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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노처럼 커피를

안녕, 시칠리아에서 에디터M이다. 매일 밤 다 같이 모여 먹는 떠들썩한 저녁도 좋고, 화려한 불빛이 빛나는 도시도 행복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안녕, 시칠리아에서 에디터M이다. 매일 밤 다 같이 모여 먹는 떠들썩한 저녁도 좋고,…

2019. 11. 08

안녕, 시칠리아에서 에디터M이다. 매일 밤 다 같이 모여 먹는 떠들썩한 저녁도 좋고, 화려한 불빛이 빛나는 도시도 행복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이른 아침(그래봤자 9시 정도지만) 혼자 즐기는 산책과 그때 마시는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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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운동에서 아침 산책으로 그리고 커피 투어로 변질된 건 벌써 이 주차. 이 작은 해변마을에서는 갈 만한 카페가 몇 개 없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딱 세 개라고 하는 게 맞겠다. 그날의 기분에 따라 내키는 대로 들어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법 아는 체를 해주는 종업원도 생겼다. 단골이 생기면 진짜 내 동네가 된 거라던데 바로 이런 게 여행과 한 달 살기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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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선 우리가 흔히 친구와 만나 커피를 마시는 곳을 카페보다는 바(bar)라고 부른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한적한 분위기의 우리 동네에서 유독 바가 북적이는 시간대가 있으니 바로 아침이다. 해가 뜨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과장된 손동작으로 옆 사람과 본조르노 인사를 하고 볼키스와 포옹까지 하는 요란스러움을 보곤 처음엔 나는 감히 그 안에서 주문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20일이 지난 지금 진한 아빠 스킨 냄새와 깊이 들어간 푸른 눈, 손목에 메탈 시계를 차고 있는 그들이 이제는 퍽 친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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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들은 모두 서서 커피를 마신다, 짧고 굵게.

오늘은 매일 아침 시칠리아 현지 사람들 속에 섞여 서서 커피를 마셔본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커피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우노 카페”

이탈리아어로 한 개를 우노(uno)라고 하고 커피를 카페(caffé)라고 한다. 바에서 우노 카페라고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에스프레소를 준다. 이곳 이탈리아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물론 따듯한 아메리카노도 없다. 한 마디로 이곳에서 커피란 작은 잔에 물과 함께 내어주는 에스프레소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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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와서 커피가 늘었다. 그리고 설탕 섭취도. 한국에서는 시럽을 넣은 커피를 즐기지 않는 편이었는데, 여기선 커피를 시키면 설탕부터 찾는다. 진하게 내린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 봉지를 주르륵 붓는다. 이때 젓지 않고 그대로 마셔야 한다. 처음엔 에스프레소의 쓰고 진한 맛을 온전히 즐기다가 마지막 한 모금이 남을 때쯤이면 바닥에 가라앉은 설탕이 커피에 녹으면서 아주 달콤해진다. 인생에는 단맛도 쓴맛도 모두 필요하다고 믿는 나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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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아시는 것처럼 외국의 레스토랑에서는 와인처럼 물도 주문해서 마셔야 한다. 그런데 유독 바에서는 물 인심이 후하다. 에스프레소를 시키면 플라스틱 컵에 물을 함께 주는데 마지막에 진하고 쓴 에스프레소를 마무리하기에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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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자주 마시는 건 카푸치노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우유가 들어간 커피는 식후에 마시지 않는다. 대신 아침에 마시는 커피라는 인식이 강하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오후에 카푸치노를 시키는 건 외국인이나 관광객밖에 없다고. 물론 이게 완벽한 불문율은 아니다. 뭐 밥 먹고 카푸치노를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지.하지만 방앗간처럼 바를 드나들며 관찰한 결과,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침에 주로 에스프레소나 혹은 카푸치노에 간단한 빵을 곁들여서 먹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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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카푸치노에도 역시 황설탕을 뿌려서 먹는데 이때도 젓지 않고 마신다. 그럼 미처 다 녹지 않은 설탕이 부드러운 크림 위에 소복하게 쌓이는데 그대로 입으로 직행. 우유와 커피 그리고 굵은 황설탕이 한입에 들어오는데 그럼 꼭 뽀빠이 과자의 별사탕을 먹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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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이곳에선 어딜가도 수준급의 카푸치노를 즐길 수 있다. 물론 우유 거품의 정도가 차이가 있고, 또 근사한 라떼 아트 같은 게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맛있는 건 우유가 고소하고 진하기 때문인 것 같다. 마트에서도 라떼용 우유를 따로 판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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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후에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카페 마키아토(Caffe Macchiato)를 마신다. 마키아토란 얼룩이란 뜻으로 에스프레소에 얼룩이 될 만큼 아주 약간의 우유스팀을 더한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플랫 화이트보다 조금 더 진한 맛이라고 상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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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는 심화편이다. 어딜 가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찾는 남자 식구들을 위한 메뉴도 있다. 더 프레도(The Freddo)라고 불리는 메뉴다. 프레도(freddo)는 우리나라 말로 파면 ‘차가운’이란 뜻인데 말 그대로 차가운 커피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탈리아 커피가 그리 만만할 리가. 진한 커피를 얼음과 함께 갈아주는 음료로 당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날 마시면 정신이 번쩍 드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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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메뉴를 봤을 땐 눈을 의심했다. 카페 진생(Caffe Ginseng)이라니, 진생이랑 인삼을 말하는 건데? 아니 이탈리아에 왜 우리나라에서도 먹지 않는 인삼 커피 같은 게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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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을 하면서도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알고 보니 에스프레소에 우유와 인삼 액기스를 넣은 메뉴였다. 여기 사람들은 마치 이 맛은 차이티 라테와 비슷하다고 표현하던데 내가 느끼기에도 인삼의 맛은 거의 나지 않고 달콤함과 약간의 이국적인 풍미가 커피와 꽤 잘 어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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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벌써 서서 빠르게 먹고 떠나는 커피에 익숙해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이곳 시칠리아는 사람도 날씨도 맛도 모든 것이 응축된 느낌이다. 한눈팔지 않고 직진으로.

About Author
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