길들인 게 아니라 내가 길들여진 게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키보드는 작고 예쁠수록 불편하단 건 해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됐다)
초콜릿을 한 조각 한 조각 정확하게 부수는 토프레 무접점만의 독특한 타건감에 압도적인 예쁨까지. 책상 위에 놓인 모습을 보면 질릴 기미 없이 계속 흐뭇한 키보드다. 배열에 완벽히 적응한 이후로는 용감하게 아무런 글자도 쓰여있지 않은 무각 키캡으로 교체했다. 덕분에 가뜩이나 없었던 실용성은 바닥을 치고, 대신 무용한 아름다움을 얻었다.
그나저나 무각 키캡도 숫자키만큼은 손에 익지 않아 아직도 가끔씩 인증번호를 치려면 맨 윗줄 왼쪽에서부터 하나, 둘, 셋… 하며 숫자를 세야 한다. 가끔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그 답은 사실 잘 알고 있다. 예쁜 게 다이기 때문이다.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람과는 상극이지만 적어도 나처럼 ‘기왕이면 아니라 곧 죽어도’ 예쁜 물건을 선호하는 사람에게는 단호하게 추천하고 싶은 궁극의 키보드다.
레트로 디자인 끝판왕
[FL-ESPORTS OG104]
레트로 키보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종착지라 불리는 모델이 바로 이 OG104다. 다 예쁜데 로고가 촌스럽다든지, 색이 너무 모던하다든지, 요즘 나오는 레트로 키보드들에는 묘하게 꼭 아쉬운 부분이 하나씩 있었는데 이 모델은 그런 구석이 없어 보는 순간 반했다. 텐키리스(OG87)와 풀배열(OG104) 두 가지 모델이 있는데, 자고로 옛날 키보드의 핵심은 오른쪽 숫자키라고 믿기에 평소에 거의 쓰지 않는 풀배열을 선택했다. 클 줄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보니 가로가 너무 길어서 깜짝 놀랐다. 그간 미니 배열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는 너무나 큰 그대여.
그런데 이 키보드, 계속 쓰다 보니 묵직한 바디와 저소음 고래축의 보글보글 조용한 키감이 더해져 회사에서 조용하게 쓰기 참 좋다. 옆자리 동료들의 집중력을 위해 저소음축의 조용함은 유지하되, 오른쪽의 숫자키만 조금 더 경쾌한 카일 민트축으로 바꿔두었다. 업무 중 간혹 숫자를 다룰 일에서는 조금의 흥(?)을 더하기 위함이다. 모쪼록 일하는 기분은 내가 만드는 거니까.
무난하게 쓰기 좋은 디자인도, 훌륭한 키감도 장점이지만 사실 이 키보드의 구매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건 아주 작은 포인트는 바로 동봉되어 있는 윈도우 키캡이였다. 분명 이건 뭘 좀 아는 덕후가 만들었구나. 이렇게 레트로 디테일은 다 챙기면서도 블루투스 페어링은 최대 3대에 유선 연결 지원까지 외형과 달리 소프트웨어는 최신식이라 쓰기에도 불편함이 없다. 요새 회사에서 셀프 파이팅이 필요한 사람에게 슬쩍 권하고 싶은 모델.
입문용 키보드로 추천
[nuphy AIR75]
기계식 키보드에 관심은 있는데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 추천하는 모델이다. 만듦새가 좋아 써본 사람들의 만족도가 상당히 높은 키보드인데, 기계식 키보드 중에서는 매우 슬림한 편이고 키도 낮아 오래 써도 손의 피로함이 거의 없는 것이 큰 장점이다. 접이식 키보드만큼은 아니지만 앞서 소개한 키보드들과 비교했을 때 휴대성도 좋아 카페에서 작업할 일이 있을 때 자주 찾게 된다.
nuphy AIR 시리즈는 언뜻 보면 장난감처럼 보여도 자세히 뜯어볼수록 상당히 디테일하게 잘 만든 키보드다. 오리지널리티가 돋보이는 키캡 디자인에 바디도 플라스틱이 아닌 알루미늄이라 실물로는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다. 발랄하지만 촌스럽지는 않은 포인트 컬러 키캡 덕분에 컬러풀한 케이블과도 잘 어울린다.
맥북 유저만이 누릴 수 있는 nuphy AIR의 재미있는 기능도 하나 있다. 노트북 위에 거치 기능, 그러니까 맥북의 원래 키보드 위에 올리면 원래 키보드를 대체해 쓸 수 있다는 거다. 좁은 공간에서는 키보드까지 놓기 영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참 영리한 방식이 아닌가. 그런데 원래 키보드가 있는데 대체 이게 왜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게요, 근데 이런 거 재밌잖아요!
확실히 이 모델은 쓸수록 만족도가 높은 키보드인데, 잃어버리거나 고장 나서 다시 구매해야 한다면 AIR60을 구매할 것 같다. AIR75도 무거운 건 아니지만, 더 확실하게 작고 가볍다면 더 자주 들고 다닐 것 같아서다. (참고로 AIR60는 463g, AIR75는 598g)
번외.
최근에 꽤나 재미있는 키보드를 발견했다. 무려 3키 키보드. 매핑해서 원하는 키로 쓸 수 있는 블루투스 키보드다. 대체 이런 걸 어디에 쓰나 싶지만 이북 리더기와 페어링하면 놀라울 정도로 편하다. 오른쪽, 왼쪽 화살표와 가운데는 리프레시 키로 매핑 후 쓰고 있는데 이북 리더기를 쓰는 내내 느꼈던 묘한 불편함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렇게 작아도 나름 진짜 키보드라 축과 키캡을 바꿔 끼워 다니는 맛도 쏠쏠하다. 아무래도 2024년 잘산템 5위 안에는 쉽게 들지 않을까 싶은 3키 키보드, 이북 유저님들 이거 왜 안 사요? 구매처는 알리.
서랍을 열어 훑어보고 오늘 쓸 키보드를 고른다. 무기고에서 전술에 맞는 무기를 고르는 장수의 마음··· 이라기엔 너무 비장하지만 삶은 전쟁터 아니던가. 유독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키보드를 쥐여주며 스스로를 구슬리고 달래 전쟁터로 내보낸다. 곧이어 언제 그랬냐는 듯 토도도도 키보드를 치며 열심히 일하는 나를 발견한다. 그래, 나를 움직이는 건 역시 도구다. 앞으로도 잘 해보자. 다음 달에 또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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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림
문구인 & mix coffee ma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