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겨울 종로 산책, 안국역에서 경복궁역까지

안녕, 종로 산책을 좋아하는 객원 필자 김정현이다. 종로는 재밌는 동네다. 고궁과 대기업 빌딩과 개성 있는 소규모 상점이 한눈에 들어온다. 뻥...
안녕, 종로 산책을 좋아하는 객원 필자 김정현이다. 종로는 재밌는 동네다. 고궁과 대기업…

2022. 02. 02

안녕, 종로 산책을 좋아하는 객원 필자 김정현이다. 종로는 재밌는 동네다. 고궁과 대기업 빌딩과 개성 있는 소규모 상점이 한눈에 들어온다. 뻥 뚫린 대로변을 조금만 걷다 보면 이내 좁은 골목이 나타나고, 동네 토박이들과 핫 플레이스를 찾아온 외지인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그 사이를 혼자 거닐다 보면 어쩐지 독립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도시의 고독을 즐기며 하염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말하자면 홍상수 영화 캐릭터 느낌?

오늘은 종로구 안에서도 지하철 3호선 안국역부터 경복궁역까지의 산책 여정을 소개한다. 오전 일찍 나와 커피를 마시고, 걷다가 들어간 식당에서 뜨뜻한 라멘을 먹고, 광화문을 지나 작은 소품숍을 구경하고, 마지막으로 서점에 들러 책 구경으로 마무리하는 코스. 주인공은 커녕 엑스트라도 못 해봤으면서 추운 날씨에 참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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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페 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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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역 4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걷다 보면 종로소방서 옆으로 높이 솟은 빌딩이 하나 보인다. ‘카페 텅’은 이 빌딩 7층에 위치한다. 7층에 있는 카페라니. 엘리베이터에 탈 때부터 품게 되는 기대감은 문이 열리면 곧장 탄성으로 바뀐다. 전면부 통창 너머 현대 빌딩과 아라리오뮤지엄, 그 옆으로는 창덕궁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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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와 사색은 도시와 멀리 떨어진 자연 속에서만 가능한 걸까? ‘다정한 공터’라는 말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이곳에 와보면 멀리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딱 한 발짝만 떨어져서 도시를 바라보면, 새로운 생각과 감정들이 차오르는 환기의 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복잡다단한 도시 한 가운데의 여백처럼 느껴지는 카페 텅에서 나는 오랜 세월을 지나온 고궁을, 늘 같은 자리에서 말 없는 변화를 일구는 인왕산을, 바쁘게 이동하는 직장인들과 게이트볼을 치며 소소한 오전을 보내는 노인들을 관조했다. 단지 시선과 거리의 차이만으로, 몸을 데워주는 따뜻한 커피 한 모금만으로 익숙했던 풍경이 낯설게 보일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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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과 괴리되지 않는 인테리어도 좋다. 중고로 구매했다는 나무 가구들이 아늑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는데 어느 하나 튀거나 거슬리는 게 없다. 창밖 풍경에 주인공 자리를 내어주며 반 발짝 물러서 있는 인상이다. 보이는 부분 외에도 친절하고 세심한 직원분들의 서비스 덕에 내내 차분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머무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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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이라는 이름의 음료를 마셨다. 이름도 겉모습도 멋진 이 친구는 장시간 냉침한 호지차에 오트밀크를 넣은 비건 메뉴다. 부담 없이 고소하고 향긋해서 아침 공복에 마시기에 정말 좋다. 커피 밖에 모르는 나지만 왠지 다음에도 호우시절을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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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텅

  • 주소 서울 종로구 율곡로 82 701호
  • 영업시간 매일 10:00-21:00
  • @tung_seoul

restaurant
<도마 유즈라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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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점심을 먹으러 간다. 밖에서 혼자 밥 먹는 걸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다. 스무 살 때부터 혼밥이 일상이었던 나는 그게 더 신기하다. 하지만 혼밥을 할 땐 메뉴 선택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건 혼밥에 익숙해도 어쩔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몇 가지 기준을 놓고 고민한다. 빨리 먹고 나갈 수 있는지, 혼자 먹기에 지나치게 양이 많지 않은지, 가게에 혼밥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등등.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라멘집이다. 1인용 단품이 있고, 나오는 데 오래 걸리지도 않고, 혼자 앉기 좋은 바 자리가 있다. 이 정도면 준수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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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텅이 위치한 건물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다. 현대빌딩을 지나 계동길로 들어가면 왼편으로 다닥다닥 붙은 작은 가게들이 보인다. 바쁘게 눈길을 돌리다 처음 나오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오늘의 혼밥장소 ‘도마 유즈라멘’ 등장.

소고기 전문점 ‘도마’와 함께 공간을 쓰는데 생각보다 넓어서 놀랐다. 경험상 라멘집이라 하면 일본 영화 <심야식당>에 나올 법한 아담한 크기의 가게였던 적이 많았으니까. 감성적인 분위기와는 별개로 비좁고 불편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에 비하면 여기는 아주 쾌적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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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호명처럼 유자(유즈ゆず)가 들어가는 라멘을 전문으로 한다. 유즈라멘 안에서도 유즈시오(소금), 유즈쇼유(간장), 매운유즈시오, 매운유즈쇼유, 유즈츠케맨 총 5가지 선택지가 있다. 처음 방문한 만큼 나는 대표 메뉴인 유즈시오라멘을 주문했다. 진한 국물에 고흥 유자 착즙이 들어가 향긋하고 산뜻하다. 두툼한 이베리코 차슈와 김, 계란, 죽순이 함께 올라가는데, 무엇보다 라멘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루꼴라까지 있어서 풍미가 확 살아난다. 유자에 루꼴라까지, 기름진 걸 잘 못 먹는 분들도 한 번 도전해보시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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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유즈라멘

  • 주소 서울 종로구 북촌로2길 14 유즈라멘
  • 영업시간 매일 11:30-22:00 (브레이크 타임 15:00-17:00)
  • @yuzu_ramen2

지나가는 길엔…
서울공예박물관 & 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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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나와 경복궁 방면으로 쭉 걷는다. 중간에 일부러 서울공예박물관을 통과했다. 작년 7월에 개관한 한국 최초의 공립 공예박물관. 풍문여고 건물을 리모델링한 이곳은 원래 조선 왕가의 저택으로 사용되기도 했을 정도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땅이다. 지금은 ‘예술과 생활을 연결하는 공예의 허브’로 거듭날 예정이라고 하니 또 어떤 문화적 가치가 오랜 세월 축적될지 기대된다. 별 관심 없어도 괜찮다. 오후 볕을 맞는 건물의 아름다움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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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또 봐도 기가 막힌 서울 풍경, 광화문. 도심 한복판에 떡하니 위엄을 드러내는 궁궐의 자태는 그 앞을 두 발로 걸어 지날 때야 진가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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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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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의 묘미는 거리의 상점을 열심히 기웃거리는 데 있다. ‘들어가 볼까?’ 싶은 호기심으로 시작해 뜻밖의 운명적인 물건을 만나 소비까지 저질러버리는 기쁨. 아트 마켓 플레이스 ‘알피’도 우연히 들어가게 된 곳이다. 카페와 서점, 셀렉숍 등 개성 강한 상업 공간으로 가득한 자하문로10길을 걷다가 언젠가 인스타그램에서 본 듯한 간판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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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계단을 올라가면 나오는 작은 공간. 온갖 귀엽고 통통 튀는 수공예 제품들로 가득하다. 고유한 스타일을 가진 작가 혹은 소규모 스튜디오가 직접 제작한 희소성 있는 아이템들을 엄선해 판매한다. 이런 걸 사는 사람도 있구나 싶은 분들도 있겠지만, 이런 걸 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꽤 많다. 이런 걸 사는 사람에는 물론 나도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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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제품 중에서도 알피 디렉터가 직접 만든 그립톡의 인기가 특히 높다. 버려진 유리 타일과 레진 등을 활용해 화려한 꽃을 형상화한 리사이클 제품으로 똑같은 디자인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신기한 아이템들이 많았다. 한창 반지에 관심이 많은 나는 체커보드 패턴의 체스 링 앞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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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피

  • 주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0길 6 2층
  • 영업시간 매일 13:00-19:00
  • @rp.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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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레퍼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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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코스는 서점. 웬만하면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직접 보고 사는 걸 좋아한다. 책을 정말 사랑한다기보다 서점만이 주는 경험을 즐긴다. 매대와 서가를 훑어보고, 표지와 목차를 들춰보다, 끝내 사야겠다는 결심을 안겨주는 책을 만나는 순간, 꼭 구매하지 않더라도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책 사이를 거닐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그 느긋한 순간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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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에 올 때마다 종종 들르는 서점이 효자동에 위치한 ‘더레퍼런스’다. 예술과 전시가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지하 1층과 1층에서는 전시가 열리고, 2층에서는 양질의 예술 서적을 만날 수 있다. 사진집, 소설, 매거진, 독립출판 등 분야는 다양하지만 모두 ‘예술’을 중심으로 한 책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더레퍼런스는 ‘아시아 아트북 플랫폼’으로의 도약을 목표로 아시아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데 힘쓰는 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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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하고 아늑한 서점 내부에 들어서면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 나온다. 전체적으로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인상에 짙은 톤의 나무 가구들이 따뜻한 분위기를 더한다. 공간 면적에 비해 책들을 여유롭게 배치한 게 흥미로운데, 덕분에 책 하나하나가 눈에 잘 들어올 뿐만 아니라 정말 세심하게 고른 책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신뢰감을 느낄 수 있다. 예술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주저없이 방문해보시기를. 사유와 사색에 깊이를 더해줄 좋은 레퍼런스들을 한아름 안고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

더레퍼런스

  • 주소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24길 44
  • 영업시간 화-일 11:00-19:00 (월요일 휴무)
  • @the_reference_seoul
About Author
김정현

라이프스타일 잡지부터 토크 프로그램까지, 분야 안 가리는 프리랜스 콘텐츠 에디터. 멋있는 사람과 흥미로운 콘텐츠를 소개할 때 제일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