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대한 환상과 로망. 정확히는 ‘미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행복하고, 부유하고, 귀여운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대한 동경을 꼬맹이 가슴에 새겨버렸다. 따뜻한 전구 장식 불빛으로 채워진 거리와 부모님 손을 잡고 설레는 마음으로 선물을 고르는 아이들, 상점에서 울려 퍼지는 캐럴, 가족들이 둘러앉아 칠면조와 수프, 투박한 생김새의 파이와 꾸덕한 초콜릿 케이크를 나누는 풍경 같은 것들… 한국엔 그런 거 없다는 거 알면서도, 나부터가 허무할 정도로 평소와 똑같이 보낸다는 걸 알면서도 매년 12월만 되면 꼬박꼬박 케빈을 찾았다. 빨간색 스웨터와 초록색 목도리에 눈독을 들이고 휴대폰과 컴퓨터 바탕화면을 크리스마스 이미지로 바꿨다.
그런 내게 이맘때가 되면 생각나는 곳이 하나 있다. 조금이나마 크리스마스 기분을 낼 수 있는, 미국은 못 가도 미국 맛은 살짝 느껴볼 수 있는 카페. 용산구 보광동의 ‘문랜딩 Moon Landing’. 미국 갈 돈도 시간도, 오미크론에 대항할 면역력도 없는 내게 참 귀한 곳이다. 6-70년대 미국이 연상되는 이 카페를 당최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케빈이 사랑할 것만 같은 파르페와 핫초코가 있고, 케빈이 갖고 놀 것만 같은 귀여운 소품들이 널려 있고, 케빈의 부모님이 즐겨들을 것 같은 Nat King Cole의 재즈도 흘러나오니까.
올 때마다 느꼈다. 분명 사장님도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겠지? 레트로와 빈티지 같은 말들로 표현되는 옛날 미국 문화와 그 분위기를 사랑하는 분일 거야. 의심은 틀리지 않았다. 엔싱크나 백스트리트 보이즈,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1990-2000년대 팝스타들에 대한 애정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점점 더 오래된 시절의 미국 문화와 이미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고. 특정한 시기나 장르를 정해두고 디깅한 유형은 아니다. 알록달록한 컬러와 위트 있는 장면을 포착한 필름 사진, 재밌는 패턴의 옷과 잡동사니, 아날로그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올드 재즈 음반 등 그저 좋아하는 것들을 모으고 보니 70년대 스타일이 주를 이루게 된 것뿐. 문랜딩의 공간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한다면… 컬러풀 앤드 큐트? 매끈하고 세련되고 절제된 느낌보다는, 자연스럽고 투박하고 자유분방한 매력이 가득한 공간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방문하면 더 좋은 이유다. Nat King Cole을 비롯해 옛날 재즈 뮤지션들의 따스한 캐럴 음악이 흐른다. 거울에는 산타클로스가 매달려 있고 냉장고를 따라 전구 장식이 반짝거린다. 벽에 걸린 촌스러운 어글리 스웨터는 케빈네 큰 엄마가 방금 벗어 놓고 간 줄. 신나는 마음으로 구석구석 눈길을 주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화룡점정은 파르페와 핫초코. 맛과 비주얼 모두 설레는 기분을 한층 돋아 줄 거다. 생딸기를 사용해서 겨울철에만 제공한다는 파르페는 딸기의 싱그러운 단맛과 아이스크림의 불량스러운 단맛, 그래놀라의 고소한 맛이 무자비한 삼위일체를 이룬다. 한 입 크게 떠서 넣으면 눈이 번쩍 뜨인다. 마시멜로가 듬뿍 들어간 핫초코는 또 어때. 초콜릿만으로 성에 안 차는 우리를 위해 폭신한 마시멜로를 친히 담가주셨다.
물론 나는 카페에서 웬만하면 블랙커피를 마신다. 특히 깔끔하고 산뜻한 브루잉 커피를 선호하지. 근데 크리스마스 시즌에 찾은 문랜딩은 예외다. 스페셜티 커피니 라이트 로스팅이니 뭐가 중요해. 이때만큼은 보광동 케빈이 되어 파르페와 핫초코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다. 슬며시 떠오르기 시작하는 (있지도 않았던) 행복한 크리스마스의 추억. 칼로리 걱정, 죄책감, 자꾸 그런 나쁜 거 생각하면 산타가 선물 안 준다.
이 원고를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 서울엔 함박눈이 내린다. 올드 재즈 캐럴을 들으며 바라보는 눈 덮인 하얀 도시. 아, 내년 크리스마스엔 진짜 미국에 갈 수 있을까?
+
Shop Moon Landing
문랜딩의 소품 하나하나가 마음에 드는 독자분들은 여기로 들어가 보시길. 자체 제작한 상품들도 판매 중이다. 직접 찍은 필름 사진들을 활용한 휴대폰 케이스와 시폰 포스터, 블랭킷 같은 아이템. 공간의 무드와 어울리는 유쾌하고 통통 튀는 이미지가 삽입돼 있다. 연말 선물로도 촬영용 소품으로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