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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찮게 만들어줘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게 힙스터의 일이라면, 힙스터의 유행을 좇는 것이 나의 몫. 장난감 같은 일회용 카메라의 유행이 슬그머니 다시 돌아왔다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게 힙스터의 일이라면, 힙스터의 유행을 좇는 것이 나의 몫.…

2017. 09. 25

유행을 따르지 않는 게 힙스터의 일이라면, 힙스터의 유행을 좇는 것이 나의 몫. 장난감 같은 일회용 카메라의 유행이 슬그머니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들 주머니 속에 어지간한 똑딱이 카메라 맞먹는 폰카메라를 품고 다니는 이 시대에 말이다. 아이러니하지. 그치만 우리는 이런 아이러니를 사랑하는걸.

얼마 전에 에디터M이 ‘구닥’이라는 앱을 리뷰했다. 이상한 카메라 앱이었다. 24장의 사진을 찍고 나면 꼬박 72시간을 기다려야 사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사진엔 우연을 가장한 빛샘 효과가 피사체를 희뿌옇게 가리고 있더라. 기다림, 귀찮음, 불편함. 온통 서먹한 사용자 경험으로 가득 차 있건만 사람들은 이 앱에 열광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한 없이 기다리던 그때의 불편함을 동경하는 것처럼.

[이건 필카 느낌으로 보정한 아이폰 사진]

후지필름의 퀵스냅이다. 27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이렇게 작지만 꽤 강력한 플래시도 품고 있고, 감도는 400. 

[이건 필카 느낌으로 보정한 아이폰 사진]

일회용 카메라를 쓰는 건 5년 만의 일이다. 여전히 장난감처럼 가볍다. 셔터를 누를 때도 싱겁다. 아주 가볍게 딸깍. 스마트폰 카메라의 가상 셔터를 누르는 것보다 더 가짜같이 느껴질 정도다.

일회용 카메라의 ‘참 맛’은 한 장을 찍은 뒤 엄지손가락으로 레버를 돌리는 순간이다. 셔터 누르는 소리는 맥 빠지지만, 또르르 또르르 손끝으로 필름을 감는 느낌은 그렇게 좋더라. 점점 필름 카운터 숫자가 줄어드는 걸 보면, 셔터 한 번이 한 번의 기회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오래 잊고 있던 감각이다. 셔터 한 번이, 필름 한 장이 소중하다고 느껴본 건 아주 오래전 일이니까.

[이건 필카 느낌으로 보정한 아이폰 사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부지런히 사진을 인화해왔다. 캡션이 없는 건 모두 후지필름 퀵스냅으로 촬영한 필름 사진이다. 요즘엔 필름을 인화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은데, 다행히 사무실 근처에 필름 인화와 스캔까지 해주는 곳이 있었다. 결과는 기대 이상.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뭐야? 되게 좋네?

5년 전에 샀던 일회용 카메라는 엉망으로 찍혔다. 24장이었나, 한 롤을 다 찍었지만 사진관에서 “나머진 도저히 인화할 수 없었다”며 10장 남짓만 인화해줬던 기억이 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브랜드에서, 언제 만들었을지 알 수 없는 제품을 샀기 때문일까. 그때와는 너무 다르다. 이번엔 성공이다. 만 오 천 원쯤 하는 일회용 카메라로 이렇게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니.

[이건 필카 느낌으로 보정한 아이폰 사진]

맥주 두 캔과 27장의 필름을 품은 일회용 카메라를 들고 공원에 갔다. 16년 지기 친구와 시시덕댔다. 우리의 화제는 늘 똑같다. 우린 왜 가난할까, 남자란 뭘까, 인생이란 뭘까. 서로 깔깔 거리면서 사진을 찍어줬는데 아무래도 친구보단 내 사진 실력이 월등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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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인화된 사진을 보며, 넌 왜 나를 이렇게 못난이처럼 찍어놨냐고 거센 비난을 퍼부었다. 친구는 그게 모델 탓이라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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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소풍오면서도 곱게 머리를 말고 온 친구의 옆태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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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얼굴이 쑥스럽다고 했는데, 예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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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카메라도 괜찮은 걸 쓰면 주광에선 꽤 좋은 사진을 찍어주는구나. 항상 필터를 입혀서 만들어 내려고 하는 ‘필름 카메라의 느낌’이 숨길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묻어난다. 해 질 무렵에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빛이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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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초점이 원하는 곳에 맞지 않고, 그림자가 지나치게 어둡게 나오거나, 필름 가장자리로 갈수록 상이 겹쳐 보이는 현상이 있지만 그것조차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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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수로 내 손가락이 렌즈를 가려버렸다. 이 우연도 꽤 멋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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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마다 다른 필터를 입힌 것처럼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 매력적이다. 이건 아마 내가 카메라를 다루는데 서툴러서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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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감이 참 다정하다. 오래된 것 같지만 싱그럽고, 이야기가 많아 보인다. 상상의 여지가 훨씬 넓다.

Processed with VSCO with av8 preset
[이건 필카 느낌으로 보정한 아이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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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진짜 필름 사진이다]

위의 사진은 아이폰으로 촬영한 사진이고, 아래쪽 사진이 일회용 카메라로 촬영한 사진이다. 필름 카메라의 느낌에 푹 빠져서 아이폰 사진도 비슷한 감성으로 보정해보았다. 비슷한 듯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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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소풍이었다. 27장을 다 찍고 나니 맥주가 모자랐다. 제 일을 다한 일회용 카메라를 챙겨들고 소주를 마시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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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성격이 급한 편이다. 건널목에 서서 신호가 바뀌지 않는다고 분개하며, 엘리베이터를 놓쳤다고 발을 동동 구른다. 기다리는 건 아무리 경험해도 쉽지 않다. 그런데 있지, 사진관에 맡긴 필름이 인화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괜히 좋았다. 물론 “오늘 안에 인화 되나요?”라고 물어본 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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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난 필름 카메라 뽐뿌를 받았다. 사실 필름 카메라를 산다고 해도 당장은 사진 찍으러 다닐 시간이 없을 것이다. 내 카메라는 먼지 쌓인 채 기약 없는 소풍날만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히 갖고 싶다. 물건을 구입하는 데는 쓸모 이상의 의미가 있는 법이니까. 필카를 손에 쥐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한 장 한 장 남은 필름을 헤아려가며 사진을 찍는 감각이 마음에 드는걸.

가끔은 나를 이렇게, 귀찮게 만들어줘. 기다리게 만들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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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