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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닉이라 쓰고 낮술이라 읽지요

아직 해가 정수리에 떠있는 한낮. 에디터H와 낮술 작당을 위해 연트럴 파크를 찾았다. 아직 벌건 대낮에 취할 수 있는 권리. 사무실에...
아직 해가 정수리에 떠있는 한낮. 에디터H와 낮술 작당을 위해 연트럴 파크를 찾았다.…

2016. 06. 29

아직 해가 정수리에 떠있는 한낮. 에디터H와 낮술 작당을 위해 연트럴 파크를 찾았다. 아직 벌건 대낮에 취할 수 있는 권리. 사무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직장인들을 비웃으며 맥주를 마시는 패기! 이것이 바로 ‘퇴사의 맛’이다. 피크닉이라 쓰고 낮술이라고 읽는 ‘에디터M의 낮술 시리즈’ 그 영광의 첫 번째 주인공은 요즘 핫한 호가든 삼남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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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깐 나와 에디터H에 대한 소개를 하겠다. 에디터H는 술을 사랑한다. 해가 고개를 떨구기 시작하면 밥집이 아니라 술집을 찾는 여자. 가끔 술을 핑계로 일탈을 꿈꾸는 드링킹 요정이랄까? 반면 나 에디터M은 주량 350cc, 적은 술로 쉽게 취하는 가성비 좋은 여자다. 술을 분해하는 효소가 없어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지. 아무튼 우리의 낮술의 추억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일단 즐겨주시길!


“호가든 삼남매, 누구냐 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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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두가 길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호가든 삼남매를 즐겨보자. 호가든 외길 인생을 걷던 오비맥주가 작년 여름 벨기에에서 호가든 로제, 포비든 프룻, 그랑 크루 이렇게 삼 형제를 입양해 왔다. 호가든과 오랜 연애로 권태기가 찾아온 나로서는 뉴페이스의 등장이 반갑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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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호가든 로제 / 포비든 프룻 / 그랑 크루] 

“새초롬한 여동생: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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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M: 츄릅추릅. 침샘어택.

에디터H: 꽤 상큼하네? 근데 너나 마시렴. 3%면 술 아니지.

첫 타자로 삼남매의 막내 딸 로제를 선택한 나의 혜안에 박수를! 라즈베리의 상큼한 향과 산미, 그리고 달콤함은 식욕을 돋우는 맛이다. 과한 단맛에 대한 우려와는 달리 많이 달지 않아 덥고 습한 날씨에도 꿀꺽꿀꺽 넘어가더라. 알코올 도수 3%, 250mL란 깜찍한 용량은 애주가들의 간에 생채기도 내지 못할만한 스펙이지만, 적당한 산미와 단맛 덕에 술을 잘 못하거나 가볍게 취하고 싶은 여자들에게 추천할만하다.


“반항하는 둘째: 포비든 프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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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M:  이거 위험해. 덮어놓고 마시다간 애미애비도 못 알아볼 듯.

에디터H: 쓰고, 달고, 독하고. 개 좋네! 낮술은 이래야지.

이름이 ‘금단의 열매’란다. 누가 지었는지 상이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아담과 이브가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베어 물 수 밖에 없었던 선악과의 맛이 분명 이랬을 테니. 금단의 열매는 상상했던 것만큼 달콤하긴 했지만, 죄책감같은 쓴맛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달고 쓴 이중적인 맛이다.

아, 내가 도수를 언급했던가? 알코올 도수 8.5%로 덮어놓고 마시다간 어떤 무시무시한 죄를 지을 지 모른다. 여기까지 마시고나니 내 얼굴은 이미 불타는 고구마가 되었다. 평화로운 연트럴 파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아니, 나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뭘 봐. 낮술 먹고 취한 여자 처음봐? 으르렁.


“유전자 몰빵 첫째: 그랑 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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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M: 단 맛이 어때서? 팡팡 터지는 향때문에 행복하기만 합니다

에디터H: 풍미는 좋은데, 단 맛이 겉돌아. 방금 먹던 거 계속 마실래.

호가든 그랑 크루는 벨기에 스트롱 에일 600년의 노하우를 아낌없이 쏟아부은 야심작이다. 밀맥주인 다른 제품과는 달리 보리 맥아를 사용했다. 색도 반투명한 오렌지빛이다. 섬세한 단맛과 쓴맛 여기에 산뜻한 과일향이 어우러져 풍미가 대단하다. 한 마디로 호가든에 IPA의 터치가 더해진 맛이랄까?

하지만 문제는 전반에 감도는 단맛이었다.  입안에서 맴도는 들큰한 맛이 마음에 들었던 나와는 달리, 평소 라거 계열의 깔끔한 맥주를 즐기는 에디터H는 강한 향과 단맛이 어우러지지 않는다는 평을 했다. 그랑 크루 역시 알코올 도수 8.5%로 꽤 높은 편이다. 이미 내 정신은 마더파더 후아유.


“Who is your Mama? 호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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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뿌리를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자매품인 호가든 삼남매를 마셔봤으니 이제 엄마격인 호가든에 대해 알아보자. 호가든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세상에 맥주라고는 하이트와 카스가 전부인줄 알았던 스무 살 적, 꽤 괜찮은 소개팅남 앞에서 좀 있어 보이고 싶을 때 마시던 술이다. 일단 ‘호~가든’이란 이름부터 외국 냄새가 나면서 어쩐지 지켜주고 싶은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잘 깎은 얼음조각 같은 호가든 전용잔을 3분의 2 정도 채운 뒤,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살살 병을 돌려 가라앉은 침전물까지 잔에 따라낸다. 이렇게 하면 잔은 이른 봄 속도 모르고 얼굴을 내민 개나리처럼 예쁜 노란빛이 된다. 조금 엉성한 거품을 입술에 대고 혀와 목을 따라 넘기면 입천장부터 코끝까지 풍성한 향기가 폭죽 터지듯 팡팡 터지고 나는 점점 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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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가든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가장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밀맥주다. 태생은 벨기에지만 꽤 오래전부터 오비맥주가 OEM 방식으로 생산과 판매를 도맡아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가든’이라는 귀여운 별명도 있다. 밀맥주 특유의 산미에 오렌지 껍질, 코리앤더 씨앗 등 이국적인 향을 내는 다양한 재료를 섞어 독특한 향과 맛이 특징이다. 이때문에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기도 한다지. 참고로 에디터H는 ‘불호’, 에디터M인 나는 ‘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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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에 있는 것처럼 푹푹찌는 날이었다. 더운 열기 속에서 맥주를 연신 들이켰더니 하늘이 빙빙돈다. 이렇게 취했는데도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세상은 너무 밝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다 제정신일 때 나 혼자 비틀비틀대는 이 기분. 이것이 바로 낮술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이것도 언제가는 다 추억이 되겠지. 엄마 아빠도 못 알아본다는 낮술의 기억을 추억하면서 찰칵.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