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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마시는 사케 좋아해요?

새해엔 술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게 목표다. 좋은 술, 나쁜 술, 이상한 술 편식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셔봐야지. 그런 의미에서 신년...
새해엔 술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게 목표다. 좋은 술, 나쁜 술, 이상한 술…

2017. 01. 13

새해엔 술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게 목표다. 좋은 술, 나쁜 술, 이상한 술 편식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셔봐야지. 그런 의미에서 신년 첫 번째 술 리뷰는 추운 겨울에 따끈하게 데워 마시면 참 좋은 사케로 골라봤다.

“사케는 너무 어려워”

Processed with VSCO with c4 preset[와인과는 차원이 다른 라벨의 난해함]

사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아니 별 다른 기억이 없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누가 나에게 ‘사케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할말이 없어진다. 한 번도 ‘어떤 사케를 마시고 있다’라고 인지하면서 마셔본 일이 없는걸. 내가 구분하는 건, 우유팩에 들어있는 것과 병에 들어있다는 것 정도일까? 대부분 그날 기분과 자금사정(이라 쓰고 ‘오늘 술값을 누가 내는지’라고 읽는다)에 따라 내키는 대로 마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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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알못(사케 알지 못하는)’ 이력은 이쯤 하기로 하자. 이런 내가 사케를, 그것도 새해 첫 번째 술로 리뷰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다.

“라벨을 또박또박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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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리뷰할 사케는 ‘니혼사카리 나마겐슈 다이긴죠(파란캔)’‘니혼사카리 나마겐슈 혼죠죠(흰캔)’ 이렇게 두 가지. 역시 길고 어려운 이름이다. 이제부터 이 두 녀석을 ‘캔사케’로 통칭하고 파란캔과 흰캔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사케는 와인처럼 라벨만 잘 읽으면, 마시기 전에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일본어라 쉽게 외워지지 않는다는 건데. 몇 가지 원칙만 알면 그래도 길이 보인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또박또박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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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니혼사카리(日本盛)는 일본의 사케 회사 이름이다. 부드러운 맛을 추구하는 대표적인 청주 브랜드로, 일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큰 회사다. 부드러우면서도 깔끔하게 넘어가는 뒷맛이 이 브랜드의 특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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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겐슈는 나마사케(생주生酒)와 겐슈(원주原酒)가 합쳐진 말이다.

가장 맛있는 술은 이제 막 숙성을 모두 마친 술을 그 자리에서 꺼내 마시는 거다. 대부분의 사케는 병이나 팩에 담기 전에 저온가열살균 과정을 거친다. 보관과 유통이 쉽도록 효모와 미생물을 제거하는 과정이다. 이때 어쩔 수 없이 술의 살아있는(生) 맛은 죽게 된다. 이런 처리를 하지 않은 것이 바로 나마사케(생주生酒)다. 병에 담긴 맥주나 막걸리와 ‘생’맥주, ‘생’막걸리의 맛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Processed with VSCO with c4 preset[뚜껑에도 라벨에도 아주 크게 적혀있는 生! 역시 자랑은 크고 강하게!]

열처리를 하지 않은 술의 경우, 어두운 색깔의 천이나 박스에 넣어 냉장보관을 해야하고, 그렇다고 해도 유통기한이 매우 짧다. 생막걸리의 경우 유통기한이 고작 10일 내외 정도다. 그런데 캔에 나마사케를 담으니 전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온에서 유통과 보관이 가능해짐은 물론, 유통기한도 길어졌다. 캔에 담긴 이 나마사케는 상온 보관시 약 12개월 까지는 최적의 맛을 느낄 수 있고. 만약 이 기간이 지난다고 해도 그 이후부턴 숙성된 맛을 즐길 수 있단다. 단순히 휴대성을 위한 것인줄 알았는데, 맛도 생각한 거였다니. 캔, 너 좀 하는데?

겐슈(원주原酒)는 알콜도수를 조절하기 위해 물을 섞지 않은 술을 말한다. 이 캔사케의 알코올 도수는 파란색이 18.5도, 흰색이 19.5도다. 소주보다 2도에서 3도 정도 높다. 그런데 마셔보면 그 도수를 전혀 느낄 수 없다. 물을 섞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시다보면 어느새 취하는 완벽한 앉은뱅이 술이다. 처음 이 캔사케를 만났던 날, 도수도 모르고 꿀꺽꿀꺽 마시던 에디터H는 그날 정말로 ‘마더 파더 후아유’로 취했었지. 어휴 창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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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캔은 다이긴죠. 흰캔은 혼죠죠다. 사케는 쌀을 얼마나 깎아내는냐(이것을 정미율이라고 한다)에 따라 등급을 나눈다. 사케는 쌀 속 전분에 누룩을 더해 포도당으로 변환시켜 만드는 술이다. 주재료인 전분은 쌀의 눈에 집중되어 있다. 많이 깎아내서 순수한 전분만을 사용할 수록(원가는 올라가고) 고급스러운 깔끔한 맛을 낸다.

사케는 정미율에 따라 4가지 등급으로 나눈다. 쌀을 반 이상(50%) 깎아내고 만든 것이 다이긴죠, 50에서 60% 남긴 것은 긴죠, 60에서 70% 남긴 것을 혼죠죠라고 한다. 70% 넘게 남기면 일반주다. 당연히 멀쩡한 쌀을 반 이상 버린 다이긴죠가 가장 높은 등급이지만, 꼭 높은 등급이라고 모든 사케가 좋은 건 아니다. 모두 다 취향의 문제다. 오늘 마실 파란캔은 쌀을 반 이상 깎아내고 만든 다이긴죠, 흰캔은 60에서 70% 정도 깎아낸 혼죠죠다.

“너 캔커피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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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바닥만 한 캔에 들어있는 사케라니. 이건 누가 뭐래도 혼술용이다. 일본 현지에서도 유일한 캔사케란다. 200ml의 아담한 사이즈는 딱 도쿠리에 넣으면 좋을 용량이다. 작고 가벼워서 캠핑이나 야외에 가지고 다니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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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의 입구는 ‘쵸코’라고 불리는 사기잔과 비슷한 크기라 사실 잔이 없이 입안에 톡 털어 넣기 좋고, 사케의 풍부한 향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집에 남은 몇 캔을 열혈 조기축구 회원인 아버지께 챙겨드렸더니, 그날 조기축구의 MVP로 등극되었다는 건 비밀. 실제로도 이 캔사케가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이 바로 유명 골프장이란다.

“혼술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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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격적으로 마셔볼까. 이불 밖은 넘나 위험한 것. 요즘처럼 추운 날엔 전기장판을 틀고, 뒹굴뒹굴 만화책이나 보는 게 최고다. 차갑게, 상온에서, 또는 뜨끈하게. 사케는 제품마다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온도가 정해져 있다. 19.5도로 도수가 높은 흰캔은 상온이나 차갑게 마셔도 좋지만, 뜨끈하게 데워서 마시는 것을 추천한다. 캔이라 데우는 것도 쉽다. 냄비에 물을 끓이고, 캔을 물 안에 넣으면 쉽게 중탕할 수 있다. 데운 캔은 도쿠리에 잘 따른다. 사기잔인 쵸코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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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맛이 있긴하만, 전반적으로 드라이하다. 혀를 감싸는 미묘한 단맛과 달리 코로 알콜향이 톡 하고 올라온다. 뒤끝 없는 술맛이다. 19.5도라는 도수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부드럽다. 뜨끈하게 데워마시면 목을 타고 알콜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온몸에 퍼지면서 이내 달뜬 몸이 된다. 아, 이맛에 겨울에 사케를 마셨었지. 몸도 마음도 노곤노곤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용서 할 수 있을 것 같은 너그러운 기분. ‘나는 지금 몹시 관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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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파란캔. 다이긴죠는 데워서 먹기 보다는 차갑게 마시거나 상온으로 마셔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투명한 잔에 따르니 희미한 미색을 띤다. 흰캔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들큰한 맛이다. 곡주 특유의 풍미와 꽃향기까지 벨벳처럼 부드럽게 깔린다. 화사한 술이다. 흰캔이 남성적인 맛이라면, 파란캔은 여성적인 느낌. 암수 정답다. 사케도 짝이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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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단독으로 마셔도 충분하지만, 짭짤한 치즈와 함께 마셔도 궁합이 좋다. 단짠단짠은 진리니까. 꼭 와인만 치즈랑 먹으라는 법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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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럿이서 시끌벅적하게 마시는 술도 좋지만, 요즘은 어두운 방 스탠드 조명에 의지해 마시는 술이 더 좋다. 소복소복 소리도 없이 쌓이는 눈을 보면서 따끈하게 데운 사케를 먹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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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가격을 이야기해 보자. 가격은 두 캔 모두 7,000원대. 타고난 호갱인지라 가성비란 말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혼술은 다르다. 기분 내킬 때마다 조용히 음미할 수 있는 혼술은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쉽게 손이 가는 게 좋다. 이자카야에서나 마시던 고급 사케를 부담 없는 가격과 용량으로 즐길 수 있다니. 캔사케, 넌 좋은 혼술 메이트였다. 조만간 가까운 마트에서 이 앙큼한 혼술 메이트를 볼 수 있을 날을 고대해보자. 못 기다리겠다고? 그렇다면, 니혼사케(02-744-9424)로 기별 넣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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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