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에디터M이다. 올해엔 일과 나를 분리하는 연습을 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알람을 애써 무시하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길바닥에 폰을 떨어뜨리고 집에 돌아온지 몇 시간이 지나서야 폰을 잃어버렸다는 걸 안 적도 있다(다행히 좋은 사람이 주워서 돌려줬다).그럼 스마트폰을 확인하지 않는 진공 같은 시간을 알차게 채웠냐고? 아니 그렇지도 않았다. 요리를 하거나, TV를 보거나, 음악을 듣고 가끔 책을 읽었다. 별일 없는 주말이 쉰 번 정도 지나고 그렇게 일 년을 보냈다.
어워즈를 준비하며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덧 없이 짧다. 나이가 든다는 건 나를 더 잘 알게 되는 일.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 한살한살 나이를 먹을수록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은 점점 더 줄어들더라. 취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며 하기도 전에 포기하는 일들이 많았다. 얼마 전 유튜브 영상에서 물리학자 김범준 님이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뇌는 시간을 객관적으로 인지하지 않아요.” 똑같은 시간도 새로운 경험과 자극이 많으면 우리의 뇌는 더 짧다고 인식한다. 3분이 얼마나 길 수 있는지 체험해보고 싶다면 플랭크를 해보면 된다. 어쩌면 내가 유독 올해가 짧게만 느껴지는 이유도 어쩌면 매일 반복되는 삶을 살아서일까? 2024년엔 더 많은 물건을 써보고 새로운 도전을 해야지. 내년의 나의 어워즈는 더 풍성해지길 바라면서. 나의 아주 개인적이고 사소한 기록. 올 한 해 어떤 것을 뜨겁게 사랑했는지 봐주시길.
올해의 기사
달항아리
나의 꿈은 언제나 에디터가 되는 거였다. 고등학교 쉬는 시간 친구들이 수다를 떨고 만화를 읽을 때도 나는 보그를 보고 지큐를 읽었다. 도도한 걸음으로 바다 건너 파리의 패션위크를 거니는 모델들의 이름을 외우고, 끊임 없이 변하는 트렌드를 수학의 정석을 보듯 달달 외웠다. 너무 얇아서 자주 손가락이 베이는 종이 위에 펼쳐진 화보를 보면서 언젠가 나도 어른이 되어 이렇게 멋진 화보를 찍어야지 결심했다. 그리고 올해 여름, 디에디트의 에디터들은 복숭아 나무 대신 스튜디오의 조화 옆에서 사이트 리뉴얼을 결심한다. 올 한해 가장 큰 프로젝트였던, 무려 7년 만의 디에디트 웹사이트 리뉴얼의 시작이었다. 새로운 집을 만들었으니 다음은 손님에게 대접할 맛깔난 콘텐츠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멋있게만 보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미슐랭 레스토랑 리뷰부터 명동 길거리 음식까지, 단짠단짠,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사이트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고 싶었다. 3천 원 짜리 다이소 공산품을 오천만 원짜리 화보처럼 보이고 싶어서 매거진과 함께 작업하는 포토그래퍼를 섭외하고 플로리스트의 도움도 받았다. 다이소 달항아리는 올해의 기사로 뽑은 건 디에디트가 어떤 곳인지 가장 잘 보여주는 기획이다. 잡지를 동경하던 19살의 나에게 달항아리 기사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혜민아, 20년 뒤에 네가 만든 걸 봐” 너무 자뻑인가?(그럼 어때)
올해의 구독
어글리어스
넷플릭스, 웨이브, 디즈니 플러스 같은 OTT는 기본. 유튜브 프리미엄과 쿠팡 와우 멤버십, 네이버 플러스 멤버십까지. 내가 이렇게 많은 구독을 하고 있다고? 이 말인 즉 숨만 쉬어도 매달 20만 원이 내 통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리다. 이런 구독중독자인 내가 올해 하나 더 시작한 구독이 있으니 바로 ‘못난이 농산물 정기배송’ 어글리어스다. 이 서비스는 못생겼다고 상품성이 떨어져서, 판로를 찾지 못해서 버려질 뻔한 농산물을 모아 정해진 햇수만큼 집으로 보내주는 서비스다. 이주에 한 번, 우리 집엔 내가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다양한 채소 한 박스가 배달된다. 1인 가구에 맞게 소포장된 용량과 못생겨도 맛만 좋은 다양한 채소 덕분에 이것저것 잘해 먹고 산다. 뜻하지 못한 우연한 발견과 시간과 정성을 쏟아 나를 완성된 요리를 먹으며 내 몸을 챙기고 있다는 만족감을 주는 어글리어스를 올해의 살림템으로 선정한다. 비록 멕시코 남부에서 나는 차오테는 아직 어떻게 먹으면 좋을지 몰라 몇 주째 냉장고에 잠자고 있지만.
올해의 가방
바쿠백
올해의 가방으로 바쿠백을 뽑았다는 말을 들은 에디터H가 픽 하고 웃었다. “몇 백만 원짜리 가방도 샀으면서 이걸 뽑는다고?” 하지만 좋은 물건이라는 것은 가격과 비례하지 않는 법. 올해 9월에 사서 정말 매일같이 들고 다니는 명품백에도 만 원짜리 얄궂은 바쿠백을 항상 넣어서 다닌다. 바쿠는 뉴욕 브루클린에서 시작된 바쿠백은 일회용 비닐 사용을 줄이기 위해 탄생한 친환경 브랜드다. 바쿠백을 짧게 설명하면 ‘작게 접어서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시장바구니’로 정리할 수 있겠다. 형태는 우리가 흔히 아는 비닐봉지를 본떠 만들었으며, 소재는 얇고 바스락 거리는 나일론 소재라 가볍고 질기다. 크기는 베이비 사이즈 기준 가로 25cm 세로 46cm 정도. 착착 접어 같은 패턴의 파우치에 넣으면 가로세로 10cm 정도로 작아진다. 퇴근길 편의점에서 맥주 살 때, 주말에 시장 갈 때 바쿠백 하나면 무엇이든 넣을 수 있으며, 해외여행 가서도 과도한 쇼핑으로 캐리어에 남은 공간에 없을 때 세컨백으로도 훌륭하다. 올해 가장 많이 들고 다닌 나만의 꿀템. 올해의 가방으로 선정한다.
올해의 필기구
라미 2000 마크롤론 만년필
모든 것을 디지털로 기록하는 이 시대에도 펜과 종이가 필요한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일명 ‘버터질감’이란 별명을 가진 이 펜은 기존의 만년필 특유의 종이를 긁는 느낌을 싫어하는 나 같은 사람에겐 완벽한 필기구다. 14K 골드에 특수 코팅된 펜촉은 딱 좋은 온도로 녹은 버터를 가르듯 종이 위에서 미끄러진다. 손에 쥐었을 때 묵직하게 느껴지는 무게감, 이음새 없이 완벽하게 마무리된 완벽한 모양은 쓸 때마다 내 마음을 좋은 버터처럼 풍성하게 한다. 더 좋은 펜이 있으면 더 멋진 글을 쓸 수 있을까?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오늘 장 볼 리스트를 적어도 이 펜과 함께 하면, 꽤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올해의 드라마
더 베어
올해의 화제작 <무빙> 때문에 디즈니 플러스를 가입하긴 했는데,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고? 혹은 마블을 볼 수 있대서 시작했는데, 마블 드라마들이 영 시시해서 구독 취소 하고 싶다고? 그런 사람들에게 <더 베어>를 추천한다. 어린 나이에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며 주목을 받던 주인공은 친형의 자살 후, 형이 하던 그저 그런 시시한 샌드위치 가게를 맡는다. 문제는 거기에 직원도 함께 딸려 왔다는 것. 요리에 천재적인 재능은 있지만 사회성 제로의 주인공과 실력은 없으면서 이상하게 고집과 자존심만 가득한 직원들이 과연 빚더미에 앉아있는 이 레스토랑을 과연 살려낼 수 있을까? 미쳐버리겠는데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랑해서 결국 끌어안고 붙들고 울고 웃는 이야기. 먹고사는 일이란 건 이토록 치열하고 고단하다. 정신을 쏙 빼놓는 빠른 화면 전환과 부담스러울 정도로 과한 클로즈업 덕분에 주인공의 미쳐갈 때 나도 함께 미쳐가는 기분이다(혹자는 요리계의 위플래쉬라고 평하더라). 30분 길이의 에피소드 8편에서 10편 정도가 한 시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시즌2까지 나왔다. 장담컨대, 시즌이 끝나갈 때쯤엔 결국 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거다. 참고로 이걸 다보면 <만달로리안>을 보면 된다.
올해의 칫솔
큐라덴 트래블세트
이게 얼마만의 큐라덴인지. 내가 큐라덴 5460을 올해의 칫솔로 뽑고 리뷰를 한 게 2017년이다(그 기사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무려 6년 만에 올행의 칫솔로 다시 돌아왔다. 이번엔 큐라덴 칫솔을 반으로 분리해서 손바닥만 한 통에 담고 여기에 미니 치약과 치간 칫솔까지 들어있는 트래블세트다. 한 번 닦으면 일반 칫솔로는 못 돌아가는 압도적인 뽀득함은 여전하고, 알록달록한 화려한 색은 여러분이 이 제품을 사야 하는 이유다. 만 오천 원짜리 하나만 사자니 배송비가 아깝다면, 좁쌀처럼 작은 크기의 칫솔모를 이용해 치아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닦을 수 있는 큐라덴 SC1006 일명, 어금니 칫솔도 함께 구입하는 걸 제안한다. 거울 속 양치질을 하는 내 모습이 너무 옹졸해 보여서 남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다는 점만 빼면 양치의 쾌감이 뭔지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물건 중의 물건이다.
올해의 결심
필라테스
유독 짧았던 2023년을 돌아보며 내가 가장 잘한 일을 뽑으라면 바로 주 2회 필라테스를 한 일이다.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근육에서 느껴지는 기분 나쁜 근육통을 견디다 보면 땀이 뻘뻘 흐르고, 50분 수업 시간은 금세 끝난다. 내가 이렇게 운동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사람이었나? 물론 잘 알고 있다. 주 2회 50분 정도의 짧은 시간으로는 내 쓰레기 같은 몸뚱이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좋은 선생님을 만난 덕분에, 한 주에 적어도 두 번 거울 앞에 서서 정면으로 내 몸을 마주 보고 돌보면서 내 몸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다.
올해의 음료
빅토리아 탄산수(파인애플) + 데니그라스 애플 사이다비니거
올해 가장 많이 마신 건 나만의 창작 레시피였다. 사실 별건 아니다. 큰 잔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빅토리아 탄산수 파인애플맛에 데니그라스 애플사이다비네거를 적당히 타서 마셨다. 빅토리아 탄산수 파인애플맛은 당이 1도 들어가지 않았지만 파인애플의 달콤한 향으로 나의 뇌를 속일 수 있고, 애플사이다비니거 중 가장 쿰쿰한 맛이 덜한 데니그라스 애플사이다비니거는 요즘 많이 들리는 일명 ‘혈당스파이크’를 낮추는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런 효능 보다 더 중요한 건 맛있다는 거다. 톡 쏘는 탄산수와 달콤한 파인애플향 시큼한 맛이 더해져 꽤 그럴듯한 파인애플 에이드 맛이 난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을 향해 맛있는데 건강한 최고의 음료라고 소리 지르고 싶을 정도다. 운동 끝나고 시원한 음료 한잔이 필요한 순간, 과식 후 죄책감을 덜고 싶을 때마다 마시고 또 마셨다. 단연코 올해의 음료다.
올해의 레스토랑
우시고로
올해 11월 몇 년 만에 도쿄를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 내내 매 끼니를 치열하게 마시고 먹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레스토랑이 있어서 소개한다. 바로 야끼니쿠를 코스로 즐길 수 있는 우시고로다. 사과를 먹여 키워내 지방질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최고의 와규를 서버가 완벽하게 구워낸다. 팔뚝만 한 소의 혀 중에 가장 맛있는 가운데 부분만을 골라 살짝 구워주는 우설이나 캐비어를 아낌없이 얹어주는 비프 타르타르도 훌륭했지만,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빵사이에 돈가스를 넣어 만든 일본식 샌드위치 가츠산도다. 버터 함량이 높아 축축하다 못해 축축한 식빵을 그 자리에서 노릇하게 구워낸 뒤 그사이에 특제 소스와 1등급 와규를 레어로 튀겨낸 와규 그리고 생 트러플을 아낌없이 갈아 넣어주는데 이가 없어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부드럽고 고기의 향은 버터처럼 녹진하다. 지난 몇 년간 미슐랭 별을 받은 식당을 포함 맛있는 것들을 많이 먹었지만, 여기보다 만족스러웠던 식사는 없었다. 미슐랭 3스타가 ‘요리를 위해 여행을 할 가치가 충분한 식당’이라는 의미라는데, 이 레스토랑에 다시 가고 싶어서라고 도쿄행 비행기표를 끊을 의사가 충분하니, 내 마음속 별 3개를 주고 싶은 곳이다. 사실 이 레스토랑을 예약한 건 에디터H였는데,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했다. 유독 외국 식당이름 기억하는데 젬병인 나를 위해, 안타깝게도 함께 하지 못한 에디터H를 위해 올해 가장 맛있는 소고기를 먹었노라고 기록해 둔다.
- 우시고로 [링크]
올해의 영화
어시스턴트
잘 알려진 영화는 아니지만, 정말 좋았다. 나의 올해의 영화 어시스턴트. 항상 꿈꾸던 영화사의 어시스턴로 취직한 주인공. 하지만 그녀가 하는 일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다. 회사에 가장 먼저 출근해 시나리오를 프린트하고, 미팅이 끝난 테이블을 정리하거나 점심 심부름을 한다. 이 영화는 반복되는 일상 속 부품처럼 소모되는 주인공의 하루를 통해 한 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영화판 속 만연한 성폭력의 실상을 정물화처럼 그려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늦은 시간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표와 배우 지망생의 미팅, 결국 기다리다 지쳐 사무실의 불을 끄고 퇴근하는 주인공. 사무실을 나서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같은 회사의 높은 직급의 여성 임원과 마주친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여성 임원은 주인공에게 이런 말을 건넨다. “그녀는 대신 많은 것을 얻게 될 거야.”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다. 방관하는 사람 또한 가해자다. 만약 내가 주인공에 처한 상황이었다면, 방관자가 아닐 수 있을까? 영화 내내 카메라는 가해자인 영화사 대표 얼굴 한 번 비추지 않고, 주인공에게 직접적인 폭행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현실적인 묘사에 보는 내내 숨이 막히고 명치가 답답하다. 오래도록 남는 여운으로 올해의 영화를 뽑는다면 단연 1등. 올해의 영화 어시스턴트다. 웨이브에 있으니까 꼭 보시길.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