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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한 철만 사랑해 줄 건가요

짧아서 더 아름다운 봄. 소담하게 피어났던 벚꽃은 지난 주말 활짝 폈다가 어제 내린 봄비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아직 벚꽃이 만개했던 지난...
짧아서 더 아름다운 봄. 소담하게 피어났던 벚꽃은 지난 주말 활짝 폈다가 어제…

2017. 04. 18

짧아서 더 아름다운 봄. 소담하게 피어났던 벚꽃은 지난 주말 활짝 폈다가 어제 내린 봄비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아직 벚꽃이 만개했던 지난 주, 에디터H와 나 그리고 우리의 늘씬한 영상 요정과 함께 올림픽 공원으로 놀러나갔다.

Processed with VSCO with ke1 preset[에디터H의 나쁜 손]

촬영을 가장한 피크닉. 적당히 준비하려고 했는데, 에디터H가 세상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바보야, 피크닉의 핵심은 음식이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준비해야 하는거라고.” 그래서 치킨에 샌드위치 그리고 김밥까지 준비했다. 한(韓) 미(美) 가 만난 아주 조화로운 고칼로리 메뉴였지.

Processed with VSCO with fp8 preset[쉑쉑의 추억. 사무실 근처에 생겨서 내일도 먹을 예정. 그땐 꼭 맥주랑 먹어야지]

그런데 여기에 빠지면 곤란한 게 뭐? 바로 맥주다. 이 맥주와의 첫 만남은 쉑쉑버거 청담점에서였다. 쉑쉑에서 맥주를 팔길래 당연히 외국 맥주이겠거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약간 호기심이 동하긴 했지만 참기로 했다. 아직 근무 중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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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앤몰트(The Hand and Malt)는 2014년 남양주에 둥지를 틀고 크래프트 맥주를 만들어왔다. 이곳은 국내 최초로 크래프트 맥주를 캔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덕분에 피크닉가는 우리도, 야밤에 혼술하는 나도 언제 어디서나 쉽게 마실 수 있다. 특히 한지를 이용한 라벨이 인상적인데, 한국적인 느낌을 살리면서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뉴욕 브룩클린에서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14713692_1164186276950853_3207574752877841691_n[고명처럼 올라간 생홉. 이렇게 아름답게 생긴 열매였다니]

재료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인다. 가장 재미있는 점은 우리나라에서 직접 재배한 홉을 사용했다는 거다. 가을이면 핸드앤몰트에서는 방금 수확한 생홉을 넣은 Harvest IPA를 맛볼 수 있다. 이곳은 아마 한국에서 가장 신선한 IPA를 맛볼 수 있는 곳이겠지.

자, 그럼 이제 먹고 마셔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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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준비한 맥주는 핸드앤몰트의 슬로우 IPA와 모카 스타우트 그리고 애플 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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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우 IPA는 4.6%로 비교적 도수가 낮아 술이 약한 나도 편하게 마실 수 있는 IPA다. 이름에 슬로우가 들어간 이유는 홉을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맥주에 스며들게 해서다. 이를 통해 IPA 특유의 혀 안쪽을 오그라들게 하는 쓴맛은 줄였고, 대신 달콤하고 향긋한 열대과일의 풍미가 파도처럼 몰아친다. 이건 한여름에 마셔도 충분히 청량하게 즐길 수 있는 IP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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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애플 사이더. 요즘 크래프트 맥주에 질린 엉덩이가 가벼운 힙스터들은 사이더로 입맛을 돌리고 있다. 사과를 발효한 사이더는(cider) 우리나라 7성사이다 때문에 달콤하거나 혹은 사과주스로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잘 만든 사이더는 새콤한 맛이 나는 샴페인에 가깝다. 더운 여름 사이더 한 잔이면 침샘이 자극되어 집나간 입맛이 돌아오게 하는 재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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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앤몰트가 글리텐프리의 천연 사과로 양조한 이 애플 사이더는 굉장히 개성이 강한 편이다. 사과의 향긋함과 날듯 말 듯 은은하게 도는 단맛, 여기에 입맛을 자극하는 새콤함까지! 치킨처럼 기름진 음식과 궁합이 환상이다. 500ml로 양도 넉넉한 이 애플 사이더 하나면, 1인 1닭은 순식간일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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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지막, 모카 스타우트는 굉장히 점잖은 캐릭터 였다. 내가 요즘 <윤식당>에 좀 빠져있는데, 여기서 신구같은 캐릭터랄까? 연륜이 느껴지는 풍부한 맥아의 맛에 깊은 커피향, 그리고 벨벳처럼 입안을 감싸는 바디감과 달콤함까지. 근사하고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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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은 짱짱하고, 바람은 살랑살랑거리며 벚꽃을 흔드는, 올해 들어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다. 올봄, 꽃을 지겹도록 봤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나에게 꽃은 나무의 생식기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다 졌다고 하니 좀 아쉽다. 역시 세상 모든 일은 지나가고 난 뒤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 법인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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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