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서울지킴이 에디터B다. 다들 휴가는 잘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나의 지인들은 발리, 마카오, 제주도로 휴가를 떠나더라. 나도 비행기를 타고 저 멀리 낯선 곳으로 휴가를 떠날까 잠시 생각해봤는데,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마도 최근에 다녀온 태국 출장 때문이 아닐까 싶다. 휴가를 생각하니 공항의 분주함과 낯선 공간이 주는 긴장감이 먼저 떠오르면서 고단해졌다. 나는 해외로 가는 대신 호캉스를 가기로 했다. 어디로? 서울로.
호캉스의 어원은 ‘호텔에서 보내는 바캉스’라는 뜻이지만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되었다. 그곳이 호텔이든, 게스트하우스든 에어비앤비든 상관없다. 숙소에 머무는 여행, 그것이 호캉스다. 호캉스라는 말 대신 스테이케이션이라는 근사한 말을 쓰고 싶지만 어쩐지 입에 붙는 건 호캉스다.
내가 찾은 곳은 올해 2월에 문을 연 ‘누와’라는 곳이다. 영락재, 이화루애 등을 디자인한 지랩이 만든 공간이다. 누와는 고즈넉하고 소박한 한옥집이다. 나는 그곳에서 하룻밤 묵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예약이 연말까지 꽉 차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몇 시간만이라도 머물고 싶어서 지랩 측에 양해를 구했다. 덕분에 체크아웃과 체크인 사이 두 시간을 머물렀다. 그중 30분 동안은 지랩의 이상묵 크리에이티브 매니저에게 공간 설명을 들었다.
누와는 외진 곳에 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5분 정도 도로를 따라 쭉 올라간 뒤, 거미줄 같이 뻗은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골목을 빠져나와 또 다른 골목으로 들어가기를 몇 번을 반복하면 작은 한옥집이 나온다. 그곳이 누와다.
누와는 최대 2인이 묵을 수 있는 숙소다. 아주 작은 마당이 있으며, 별도의 방이 없는 원룸 독채다. 대문 밖에서부터 이어진 네모난 돌을 밟다 보면 어느새 마당 안까지 들어오게 된다. 디딤돌과 자갈은 골목의 분위기와 확실히 달라 외부와 단절되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돌 하나, 벽 하나를 보며 의도를 유추해보는 일은 꽤 재미있다.
이곳은 분명 한옥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옥과는 조금 다르다. 창문만 봐도 알 수 있다. ‘서촌의 풍류를 즐기다’라는 글귀가 통유리창에 적혀있다. 한옥과 통유리라니, 쉽게 보기 힘든 조합이다.
지랩이 만든 영락재나 다른 한옥과도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이유는 정부의 지원금과 관련이 있단다.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전통한옥에 대한 규정을 따라야 하는데 특정한 모양의 창을 써야 한다거나 통유리를 쓸 수 없다는 것처럼. 그래서 한옥은 비슷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 그럼 누와는 지원금 없이 지어서 이렇게 다른걸까? 그렇다.
현관문에서 본 누와는 대략 ‘┏’ 이런 형태다. 위 사진은 대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면 보이는 뷰다. 홈페이지에도 이 공간이 메인 이미지로 멋있게 나와 있는데, ‘인스타그래머블’한 공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웹사이트 사진을 따라 많이 찍는다는데, 궁금하면 한 번 구경해보자. 재밌는 건 이 창문은 창덕궁에도 사용된 만월창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것일 뿐, 포토스팟으로 만들 의도는 없었다는 거다. 포토그래퍼가 사진을 너무 잘 찍었고, 모델의 분위기가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던 거지.
통유리에 쓰인 ‘서촌의 풍류를 즐기다’라는 말은 괜히 멋있어 보이려고 적힌 말이 아니다. 풍류라는 단어는 누와의 성격을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말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누와의 뜻을 설명하면 좋겠다.
누하동의 누, 와유의 와를 따서 지은 말인데, 누하동은 이 숙소가 있는 위치를 말하고 와유는 누워서 논다는 뜻이다. 조선의 양반들이 세상을 여행할 만한 힘도 없고 여유가 없을 때 산수화를 펼쳐놓고 감상하는 여가를 와유라고 했는데,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나? 해외여행 갈 시간은 안되니 가까운 호텔을 가는 것, 호캉스랑 비슷하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보자.
신발을 벗고 들어가면 긴 테이블이 보인다. 그 옆에는 주춧돌이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이 보인다. 실내에 들어왔지만 실외에 있는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바닥은 나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확실히 전통한옥과는 다르다. 그리고 오른쪽 끝에 있는 저곳, 저기가 바로 하이라이트 공간이다.
욕조다. 욕조가 거실 한 가운데에 있다. 그것도 테이블 바로 옆에. 이 독특한 위치 선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이것 역시 조선시대 양반들의 호캉스와 관련이 있다. 지금은 여가의 종류가 다양하지만 그때는 계곡 옆에 앉아서 술 마시는 것 말고 딱히 없으니까. 양양에서 서핑을 할 수도, 월미도에서 바이킹을 탈 수도 없을 테니. 그러니 계곡에서 술 마시고, 시 쓰고, 붓글씨 쓰고, 그림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테이블 바로 옆에 욕조가 있는 이유도 물과 술이 함께하는 그런 분위기를 보여주는 거다.
그러니 물을 조금 틀어놔도 좋을 것 같다. 욕조에 몸을 담그지 않아도 괜찮다.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이것이 조선의 풍류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전에 디에디트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던 워터프루프북이 비치되어있었다. 소설 <해가 지는 곳으로>는 아직 읽어 본 적 없어서 추천은 못 하겠다. 다만 소설은 사람 취향을 많이 타니 웬만하면 집에서 가져가도록 하자. 그리고 가져온 책마저 실패한다면, 그때 이 책을 읽어도 늦지 않을 거다. 이거 말고도 책이 더 있긴 한데…
여기 두 권이다. 침실 옆에 있는 책꽂이인데, <니체의 말II> 그리고 <걷기예찬>이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걸을 정도로 걷는 거 좋아하고, 철학과를 나올 정도로 철학을 좋아하지만 호캉스를 보내며 읽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든다. 책을 안 읽으면 어때.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해도 된다. 뭐 어때. 양반들도 멀리 휴양을 못 가니까 산수화 보면서 좋아했다고 하지 않나. 그거나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보는 거나 비슷하다. 단, 본인이 디지털 중독이라 의심된다면 내가 쓴 디지털 중독기를 읽어보면 좋겠다.
책꽂이 바로 옆에는 침대가 있다. 침실이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는 벽으로 나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한번 말했듯 여기는 원룸이다. 화장실을 제외하고는 벽으로 구분되어있는 공간은 없다. 대신 침대 바닥을 보면 목재로 한 칸을 쌓아 올려 공간을 구분했고, 그 위로는 삼베 커튼이 있다.
삼베는 커튼 말고도 다른 가구의 재료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게 침대 오른쪽에 놓인 병풍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거실에 있는 찬장 가림막으로도 사용되었다. 보통은 유리나 나무가 사용될 텐데 삼베라니, 특이하다.
찬장은 현관문을 열고 처음 마주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만약 유리였다면 이곳의 첫인상이 차가웠겠지. 그렇다고 가림막이 아예 없었다면 심심하게 느꼈을 것이고.
삼베 덕분에 찬장 안이 보일 듯 말듯 신비롭게 느껴졌다. 말이 나온 김에 찬장 안쪽을 더 둘러보자. 드르륵. 찬장 속은 이렇게 세팅되어있다.
술잔, 물컵, 주전자 그리고 스피커도 여기에 있다. 그 아래에 서랍이 보이니 한번 열어보자.
이건 사루비아 다방의 분홍반지라는 티다. 저기 별사탕처럼 보이는 건 진짜 별사탕이고, 나머지는 말린 히비스커스, 블루베리, 체리 등이다. 난 숙박객이 아니라 구경만 하고 가는 손님이라 맛을 볼 수 없었는데, 되게 맛있어 보였다. 나중에 대표님에게 직원 능률 향상 차원에서 사달라고 말해야겠다.
숙소에 가면 젠가나 할리갈리 같은 보드게임을 쉽게 보는데, 공기는 처음이다. 이것 역시 지나가는 손님이라 손도 대지 못했다. 직원 복지 차원에서 대표님께 사달라고 건의할까 생각 중이다. 그 외에도 서랍장에는 내가 갖고 싶은 물건들이 참 많았다.
공간도 공간이지만, 작은 소품들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누와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 대부분 누와를 위해 맞춤 제작을 하거나 다른 브랜드와 콜라보하여 만든 제품들이라고 하더라. 위에 잔은 오선주 작가가 졸업 작품으로 선보인 찻잔이다.
두 개의 흰 가운은 삽이라는 브랜드와 협업해서 만들었고, 그 왼쪽의 옷걸이는 직접 제작했다. 이외에도 놋그릇을 뚫어 세면대를 만드는 등 숙소 하나를 만들기 위해 쏟은 정성이 그득해보였다.
그렇다면 화장실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한옥스러움이 담겨있을지 궁금하다.
화장실도 거실과 비슷한 그레이톤이다. 특별히 튀는 부분 없이 정갈해보였다. 한국적인 소품이 많은 거실과 반대로 욕실에는 이솝의 제품이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7평 밖에 안되는 공간임에도 정성스러운 디테일 여기저기 가득했다. 2시간은 여기를 꼼꼼히 살피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더 있고 싶은데, 참 아쉽다. 눈 오는 겨울의 한옥도 좋으니, 지금이라도 예약을 해놔야겠다.
아, 참고로 냉장고에는 복순도가 한 병이 들어있었다. 가격은 만 원이다. 엄청 맛있으니 꼭 먹어보도록 하자. ‘막걸리가 맛있어 봤자 얼마나 맛있겠어’라는 의심이 든다면, 경복궁역 근처에 있는 서촌차고에서 무료시음이 가능하니 방문해보자.
숙박객에게는 슬리퍼 대신 고무신이 제공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고무신을 본 기억은 없다. 생애 첫 고무신 구경인 것 같다. 고무신이 이렇게 귀여운 신발이었나.
툇마루 같은 곳에 앉아 나는 ‘240mm? 사이즈가 안 맞으면 어쩌지’ 같은 엉뚱한 생각을 했다. 말하면 바꿔주려나.
방명록도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슬쩍 내용을 읽어봤다. 다음엔 부모님과 오고 싶다, 혼자 왔다가 힐링하고 간다 등. 좋은 말들 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좋은 공간이니까.
여기까지 읽었을 때 중요한 뭔가가 없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나. 응, 맞다. 여기는 TV가 없다. 대신 스피커에서 노래가 흐르고, 욕조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대충 분위기가 그려지겠지? 그게 바로 누와가 당신에게 주고 싶은 풍류다. 우리에겐 너무 많은 소란이 있어 조금은 그 소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필요가 있다.
바캉스의 어원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라는 라틴어에서 왔다고 한다. 채워지지 않고 비어있는 분위기가 누와와 걸맞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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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