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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의 먹스타그램

안녕, 에디터H다. 가을을 맞아 가벼운 우울을 앓았다. 취향을 팔아 먹고 사는 직업인데, 내가 진심으로 몰두하는 게 뭔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안녕, 에디터H다. 가을을 맞아 가벼운 우울을 앓았다. 취향을 팔아 먹고 사는 직업인데,…

2018. 11. 16

안녕, 에디터H다. 가을을 맞아 가벼운 우울을 앓았다. 취향을 팔아 먹고 사는 직업인데, 내가 진심으로 몰두하는 게 뭔지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인스타그램에 저장 기능이라는 게 있다. 어떤 포스팅을 보다 나만 볼 수 있게 저장해두고 싶다면, ‘책갈피’ 모양의 아이콘을 터치하면 된다. 그럼 나의 보관함 속에는 나중에 다시 꺼내볼 요량으로 모아둔 수많은 포스팅이 켜켜이 쌓이게 된다. 지난 밤, 얼굴에 팩을 붙이고 누워 저장된 게시물을 살피다 깨달았다. 그곳엔 ‘갖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이 가득했다. 이거야 말로 욕망의 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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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얼마나 식도락에 열광하는 사람인지 깨닫고 혼자 피식 웃었다. 씰룩거리는 뺨을 따라 마스크팩이 올라붙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이만큼 단순하고 즐거운 일이 어디 있을까. 추워지는가 싶더니 벌써 연말이란다. 올해의 먹부림으로 한 해를 정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미쉐린 가이드는 아니지만 먹는 일에 행복을 느끼는 에디터H의 2018년 맛집 리스트를 준비했다. 좋은 기억이 있는 곳만 꼽았다. 맹신하진 마시고, 지나는 길에 있으면 들러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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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62-4

올해 1월이었다. 날이 추웠는데, 동행은 어딜 가는지 말도 해주지 않고 앞장섰다. 안국역 앞의 아주 작은 가게였다. 인사동까지 왔으니 당연히 한식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일본식 솥밥, 가마메시를 파는 집이었다. 조금 솥밥과 전복 솥밥을 각각 주문했다. 정갈한 반찬과 함께 도착한 솥밥의 자태는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새우와 버섯, 죽순, 어묵, 은행이 보기 좋게 자리잡고 앉았다. 색도 참 예쁘다. 그냥 슥슥 비벼 먹어도 맛있다. 간이 세지 않아서 재료들이 가진 향이 잘 느껴진다. 심심하다 느껴지면 함께 나온 양념 간장을 조금 올려 먹는다. 전복 솥밥엔 전복이 듬뿍 들었다. 한 수저 뜰 때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먹는 내내 서로 말이 없었다. 얼마 전에 에디터M과 함께 다시 갔었는데, 그때도 둘다 말 없이 솥밥만 먹었다. 먹을 것이 가져다주는 행복이란 때로 너무 단순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름이 ‘조금’이라서 더 좋다. ‘조금 주세요’라고 주문을 하거나, ‘조금 먹을게요’라고 할 수 있는 아이러니가 좋다. 사실은 많이 먹을 거지만. 조금 솥밥은 1만 6,000원, 전복 솥밥은 2만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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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시선수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45길 6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 좋은 스시야에서 오마카세를 즐기고 싶다! 수소문 끝에 신사동의 스시선수를 예약했다. 유명한 최지훈 셰프를 지정했더니 거의 한 달을 기다려야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먹은 스시는 과연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각각의 생선에 대한 간결한 설명과 함께 한 점 한 점 쥐어주는 스시 맛이 정갈하기 그지 없다. 내가 먹는 속도에 맞추어 다음 스시가 나오는데, 나만을 위한 시간 같아서 참 좋았다. 심지어 평소에 꺼리던 고등어 초밥마저 꿀맛이었다. 간장까지 이미 바른 상태로 놓이기 대문에 그대로 입에 넣으면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입맛엔 조금 싱거웠는데, 최지훈 셰프의 엄격한 표정을 보고 도저히 간장을 더 많이 발라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스시도 좋지만 중간 중간 곁들여지는 생선구이나 메밀소바도 훌륭하다.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런치 오마카세는 날마다 가격이 조금 달라지는데, 내가 예약했던 날은 1인 11만 원.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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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푸드박스
서울 강동구 천호동 338-17

언젠가 내가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갑각류가 먹고싶다”고 떼를 쓴 일이 있다. 지인은 새우가 먹고 싶은거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정답은 랍스터였다. 그래, 일상적으로 먹는 메뉴는 아니지. 하지만 우리 동네에서는 가능하다. 랍스터를 파는 포장마차가 있거든! 천호동 번화가에서도 조금 떨어진 주택가 골목에 들어가면 ‘씨푸드박스’라는 허름한 가게가 보인다. 약간의 동남아 감성이 느껴지는 재미있는 인테리어다. 간판도 제대로 붙어 있지 않고, 입구에 씨푸드박스라고 써있을 뿐이다. 포장마차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스뎅 테이블’과 불편한 의자가 매력 포인트다. 랍스터 가격도 좋다. 500g 짜리는 2만 5,000원. 1kg은 6만원. 셀프로 끓여 먹는 라면 전골이나, 주먹밥, 연유에 찍어먹는 꽃빵 등 탄수화물을 보충할 수 있는 사이드메뉴도 알차다. 가장 좋은 건 와인을 판다는 사실. 1만 원대 샤르도네까지 주문하면 제법 구색이 맞는다. 실내 포장마차 답게 분위기는 시끌벅적하고 편안하다. 항상 가까운 사람들과 찾아가곤 했다. 언제든 편하게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랍스터를 싹싹 발라먹고 라면까지 흡입하고 나면 그렇게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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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촐로
서울 용산구 신흥로 30-1

올해도 맛있는 파스타를 많이 찾아다녔지만, 여전히 내 최애는 해방촌에 있는 오스테리아 쿠촐로다. 오스테리아는 이탈리아 현지에서는 ‘선술집’과 비슷한 단어다. 와인과 곁들일 간단한 식사와 저렴한 안주를 파는 곳을 말한다. 쿠촐로 역시 와인과 함께 식사를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현지와 다른 점이라면 한국의 오스테리아는 가격이 상당히 높다는 점 정도.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화이트 라구 파스타와 트러플 파스타. 각각 2만 7,000원, 3만 3,000원이다. 한 입만 먹어도 코끝에 감기는 풍미와 생면의 식감이 즐겁다. 천천히 우아하게 먹고 싶은데 늘 허겁지겁 포크를 감아서 먹다보면, 금세 접시가 깨끗하게 비어버린다.

여길 가면 항상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2년 전 5월 마지막 날, 에디터M과 둘이서 회사를 때려치우고 나와 함께 백수 첫 식사를 했던 곳이다. 너무 맛있어서 놀라고, 만만치 않은 가격대에 또 놀랐더랬다. 와인 한 잔을 시키며 벌벌 떨었던 귀여운 추억이 있다. 향긋한 화이트 와인 한 잔을 나눠 마시며 말했다. 우리 나중에 와서는 가격표같은거 보지 말고 마음껏 시키자고. 그리고 딱 1년 뒤에 디에디트 1주년 파티를 마치고 둘이 찾아가 잔뜩 취할 때까지 와인을 마셨다. 성공이란 말은 멀고 어렵지만, 내가 좋아하는 파스타와 와인을 마음껏 주문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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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호텔
인천광역시 중구 운서동 2877

호텔 리뷰 시리즈에서도 네스트호텔을 다룬 적이 있지만(기사는 여기로), 이곳의 백미는 값비싼 김치볶음밥이다. 매번 네스트호텔을 방문해서 룸서비스로 김치볶음밥을 먹을 때마다 그 사치스러운 가격과 맛에 놀라곤 한다. 한 그릇에 2만 7,000원이니 금치볶음밥이라고 불러드리자. 잔인한 가격 때문에 외면하고 싶지만, 정말 맛있다. 고기와 함께 볶아서 적당한 불맛이 느껴지고 함께 나오는 동치미와의 조화도 좋다. 어디서도 이렇게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다음에 가면 아마 또 시키겠지. 한 수저에 얼마더라 하는 촌스러운 얘길 지껄이면서.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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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쁘아 뒤 이부
서울 강남구 선릉로152길 33

나는 프렌치라면 자다가도 일어나 포크 들고 기다릴 사람이다. 인생 첫 잡지 화보 촬영이 잡혀 강남으로 외근을 가게 되었는데, 전문가의 메이크업을 받은 채로 프렌치를 먹으면 참 행복할 것 같더라. 그래서 전부터 가고 싶었던 레스쁘아 뒤 이부를 예약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여유인지. 가을 초입이었던 때라 테라스에 앉아 평일 낮에도 한가한 사람들과 섞여있으려니 여행이라도 온 것 같았다. 메인보다 앙트레가 인상적이었다. 어니언 스프는 간이 센 편이지만, 그래서 더 매력있다. 아주 진하고 응축된 맛이었다. 베스트는 에스까르고. 계란 노른자를 터트려 함께 먹는 방식은 처음이었는데 크리미하고 고소했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밤낮없이 사무실에서 일만 하던 에디터H의 일상에서 짧은 파리 여행 같은 식사였다. 런치 코스는 1인 5만 원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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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돼지식당
서울 중구 다산로 149

금돼지식당을 갔던 날, 우린 아주 배가 고팠다. 밤 11시에야 촬영과 뒷정리가 끝났다. 에디터M과 나는 확실한 단어로 배고픔을 외쳤다. 고!!!기!!!! 사무실 주변의 맛있다는 고깃집은 이미 마감한 뒤였다. 고기가 아닌 다른 음식으로는 채울 수 없는 허기였다. 요즘 핫하다는 금돼지식당에 도전하기로 했다. 삼겹살집이 미쉐린 가이드의 빕 구르망에 이름을 올렸길래 궁금하던 차였다. 게다가 새벽 1시까지 영업하는 인자한 곳이었다. 급하게 차를 몰아 달려갔건만, 웨이팅이 있었다. 11시가 넘은 시간에 삼겹살을 먹기 위해 대기하는 행렬이라니. 믿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30분 가까이 기다려 삼겹살을 만날 수 있었다. 두툼하고 질좋은 고기가 황홀한 소리를 내며 구워지기 시작했다. 직원분의 고기 굽는 솜씨도 보통이 아니었다. 우린 삼겹살이 맛있어 봤자지!! 하는 마음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었다. 아아아, 인생 삼겹살이 여기에 있었다. 식감이 확실한데 질기지 않고, 씹을 때마다 고소한 육즙이 밀려왔다. 우리는 말 없이 고기만 먹었다. 진짜 ‘금돼지’였다. 본삼겹 1인분에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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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