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H다이어리] 연애를 연애답게

지나간 연애를 떠올리면 동화책을 펼쳐보는 기분이다
지나간 연애를 떠올리면 동화책을 펼쳐보는 기분이다

2017. 05. 10

H 다이어리
날짜 : 2017년 5월 9일
날씨 : 흐리고 때때로 비

지나간 연애를 떠올리면 동화책을 펼쳐보는 기분이다. 그렇다. 평화의 시절이었다. 오빤 정말 개자식이야, 우리 헤어져, 이런 클리셰를 주고받으며 드라마틱하게 싸웠던 기억은 거의 없다.

“신기하다, 어쩜 그렇게 애인이랑 안 싸우지?”

예전에 M이 내게 했던 말이다. 나 역시 되묻고 싶다. 그렇게 싸울 거면 왜 만나는 거야? 이해하기 어렵다. 사랑하자고 만난 사람을 물고 뜯고 할퀴며 감정 소모를 하는 행태를. 낮에는 죽으라고 저주했어도 새벽 두 시쯤엔 전화기 붙잡고 눈물 흘리며 화해할 거 다 알고 있는데. 그 과정을 즐기는 취향이 아니라면 싸움은 연애의 섹시함을 갉아먹는 요소인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다들 생각하겠지. 아, 이 여자는 되게 유순한 성격인가보다. 아니다. 스스로의 성격에 대해 말하는 건 거북한 일이지만, 한 가지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격정적인 성격이다. 화가 많고, 눈물이 잦으며, 쉽게 사랑하고, 쉽게 미워한다. 연애하기 피곤한 성격에 대해 설문조사를 한다면 1위에 뽑힐 자신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막상 연애라는 전골 요리의 뚜껑을 열어보니 내 요리는 그렇게 간이 세지 않았다. 몇 년을 보글보글 끓여도 크게 짜거나 매워지는 일이 없었다. 싸움을 위해 완벽하게 세팅된 것 같은 상황을 만나도 날을 세우고 덤벼들지 않았다. 그냥 무던하게 넘어갔다. 연애 중인 내 모습은 낯설었다(물론 첫 연애는 예외다. 그건 완벽하게 완벽하게 실패한 요리였다).

뭐였을까. 내 뾰족함이 연애에 있어서만은 둥글게 마모됐던 이유가. 수많은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넌 참 좋은 남자였지. 우리 사이엔 나쁜 말이 오갈 틈이 없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를 어린애처럼 대했으니까. 나는 충분히 행복했기 때문에 안온한 연애 안에서 더더욱 무뎌졌다.

싸우지 않는 연애. 듣기에는 굉장히 이상적이다. 나는 연인에게 많은 ‘기대’를 품지 않았다. 이건 좋은 걸까. 글쎄, 잘 모르겠다. 이상할 만큼 당신들에게 기대하는 게 없었다. 나로 인해서 당신이 바뀔 것이라는 기대가 없으니 화가 날 일도 좀처럼 없었다. 왜 그랬을까. 보답받지 못할 마음을 품지 말자는 방어기제였을까. 어쩌면 내가 굉장히 쿨한 여자라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 번도 서로를 상처준 적 없었던 연애는 갑자기 끝났다. 어느 날 문득 냄비 뚜껑을 열어봤을 때, 내 전골요리는 국물이 모두 졸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한 번도 짜다고 생각한 일이 없는데. 그렇게 끝나 있었다.

기대가 없다는 건 쿨하지만 서글픈 일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화가 많았다. 하지만 내가 화를 낸다고 달라지는 일은 거의 없었고, 내 뜨거움은 늘 나를 힘들게 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기대를 버리기 위해 노력해왔다.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내 기대가 어긋났을 때 오는 비참함과 마주하고 싶지도 않았고.

장황하게 고백한 나의 중2병 증상은 비단 연애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이 세상 모든 일은 사랑과 닮았으니까. 나는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꼬꼬마들에게 분개하면서도 나라를 뒤흔드는 부조리에는 입을 다물었다. 내가 목소리를 높인다고 뭐가 바뀔 것 같진 않았거든. 세상 돌아가는 꼴은 원래 구린거니까. 기대를 말아야지.

그리고 지독한 시절이 지났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참을 수 없이 침통해졌다. 어쩌면 나는 지나간 어떤 순간에 따져 물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왜 나를 위해서 바뀌지 않는 거냐고. 한 번이라도 목소리를 높여서 울면서 설득해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내 마음이 동나기 전에. 아무것도 따져 물을 수 없을 만큼 형편없는 사이가 되기 전에. 실망할 줄을 알면서도 기대해 봐야 했던 게 아닐까.

어제 저녁, 미세먼지 가득한 퇴근길에 에디터M에게 연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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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내일 샴페인 터트리자. 좀 비싼 걸로. 응? 이유? 샴페인에는 용도 같은 건 없고, 마개를 따야 할 때가 있는거래. 아니, 헛소리가 아니고 하루키 소설에서 읽었어.”

2017년 5월 9일 밤, 우리는 주제 넘은 가격의 샴페인을 마시며 벌건 얼굴로 재잘댔다.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숫자의 향연을 지켜보면서. 어쩌면 실망할 지도 몰라. 하지만 한 번도 싸우지 않는 연애는 더이상 할 수 없어. 마음껏 기대하고, 결국엔 실망해도 제대로 말하고 싶어. 이번에는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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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