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객원 에디터 미진이다. 여름이면 어김없이 새로운 빙수가 쏟아진다. 클래식한 팥빙수부터 화려하게 치장한 프리미엄 빙수, 독특한 토핑을 곁들인 트렌디 빙수, 혼빙족을 겨냥한 컵빙수, 어른을 위한 술빙수까지, 다양한 컨셉의 빙수가 해마다 새로운 얼굴로 나타나 우리를 설레게 한다.
두근두근. 올여름엔 또 어떤 빙수를 먹어볼까. 호텔 빙수부터 전문점 빙수까지 웬만한 유명 빙수는 이미 다 먹어봤다는 ‘빙수 고급반’을 위해, 맛과 감도 둘 다 놓치지 않은 새로운 빙수만 추리고 또 추려서 골랐다. 아직 유명하진 않지만, 이제 막 문을 열었지만, 조용한 주택가에 은둔 고수처럼 숨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칠 수 없는 특별한 빙수 네 가지.
1. 기댈빙의 평양빙수


처음엔 호기심이었다. ‘평양냉면에서 영감을 받은 빙수’라니. 그저 재미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한 입 먹자마자 동공이 커졌다. ‘엇…’ 바로 다시 한 입.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건 자신감이구나. 생크림, 우유, 연유를 블렌딩한 얼음 그 자체에 모든 노하우를 쏟아 넣은, 자부심 넘치는 한 그릇. 겉보기엔 단순하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한 그릇이다. 흔한 우유 얼음과는 다르다. 담백하면서도 풍미가 진하며, 가벼우면서도 농밀하고, 입자가 고우면서도 쉽사리 녹아내리지 않는다. 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심지어 얼음이 녹으며 바닥에 깔린 연유와 섞이기 시작하는 시점까지 정밀하게 계산한 듯 딱 맞았다. 아무런 토핑도 없이 차디 찬 냉면 그릇에 포송포송한 생크림 우유 얼음과 연유만 담겨 있을 뿐인데도 그릇을 다 비울 때까지 물리지 않았다.
얼마 전 서울숲 옆 한적한 주택가로 확장 이전한 김종찬 셰프의 ‘기댈빙’은 바로 그런 곳이다. 컨셉추얼하면서도 동시에 완성도가 뛰어나고, 젊으면서도 동시에 내공이 깊은 곳. 조리학교, 이탈리안 레스토랑, 샤퀴테리 전문점 등에서 다져온 기본기를 바탕으로 요리를 접목한 색다른 빙수와 주류 페어링(위스키, 와인, 전통주)을 선보이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인 부분보다 본질에 더 집중한다.
“기댈 빙(憑)이라는 이름처럼, 누군가에겐 하루의 여백 같은 공간이, 또 누군가에겐 조용히 기대 쉴 수 있는 작은 의자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라는 김종찬 셰프의 말처럼, 소박하고 편안한 공간에서 잘 만든 빙수와 따스한 접객을 누리며 잠시 쉬고 싶을 때면 성수동 기댈빙을 종종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지금도 좋지만 3년 후, 5년 후의 모습이 더욱 기대되는 곳이다.
· 히스토리: 25년 5월 확장 이전 오픈
· 주소: 서울 성동구 서울숲2길 19-8 1층
· 추천 메뉴: 평양빙수, 참외빙수, 프로슈토멜론빙수, 주류 페어링
2. 파세로의 커피빙수


커피 애호가들이 순례하듯 찾아가는 에스프레소 바 파세로. 초심자도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는 조화롭고 편안한 에스프레소를 추구하는 곳이다.
이 날의 목적도 커피였다. 그런데 먼저 주문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신 후 메뉴판에서 커피빙수 오슬로(Oslo)를 본 순간, 묘한 확신과 호기심이 생겼다. ‘커피가 이 정도라면 분명 커피빙수도 맛있을 것 같아.’ 두 번째 커피 피노(Pino)를 주문하려다 말고 전혀 계획에 없던 빙수를 주문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아니 기대 이상이었다. 파세로만의 부드러운 에스프레소에서 느꼈던 고소한 땅콩, 초콜릿 뉘앙스가 놀랍게도 커피빙수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마치 와인의 마리아주 같았다. 커피얼음을 한 입 머금은 순간 섬세한 에스프레소 향이 확 퍼지며 혀끝을 치고, 이내 포슬포슬한 얼음이 녹아내리며 그 자리를 부드럽게 감싸더니, 위에 얹은 바삭한 땅콩 분태, 카카오닙스와 우유칩이 파세로 에스프레소 풍미를 증폭시키며 다채로운 식감의 레이어까지 층층이 쌓았다.
정말 맛있는 커피를, 마시는 대신 씹는 느낌이랄까. 더운 여름 뿐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먹고픈 맛. 사계절 내내 생각날 것 같은 맛. 따뜻한 에스프레소와 함께라면 더욱 완벽하다.
· 히스토리: 22년 5월 오픈, 24년 커피빙수 출시
· 주소: 서울 동작구 여의대방로24나길 10-2 1층
· 추천 메뉴: 커피빙수 Oslo, 커피 메뉴
3. 무심의 멜론참외빙수


시간이 멈춘 듯한 후암동 주택가 골목을 굽이굽이 걷다 보면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 앞에 무심(無心)한 듯 간결한 사인이 하나 걸려있다. SNS로 이름을 알린 연남동 ‘무무대베이크’와 연희동 ‘Bokeh’가 합심해 후암동에 새로 만든 디저트 바, 무심. 지난 5월 오픈한 신상 업장인데도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다.
웨이팅 리스트에 이름을 걸어놓고 밖에 서서 한참 기다리며 점점 더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곳이길래 이 많은 사람들이 뙤약볕 아래 서서 이리 긴 줄을 기다리는 걸까. 20분 정도 지나니 드디어 차례가 돌아왔다. 계단 한 칸을 내려가 문을 열고 들어서니, 후암동 골목의 소박한 감성이 이어지면서도 동시에 감도 높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보리색 벽, 미니멀한 우드 테이블, 곳곳에 놓여 있는 백자멜론 조합이 마치 이름처럼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은 듯’ 무심하고 자연스럽다.
메뉴 또한 단 두 가지. 멜론참외빙수 & 아쌈티 세트와 오이아이스크림 & 아쌈티 세트뿐이다. 단품 주문은 불가능하다. 방문 목적은 빙수였지만 SNS에서 이름난 무무대베이크 아이스크림도 궁금했던터라 둘 다 주문했다. 멜론과 오이는 같은 박목 박과 오이속(Cucumis) 식물이라 맛과 향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어, 두 메뉴가 서로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전체 만석이라 딱 하나 남아있던 안쪽 테이블에 앉았다. 자연광도 조명도 없어서 사진 찍기는 어렵지만, 극내향형 둘이서 조곤조곤 담소 나누기엔 좋은 자리다. 3분 정도 지나니 주문한 메뉴가 트레이 하나에 담겨 나왔다. 사진에서 봤던 그대로 감각적인 비주얼이다.
이 날의 주인공은 멜론참외빙수. 두툼한 도기 그릇에 멜론 우유 얼음, 요거트 아이스크림을 층층이 담고 그 안쪽에 참외 퓌레, 참외 콤포트를 곁들인 후, 맨 위에 참외 크림, 참외 머랭을 얹고 큼직한 백자멜론 한 피스를 곁들였다고 한다. 말간 아이보리빛 톤온톤 컬러가 담백하고 곱다.
처음엔 가볍게 멜론 우유 얼음부터 한 숟갈. 향긋하다. 진한 머스크멜론 향이 아니라, 갓 깎은 백자멜론의 시원한 향이다. 그 다음엔 깊숙이 한 숟갈. 멜론 우유 얼음부터 요거트 아이스크림, 참외 퓌레, 참외 콤포트, 참외 크림까지 한꺼번에 푹 떠서 머금었다. 부드럽게 스며드는 얼음, 차가운 산미를 품은 요거트, 그 사이를 흐르는 퓌레와 탱글한 콤포트, 진한 크림이 차례대로 혀에 닿는다. 촉감, 온도, 단맛의 농도가 제각기 다 다르다. 그 후부턴 백자멜론에 크림을 얹어 와삭 씹어 먹기도 하고, 머랭을 파사삭 부숴 먹기도 했다. 층층이 쌓여있는 레이어가 다채로워서 다 먹는 동안 멈출 틈이 없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는 얼음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가기 전까진 ‘혹시 비주얼에만 충실한 SNS 핫플이면 어쩌지’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무심한듯한 공간에서 섬세한 제철 디저트와 따뜻한 차를 감도 높게 즐기고 싶다면, 후암동 골목길을 걸어보기를.
· 히스토리: 25년 5월 첫 오픈
· 주소: 서울 용산구 후암로13길 4 1층
· 추천 메뉴: 멜론참외빙수, 오이아이스크림
4. 이소다과점의 호지차빙수


호지차빙수를 좋아한다. 포송한 얼음산 사이로 스며드는 호지차의 구수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이 좋다. 과하게 쌉싸름하지 않은 것도, 카페인이 거의 없는 것도 마음에 든다. 그런데도 사먹을 때마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빙수전문점에서의 호지차는 그저 빙수를 위한 조연이기 때문이다. ‘차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곳의 호지차빙수는 어떨까?’
그렇게 찾아갔다. 이소현 대표의 이소다과점. 이름 그대로 달콤한 화과자와 그에 어울리는 중국차, 그리고 차를 활용한 티 베리에이션 메뉴를 선보이는 다과(茶菓, 차와 과자) 전문점이다.
모던하고 차분한 회색빛 매장에 들어서면 다양한 종류의 다구(茶具)들이 먼저 눈에 띈다. 메뉴판을 열어보니 홍차, 백차, 우롱차, 호지차, 녹차 등 차 종류만 열 가지가 넘는다. 빙수 메뉴는 티 베리에이션(Tea variation) 한 켠에 있고, 종류도 말차/호지차/우롱차(봉황단총) 단 세 가지뿐이다. 역시, 이곳에선 차빙수의 주연이 단연 ‘차’다. 호지차빙수도 이소다과점만의 호지차로 만들었고, 국내산 호지차를 우유와 블렌딩해 만든 밀크티얼음 베이스 위에 팥앙금 연두부당고, 바닐라아이스크림을 곁들였다는데, 무엇보다도 ‘밀크티얼음에서 차의 맛과 향을 어떤 방향으로 표현할 것인가, 나머지 재료들이 이 차를 어떻게 감싸안을 것인가’에 집중했다고 한다.
차가운 유리그릇에 담겨 나온 호지차빙수를 눈으로 먼저 감상한 후, 밀크티얼음부터 한 입 크게 떠서 머금었다. 찬 얼음이 입 안의 온기와 만나 사르르 녹으며 호지차 향이 퍼지는데 오, 의외로 은은하다. 호지차가 중심을 잡고 있는데도 진하지 않다. 아직 중국차를 낯설어하는 이들도 부담 없이 다가설 수 있을 정도로 편안한 맛이다. 그다음엔 팥앙금 연두부당고를 한 입. 이 또한 지나치게 달거나 쫄깃하지 않고, 은은하면서 부드럽다. 호지차의 풍미를 넘어서지 않으면서도 소소한 잔재미를 더하는 조연 역할에 충실하다. 바닐라아이스크림은 아직 차 향이 익숙치 않은 이들에게 완충작용을 해주는데, 호지차의 풍미를 온전히 즐기고 싶다면 빼고 먹어도 좋다.
도회적인 공간에서 ‘차’가 주연인 차빙수와 다양한 종류의 중국차, 다과를 가볍게 즐기고 싶을 때 새로운 대안이 되어줄 곳이다.
· 히스토리: 25년 1월 서울 이전 오픈
· 주소: 서울 동작구 사당로 12 서정힐탑 2층
· 추천 메뉴: 호지차빙수,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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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
미식에 진심, 미진입니다. 미식과 예술,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