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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시대의 술, 디플로마티코

안녕하세요, 에디터M이에요. 이 리뷰의 시작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평화로운 금요일이었어요. 출근했는데 느닷없이 일하기가 싫어진 거에요. 가만히 일하고...
안녕하세요, 에디터M이에요. 이 리뷰의 시작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평화로운…

2018. 12. 17

안녕하세요, 에디터M이에요. 이 리뷰의 시작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느 평화로운 금요일이었어요. 출근했는데 느닷없이 일하기가 싫어진 거에요. 가만히 일하고 있는 에디터H와 기은을 꼬셔봤습니다.

“우리 남대문 갈래?”

사실 전 새까만 마음을 품고 물었는데, 이 둘은 순순히 응하더군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다는 디에디트의 남대문 탐방이 말이죠. 신사임당이 그려진 오만 원권을 작은 손에 쥐고 그렇게 우리는 남대문 시장에 흩어졌어요. 에디터H는 필름 카메라를, 에디터 기은은 마카다미아, 초콜렛, 그리고 헤이즐넛 향이 더해진 가향 커피를 품에 안고 돌아왔죠. 저는 뭘 샀냐구요? 남대문까지 왔는데 당연히 술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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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수입명품상가 지하, 북적대는 인파를 헤치고 가다보면 주류상가가 보입니다. 어딘가에서 하나 둘씩 모여든 술들이 가만히 또아리를 틀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죠. 친절한 이모님의 큐레이션과 흥정하는 재미까지 맛볼 수 있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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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곳에서 오늘의 주인공 디플로마티코를 업어왔어요. 언젠가 우연히 맛본 뒤 언젠가 디에디트 술 컬렉션에 추가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마치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놓여있는 거에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만원 권 두장을 내밀었죠. 딱 만원 거슬러 받았습니다.

bcut_DSC02180[왼쪽은 더파크 이크종의 협찬, 오른쪽이 내꺼]

사실 고백할게 있어요. 디플로마티코에서 가장 사랑받는 건 레제르바라는 건데 제가 가져온 건 만투아노에요. 아쉽게도 남대문에 이것밖에 없었거든요. 그래도 디플로마티코를 리뷰하면서 레제르바를 빼놓는 건 아무래도 섭섭한 것 같아서 지인의 술을 빌려 왔어요. 이자리를 빌어 술의 주인인 더 파크 이크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딱 100ml만 마시라고 신신당부했는데, 리뷰를 하다보니 조금 더 마신 것 같아요.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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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술을 앞에 두고 주절주절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배웠어요. 사실 디플로마티코나 럼에 대한 이야기는 쉬지 않고 떠들 수 있지만, 그건 조금 후로 미루기로 하고 일단 마셔보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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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레제르바 익스클루시바부터. 짙은 녹색빛이 도는 무광의 병에 꼭 미국 달러를 붙여 둔 것 같은 라벨이 인상적이에요. 첫 인상부터 ‘나는 프리미엄이야’라는 부내가 폴폴 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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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클루시바는 시핑럼이에요. 시핑(Sipping)은 ‘음료를 조금씩 홀짝이다’라는 뜻인데, 이름처럼 홀짝이며 마시면 됩니다. 아무것도 넣지 않은 니트(Neat)나 얼음을 넣은 온더락 정도로 마시는게 이 술에 대한 예의란 뜻이죠. 이건 여담인데 바에 갔을 때 어떤 것도 더하지 않은 깔끔한 맛을 주문하고 싶다면, 스트레이트란 말대신 ‘니트’라고 주문해보세요. 스트레이트나 샷은 한입에 털어넣는 걸 말하거든요. 위스키나 좋은 증류주를 깔끔하게 마시는 건 니트라는 게 더 자연스러워요.

익스클루시바는 알코올 도수가 40%나 되니 조심해야합니다. 왜냐면, 강렬한 카라멜 초콜렛 향 덕분에 성급하게 입을 가져다 대고 또 달콤한 맛때문에 자꾸만 혀로 입술을 핥다가 또 자꾸만 잔에 입을 가져가게 되는 위험한 녀석이거든요. 입에 넣으면 끈덕한 액체가 벨벳처럼 입안에 퍼져요. 동시에 독한 알콜 기운이 바다 안개처럼 입천장과 코를 지배하다 언제 그랬냐는듯 시치미를 뚝 떼고 사라져버리거든요. 마치 못된 마법처럼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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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술은 오래된 구리 증류기에서 증류를 한 뒤, 버번을 숙성했던 작은 오크통에 12년 정도 숙성합니다. 작은 오크통에서 긴 시간동안 숙성한 덕에 색도 맛도 진해요. 들큰하고 끈적이는 맛이죠. 아주 조금만 마셔도 입안에서 오래동안 존재감이 남아 ‘아! 이게 좋은 술이구나’를 단번에 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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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익스클루시바가 너무 달다고 느꼈다면, 만투아노도 괜찮아요. 만투아노도 화이트 오크통에서 8년이상 숙성한 럼이거든요. 익스클루시바가 포트 와인 중에 토니 와인과 결이 비슷하다면, 만투아노는 오히려 위스키랑 가까운 맛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단맛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익스클루시바에 비해 약하고 거기에 미미한 산미와 톡쏘는 알콜향까지 더해져 조금 더 가볍고 밸런스가 잘 잡힌 럼입니다.

bcut_DSC02304bcut_DSC02311[왼쪽이 디플로마티코 만투아노 오른쪽이 익스클루시바 레제르바, 색의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익스클루시바도 만투아노도 참 좋은 술이에요. 달콤한 맛 때문에 자꾸 마시고 있다가 어느 순간 코와 입김으로 후 하고 내뿜어지는 알콜때문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맛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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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여기까지 쓰고 보니 술기운이 오르네요. 여러분, 럼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땋은 머리를 길게 늘러뜨린 잭 스패로우가 비틀거리는 와중에도 절대 손에서 놓지 않던 술이 바로 럼이에요. 헤밍웨이가 사랑해 마지 않던 술이 바로 럼이기도 하구요. 이 두 가지 만으로도 럼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정도 잡히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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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은 사탕수수로 만들어요. 왜 가끔 동남아시아의 길거리에서 사탕수수를 즉석으로 짜서 내어주는 주스를 팔곤 하잖아요. 컵 안에 미색의 불투명한 액체가 들어있는 주스 말이에요. 들큰하고 찝찌름한 맛이 나는 이 주스가 바로 럼의 원료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탕수수의 줄기를 압착해 만든 주스를 끓여 설탕을 만들고, 그 뒤에 남은 걸쭉하고 짙은 당밀을 희석해 발효와 증류를 거치면 투명한 럼이 되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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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로마티코는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프리미엄 럼 브랜드에요. 최근 크래프트, 부티크, 프리미엄이란 별명을 가진 브랜드들이 자주 보이죠. 거대 기업에서 대량 생산되는 술 대신 자신만의 개성과 고집을 바탕으로 우수한 품질의 술들이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거든요. 취하기 위해 마시기 보다는, 정말 좋은 술을 적게 마시고 싶은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는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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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술이 어디서 만들어지느냐. 디플로마티코는 아까 잠깐 언급했던 캐리비안(caribbean) 즉 카리브해의 베네수엘라에서 만들어진답니다. 실제로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의 80% 이상이 디플로마티코의 증류소를 중심으로 100km 이내에서 재배된다고 하니, 아주 좋은 사탕수수로 만들어진다는 건 의심할 필요가 없겠네요. 베네수엘라 자체가 럼에 대한 법이 굉장히 엄격해서 웬만한 증류소는 명함도 내밀 수 없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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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플로마티코가 만들어지는 곳은 재료도 재료지만, 럼 숙성 조건도 훌륭해요. 이 술이 만들어지는 증류소는 적도 근처 안데스 산맥이 끝에 위치해있어요. 지대가 높아 일교차가 크고 매우 더운 곳이죠. 럼의 숙성은 오래된 버번 통에서 이루어지는데요. 위스키를 숙성하는 과정에서 공기중에 증발되는 2%를 천사의 몫이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디플로마티코는 1년에 7%나 공기중에 날아가 버린대요. 위스키보다 3배나 많은 양이 하늘로 사라지는 셈이죠. 이 정도면 천사가 아니나 대천사 라파엘의 몫이라고 해도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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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맛있는 술을 홀짝이며 잘빠진 병을 보고 있는데 문득 궁금해졌어요. 왜 이 술의 이름이 diplomático(외교관)이며 라벨에 그려진 저 아저씨는 누구일까? 여러분도 궁금해하실지도 몰라 열심히 찾아봤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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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라벨에 그려진 저 아저씨는 디플로마티코랑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대요. 창업주도, 블렌드 마스터도 아니죠. 돈 후안초(Don Juancho)란 이름의 이 사람은 19세기 베네수엘라의 디플로마티코 증류소가 있는 마을의 소문난 애주가였대요. 그의 술에 대한 사랑은 카리브해 연안에 파다했는데요. 수많은 지역을 다니면서 좋은 술을 모으는 게 그 사람의 멋진 취미였던 거죠. 사람들은 그의 높은 안목으로 수집한 주류 컬렉션을 엠버서더 리저브(대사의 소장품)라고 부르곤 했대요. 디플로마티코는 그에게 바치는 헌사 같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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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재미있어요. 디플로마티코를 시작으로 저는 럼의 매력에 푹 빠졌지 뭐에요. 얼마 전 제가 요즘 즐겨찾는 바에서 가장 좋은 럼을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이걸 내어주시더군요. 파르세(parce)라는 럼이래요. 은은한 단맛과 아찔한 향, 싱글 몰트 위스키 뺨치는 녀석이었죠. 물론 가격도 싱글몰트 못지 않았구요. 헤헤. 하지만 아깝지 않아요. 맛있는 음식과 좋은 술이 주는 경험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행복을 선사하니까요. 인생이란 이런 작은 행복이 모여 풍성해진다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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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기회가 되면 더 재미있고 즐거운 술을 가지고 올게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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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민

에디터M. 칫솔부터 향수까지 매일 쓰는 물건을 가장 좋은 걸로 바꾸는 게 삶의 질을 가장 빠르게 올려줄 지름길이라 믿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