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이 되던 날, 만화영화 <2020 원더키디>를 떠올리며 낄낄댔다. 1989년에 방영된 공상과학만화인데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자원의 고갈로 인류가 지구에서 살기 어려워진다는 설정이었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고 비웃었는데,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니 지구엔 정말 <2020 원더키디> 시대가 도래했다. 바깥세상은 두렵고, 사람들은 마스크 없인 외출하지 못한다. 생각해보니 자원이 고갈되어 가는 것도 맞는 말이고, 일상이 무너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카페조차 자유롭게 드나들지 못하는 실정이니 해외 출장은 말할 것도 없다. 지난 5년 동안 빠짐없이 참여했던 애플의 9월 이벤트는 머나먼 화면 속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줄 신제품은 나오고야 만다.
애플이 간밤에 발표한 제품은 애플워치와 아이패드. 통상 9월 이벤트의 주인공은 아이폰이다. 올해는 여러 외부적인 요인으로 아이폰 공개가 지연된 모양이다. 덕분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애플워치는 모처럼 제대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제품도 그만큼 잘 나왔고 말이다.
신제품인 애플워치 시리즈6는 ‘워치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확실하게 포커스를 맞췄을 뿐만 아니라, 시대적인 니즈를 반영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watchOS7에서 추가되는 손 씻기 자동 감지 기능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손을 최소 20초간 씻으면 바이러스 확산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에 애플워치가 동작 센서, 마이크, 온디바이스 머신 러닝을 사용해 손을 씻는 움직임과 소리를 자동 감지한다. 손을 씻는 동작을 알아채면 20초 타이머를 작동해서 충분히 손을 씻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전통적인 개념에서는 시계의 역량이 아니었던 일이 애플워치에겐 사명이 되는 것이다.
애플워치 시리즈6에는 사용자의 혈중 산소 포화도를 간편하게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기능이 도입된다. 우리가 호흡을 하면 온몸에 산소가 공급된 혈액이 배달되어야 하는데, 혈중 산소 포화도는 이 순환이 얼마나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뒷면의 센서 디자인도 완전히 바뀌었다. 손목에 적색의 적외선을 쏜 뒤 혈액의 반사광을 측정해서 고작 15초 만에 혈중 산소 포화도를 측정할 수 있다. 본래 병원에서 전문 장비를 통해서만 측정할 수 있었던 수치인데, 매일 차고 다니는 시계 화면 위에서 15초 만에 디지털화된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애플이 의학 연구 기관과 협업해서 이 수치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라는 것. 그 중에는 심박수, 혈중 산소처럼 애플워치 앱에서 나타나는 신호를 인플루엔자나 코로나19 등의 호흡기 질환의 초기 신호로 사용할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도 있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하면 이렇다. “애플워치가 코로나19의 초기 증상을 알아챌 수 있는지”연구 중이라는 거다. 물론 말 그대로 연구 과정일 뿐, 의미있는 결과가 나온 건 아니다. 일종의 가능성일 뿐이다. 하지만 이 지긋지긋한 바이러스를 일부 통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된 것 만으로도 옅은 희망이 싹튼다. 역시 애플, 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결국은 제품을 통해 이윤을 추구해야하는 사기업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공익적이면서 효과적인 마케팅이 아닐까.
전작보다 최대 20% 빨라진 성능과 앱 실행 속도를 보여주지만, 배터리 사용시간은 동일하게 18시간을 유지한다. 또, 충전 속도가 빨라져서 1시간 반 이내에 완충이 가능해졌다고. 야외에서 사용자의 손목이 아래를 향하고 있을 때의 화면이 기존 애플워치 시리즈5보다 최대 2.5배 밝아진 것도 변화 중 하나다.
디자인은 동일하지만 케이스와 밴드 스타일이 더 다양해졌다. 최초로 블루 컬러의 알루미늄 케이스가 추가되며, 애플워치 프로덕트 레드 역시 처음으로 출시된다. 컬러가 달라지니 손목에 감겨있을 때 풍기는 느낌도 완전히 달라 보이더라. 조금 튈 것 같긴 하지만 프로덕트 레드에 눈길이 간다.
사실 하드웨어보다 더 중요한 게 워치 페이스의 구성이다. 디자인에도 실제로 큰 영향을 주고, 원하는 정보를 가장 효율적으로 얻을 수 있게 개인화된 화면이기도 하니까. 이번엔 새로운 워치페이스가 대거 등장한다. 스트라이프 페이스는 다양한 컬러 패턴 조합을 통해 내 취향이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고, 아날로그 시계에서 착안된 크로노그래프 프로 페이스도 근사하다. 아티스트와 협업한 일러스트 페이스도 재밌는데, 손목을 올렸을 때와 내렸을 때의 디자인이 다른 게 포인트!
새로운 밴드 스타일도 3가지로 출시되는데 고리나 버클 없이 손목에 맞춰 착용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다. 새로운 애플워치를 사지 않더라도 호환 가능하니 관심 있다면 애플 홈페이지에서 구경해보시길.
애플워치 시리즈6의 가격은 GPS 모델이 53만 9,000원부터. 혹시 더 저렴한 옵션을 찾고 있다면, 함께 슬쩍 공개된 애플워치SE가 아주 합리적이다. 디자인은 애플워치 시리즈4 이후의 기기와 같은 크기의 디스플레이라고 보면 된다. 애플워치 SE 성능은 애플워치 시리즈3보다 2배 빠른 정도. 그러니까 충분히 쓸만한 제품이다. 가격은 GPS 모델이 35만 9,000원부터. 더불어 애플워치 시리즈3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 25만 9,000원부터 판매된다.
애플이 애플워치 신제품과 함께 공개한 애플 피트니스+와 가족 설정 기능도 흥미로웠다. 어쩌면 제품 자체보다 더! 애플 피트니스+는 집에서 운동해야 하는 시대를 위한 솔루션이다. 쉽게 말해 전문 트레이너가 만든 운동 프로그램과 영상을 보며 함께 운동할 수 있는 서비스라고 생각하면 된다. 차별점이라면 애플워치와 연동되기 때문에 심박수, 칼로리 소모량, 활동량 등이 실시간으로 화면에 표시된다는 거다. 심지어 애플뮤직과 연동해서 운동하기 좋은 음악까지 추천해준다. 애플의 생태계를 적절히 아우르는 서비스다. 한국에 출시되지 않는 다는 게 함정. 한달에 9.99달러고 연 결제는 79.99달러 라고. 조금 비싸긴 하지만 선보이는 콘텐츠 서비스마다 삽질 중인 애플의 아이디어 중에 가장 현실적이었다.
가족 설정은 아이폰이 없는 사람도 애플워치를 연동해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다. 아마 어린 자녀를 관리하기 위한 부모의 입장에서 만든 기능인 것 같다. 부모의 아이폰에 연동해서 애플워치를 독립적으로 사용하되, 자녀의 사용 기록이나 위치 등을 부모가 체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필요에 의한 기능이겠지만 나는 아직도 철부지같은 마음이라 숨이 막힌다.
이 모든 서비스와 함께 ‘애플 원’이라는 통합 요금제도 선보였다. 애플 서비스 한정의 통합 요금제다. 애플뮤직, 애플TV+, 애플 아케이드, 아이클라우드 등을 결합해서 저렴한 통합 요금을 책정했다. 국내 사용자에겐 의미 없지만, 해외에선 어떤 반응이 올지 궁금해진다.
아이패드 에어도 느낌이 좋다. 잘 팔릴 것 같다는 뜻이다. 뭘 보고 그걸 아냐고 묻는다면… 이 고운 때깔을 보자. 컬러가 화사해졌다. 실버, 스페이스 그레이같은 베이직 컬러에 로즈골드, 그린, 스카이 블루까지 화려하고 색다른 컬러가 추가됐다. 대대로 애플은 새로운 컬러가 나오면 판매량이 바짝 뛰었다. 워낙 컬러를 잘 뽑아서 그렇기도 하고, 신제품 티가 많이 나니까…! 하핫. 나도 빨리 그린 컬러 아이패드 에어 하나 뽑아서 온 세상에 신제품 산 티를 내며 자랑하고 다니고 싶다.
사실 정말 많이 바뀐 건 전면 디자인이다. 홈버튼이 사라지고 전면 디자인에서 화면의 비중이 높아졌다. 마치 아이패드 프로를 연상케 하는 디자인이다. 화면도 10.9인치로 커졌다.
홈버튼은 사라졌지만 터치ID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단의 작은 버튼에 지문인식 센서를 넣은 것. 이 제품의 두께가 6.1mm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버튼 역시 좁고 작을 수밖에 없다. 여태까지 중 가장 작은 센서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점점 줄여서 아이폰에도 들어갈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애플이 아이패드 에어에 꽤나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느껴지는 게, 최신 칩셋이 A14 바이오닉칩이 아이패드 에어에 처음으로 탑재됐다. 심지어 애플 최초의 5나노미터 공정이라고. 아이폰처럼 작은 기기일 수록 공간을 쪼개고, 또 쪼개서 활용해야 하는데 공정이 세밀해질수록 같은 면적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게 된다. 트랜지스터는 컴퓨터 회로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단위를 말한다. A14 바이오닉에는 성능 향상과 전력 효율을 위해 칩의 거의 모든 부분에 무려 118개의 트랜지스터가 빼곡히 자리하고 있다. 16코어의 뉴럴 엔진 역시 역대 가장 향상된 머신 러닝 역량을 보여준다. 덕분에 기존 아이패드 에어에서는 할 수 없었던 작업들이 가능해졌다. 카메라를 사용해 실시간으로 피사체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반응하거나, 4K 영상 소스를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게 됐다.
와이파이6를 지원하며, USB-C 포트를 통한 확장성 마저갖췄다. 카메라도 스피커도 전작에 비해 업그레이드 되었음은 물론이다. 여러모로 봤을 때 아이패드 프로가 아니라 에어가 맞나 싶은 스펙이다. 다음 세대 아이패드 프로는 얼마나 끝장나게 잘 만들려고 에어에게 이 정도를 몰빵한단 말인가!
가격은 와이파이 모델 기준으로 64GB 77만 9,000원. 저렴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아이패드 프로와 비교하면 매력적이다.
함께 공개된 아이패드 8세대는 A12 바이오닉 칩셋을 탑재했으며, 기본형 아이패드 중에서는 처음으로 뉴럴 엔진을 탑재했다. 가격은 와이파이 모델 32GB 기준 44만 9,000원. 같은 가격에 용량을 64GB까지만 썼어도 박수를 쳤을텐데.
올해 내내 모든 행사를 온라인으로 경험하다 보니 이제 그 거리감에 적응해가는 것 같다. 현장에서 사람들의 함성과 박수 소리를 함께 듣는 생생함은 없지만, 1분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은 애플의 이벤트 영상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모두가 기대했던 아이폰은 없었지만, 아이폰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 더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기도 했다(그만큼 아이폰이 파괴적인 아이템이다). 애플은 언제나처럼 본인들이 추구하고 있는 가치에 대해 시간과 공을 들여 이야기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재생 에너지에 대한 거다. 제품 내부와 포장에 계속해서 재활용 가능한 소재와, 이미 재활용된 소재를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 노력 중 하나다.
애플워치 SE 케이스는 100% 재활용 알루미늄으로 제작됐다. 또, 전자 폐기물이 될 수 있는 AC 어댑터를 애플워치 SE 패키징 구성에서 제외했다더라. 이 결정만으로도 연간 5만 대의 차가 도로에서 배출하는 탄소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고객들의 집에 여러 개의 어댑터가 굴러다니는 걸 알고 있다!”고 말할 때 뜨끔했다. 사실이니까. 버릴 수도 없고, 다 쓸 수도 없는데, 막상 안준다니까 괜히 섭섭하고. 사람 심보란 참 이상하다. 어댑터를 구성에서 제외한 결정에 대한 판단은 소비자 개인이 하는 것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애플은 진심이다.
고작 제품일 뿐이지만, 고작 제품만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과 일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제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으니까. 그 방법론 중 하나가 어댑터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 동참해 봄직하다. 앞서 언급한 <2020 원더키디> 속 지구가 되어버릴까 무섭기도 하고. 이미 지구는 우릴 미워하는 것 같으니까.
애플이 생태계 안에서 고군분투하며 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려는 시도가 흥미로웠다. 국내에서는 제대로 이용할 수 없는 서비스가 대부분이다 보니 심도 깊게 다뤄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글이 길었으니 세 문장으로 요약해보자.
애플워치 살까 말까 고민했다면 지금이 타이밍.
아이패드 에어 사야지.
우리집에 안쓰는 어댑터 너무 많다.
2020년 가을의 애플 이벤트 소식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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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