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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의 취향] 리미티드 에디션의 유혹

안녕, 디에디트 에디터B다. 최근 한 달간 지출이 많았다. 최근 한 달이라면 시칠리아에 다녀온 것밖에 없는데 왜 그럴까. 한국에 오니 잠자고...
안녕, 디에디트 에디터B다. 최근 한 달간 지출이 많았다. 최근 한 달이라면 시칠리아에…

2019. 12. 03

안녕, 디에디트 에디터B다. 최근 한 달간 지출이 많았다. 최근 한 달이라면 시칠리아에 다녀온 것밖에 없는데 왜 그럴까.

한국에 오니 잠자고 있던 물욕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나의 물욕을 부추기는 것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계절의 변화, 두 번째는 심경의 변화였다. 즐거웠던 시칠리아 한 달 살기가 끝나자 마음이 헛헛해졌고, 서울의 추운 날씨는 어서 F/W를 대비하라고 부추겼다. 결론을 말하자면, 몸도 마음도 추워서 사게 된 거다.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는데 막상 내가 산 걸 보면 그 이유가 납득가지 않을 거다. 그렇다. 사실 기준 없이 마구 샀다. H는 내게 이상한 데 돈을 잘 쓴다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게 다 내가 한정판의 노예이기 때문이고, 리미티드 에디션 앞에서는 항상 가슴이 뛰기 때문이다.


카네이테이 지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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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에 누워있다가 지갑을 바꾸면 돈이 들어온다는 말이 문득 떠올랐다.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도 나처럼 새 지갑을 사고 싶었던 것 같다. 10년 만에 새 지갑으로 바꿨다. 카네이테이에서 만든 장지갑이다.

카네이테이? 아마 생소한 브랜드일 거다. 군용 텐트, 군복을 소재로 가방, 지갑, 옷을 만드는 업사이클링 브랜드다. 트럭 방수천으로 가방을 만드는 프라이탁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업사이클링 브랜드 중에는 프라이탁이 제일 유명하지만 프라이탁 말고도 많다. 폐우산으로 지갑을 만드는 큐클리프, 자동차 가죽시트로 가방을 만드는 컨티뉴 등. 업사이클링 브랜드는 아니지만 프라다에서도 비슷한 걸 한다. 예를 들면, 바다에 버려진 페트병, 그물 같은 것들로 나일론을 만들어 다시 가방을 만드는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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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부분의 업사이클링 브랜드에게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첫 번째는 별로 유명하지 않으면서 비싸다는 거다. 재료는 한정적이고 그 재료를 다시 제품으로 만들기 위한 과정에는 수작업이 필수적이니 가격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 이미 디자인 되어있는 것을 재활용하는 거라 디자인에도 한계가 있으며 보통은 그 디자인도 투박한 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단점이 구매욕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사람들이 많이 안 쓰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 제품의 이름은 Berlin L이다. 이름에서도 알수있듯 라지 사이즈이기 때문에 활용도가 꽤 높다. 지폐나 카드 말고도 여권이나 스마트폰까지 보관할 수 있다. 게다가 미군텐트를 제단해서 만든 거라 내구성이 튼튼하고 방수 지퍼까지 달려있다. 무엇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스크래치나, 녹슨 흔적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게 또 업사이클링의 매력이지. 카네이테이에서는 지갑뿐만 아니라 바지, 아우터도 판매하니 한 번 둘러보는 것도 좋겠다. Berlin L의 가격은 9만 9,000원.


서울우유 레트로 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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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우유라는 브랜드를 다시 보게 된 때는 딱 일 년 전이었다. 어느 여름날, 종로3가를 지나고 있었는데 예쁜 카페가 뚝딱뚝딱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름을 보니 밀크홀1937? 서울우유의 새로운 브랜드라고 했다. 그맘때는 뉴트로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호돌이가 그려진 주스컵, 베지밀 로고가 박힌 우유컵, 분식집의 촌스러운 초록색 접시가 인기였다.

그리고 서울우유도 가열차게 그 유행에 동참했다. 내가 산 제품은 2019년에 생산된 ‘무늬만 옛스러운’ 레트로 서울우유 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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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트로라는 유행에 올라타는 건 쉬울 거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역사가 어느 정도 있는 브랜드가 아니면 힘드니까. 위에서 언급한 밀크홀1937에서 눈치챘듯 서울우유의 창립연도는 1937년. 올해로 벌써 90년이 넘었다.

나는 가장 무난한 디자인 하나면 될 것 같아서 1종을 구입했지만 5종이 더 있다. 딸기맛 우유라고 적힌 레드 컬러, 쵸코렡우유(꼭 이렇게 써줘야 한다)라고 적힌 브라운 컬러 등.

이미 우리 집엔 머그컵이 30종은 넘게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왜 또 이렇게 쓸모없는 걸 사버렸을까. 하지만 자책하기엔 이르다.  쓸모는 만들면 되는 거다. 그동안 샀던 컵이 커피 전용이었다면, 이건 우유 전용으로 써야겠다. 가격은 1만 1,000원.


월간 윤종신 바이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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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월간 윤종신이라는 프로젝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거다. 방송을 통해 많이도 홍보하고 다녔으니 말이다. 그래서 월간 윤종신에 어떤 노래가 있는지는 몰라도 이 프로젝트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 달에 한 곡씩 작곡해서 발표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어언 10년이 흘렀다. 2010년 4월에 시작했으니 정확히는 10년하고 7개월이 지났다.

‘월간 윤종신 바이닐’을 샀다. 10년 동안 발표한 곡 중 몇 곡만 추려 바이닐로 제작한 앨범이다. 그 결과물이 월간 애착, 월간 현, 월간 전자, 월간 계절, 월간 여성까지 총 다섯 개의 큐레이션 앨범으로 재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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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마다 큐레이션 기준이 있다. 월간 애착은 기대보다 덜 알려져서 아쉬운 노래, 월간 현은 피아노나 기타가 중심인 노래, 월간 전자는 일렉트로닉, EDM으로 만들어진 노래 그리고 월간 계절은 계절성이 부각되는 노래를 묶은 바이닐이다.

내가 산 앨범은 월간 여성인데, 윤종신이 특별히 애정하는 여성 싱어와 함께 작업한 노래만 담았다고 한다. 애정하는 뮤지션이 누구인가 보니, 조원선, 양파, 김완선, 김윤아 등이다. 나 역시도 좋아하는 가수들이다. 특히 김완선이 프린트된 커버만으로도 이 바이닐은 소장할 만하지 않을까. 집 한 켠에 인테리어 용으로 두어야겠다. 가격은 4만 4,000원.


기생충 각본집&스토리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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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책이 많다. 하지만 난 책을 많이 안 읽는다. 그냥 책 사는 걸 좋아할 뿐. 몇 번 말했듯 나는 한정판의 노예이고, 나 같은 한정판의 노예가 책을 사면 이상한 데 집착하기 시작한다. 굳이 초판을 사는 것이다. 초판, 그러니까 첫 번째로 찍어낸 책 말이다.

초판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이 있다. 우선 편집자가 끝내 잡아내지 못한 오타가 있을 수 있고, 맞춤법이 틀릴 수 있고, 잘못된 단어가 사용될 수도 있다. 맞다. 초판의 특별함에 좋은 건 별로 없다. 그것이 초판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하지만 요즘에는 예약 구매로 책을 사면 저자의 사인을 책 안에 프린트해주거나(사인을 직접 해주는 게 아니다), 달력 같은 굿즈를 주기도 한다… 음…이렇게 쓰고 보니 아무래도 초판을 그만 사야 할 거 같다. 사인도 필요 없고 굿즈도 필요 없는데 왜 샀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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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에 산 초판은 조금 다르다. 영화 <기생충>의 스토리북과 각본집인데, 초판을 구입하면 두 책을 같이 보관할 수 있는 하드커버 같은 것을 준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분은 이런 의문이 들겠지. ‘각본집과 스토리북을 누가 읽지?’ 그건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각본집을 만들어서 팔면 나 같은 사람들이 읽지도 않으면서 열심히 사기 때문에 파는 게 아닐까.

영화라는 무형의 작품을 좋아하다 보면 유형의 무언가를 소장하고 싶은 욕심이 들곤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영화 티켓을 모았고, 요즘에는 포토카드로 만드는 것 같다. <기생충> 스토리북도 그래서 샀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의 초판이니 언젠가 중고나라에서 빛을 발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가격은 3만 7,000원.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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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를 보고 벽돌인 줄 알았겠지만 사실 책이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라고 쓰인 건 이 책의 이름이다. 이것 또한 초판이다. 초판에 목멘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모든 책을 초판으로 사지는 않는다.

책 사는 데 돈을 쓰는 건 나도 부담스러워서 웬만하면 알라딘 중고서점을 이용하거나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구글에서 미리보기로 본다. 진짜 소장하고 싶은 것만 사는데, 이동진 평론가가 쓴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는 꼭 소장하고 싶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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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를 벗기면 ‘2019~1999’라고 적혀있다. 이동진 평론가가 1999년부터 2019년까지 무려 20년 동안 쓴 글을 모아 놓았다. 이동진 평론가가 조선일보에서 영화부 기자를 할 때 썼던 첫 번째 평론집 <시네마 레터>도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그의 팬인데 오랜만에 거대한 책이 나와서 두근거렸다. 이렇게 꾸준히 쓰고 있었다는 것에 무한한 존경심을 보낸다.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라는 말은 영화 안에서 한 번, 영화 밖에서 한 번 더 시작된다는 뜻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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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은 943페이지에 달한다. 아직 엄두가 나지 않아서 읽지 못했다. 2019년 안에 다 읽지는 못할 것 같고, 2020년 안에 완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겠다. 가격은 3만 9,000원.


피스타치오 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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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품을 잘 안 사는 편이다. 어차피 한국에서 다 구할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가방이 무거워지는 게 싫은 게 두 번째 이유다. 이번 시칠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그넷 하나만 사줘요”라는 지인의 부탁에 시칠리아라고 적힌 마그넷 하나 그리고 겸사겸사 내 것도 샀을 뿐이었다. 그런데 로마 공항의 면세점을 지나갈 때, 안 사면 후회할 거 같은 물건이 번뜩 떠올랐다. 피스타치오 크림이다.

피스타치오 크림은 말 그대로 피스타치오로 만든 크림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피스타치오 맛이 나는 크림. 팔레르모 시내에 있는 만물상 같은 곳에서 이 크림을 처음 먹어봤다. 친화력이 좋은 아저씨는 안 사도 좋으니 맛이나 보라며 권했고, 나는 살짝 맛을 봤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 모르겠는데 ‘아는 맛인데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피스타치오 맛이 뭔지 알고, 크림으로 만들면 대충 이런 맛이 날거라 예상이 되는데 그 예상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맛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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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는 먼 옛날부터 오렌지, 포도, 토마토, 밀 등 식재료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피스타치오 역시 시칠리아에서는 맛있기로 소문난 재료.

“피스타치오 크림이 누텔라보다 더 중독성 있대요” 한 달 살기 동료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 어디서 들은 이야긴지 몰라도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누텔라가 “단맛! 단맛! 또 단맛!” 이러면서 단맛의 끝을 보여준다면 피스타치오 크림은 견과류의 고소한 맛과 단맛이 아주 잘 배합되어있다.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으며 한 번 먹으면 계속 먹게 된다. 대단한 중독성이다. 내가 이걸 기념품으로 산 이유는 한국에서는 피스타치오 크림을 구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이탈리아에는 널린 것이 한국에서는 없다니. 이것 또한 리미티드 에디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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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