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공항 앞에서 하룻밤

서울의 동쪽 끝에 살고 있는 내게 인천은 머나먼 땅. 항상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가 오버랩되는 비일상의 공간이다. 이미 인천에 도착한 것...
서울의 동쪽 끝에 살고 있는 내게 인천은 머나먼 땅. 항상 비행기 이륙하는…

2018. 04. 23

서울의 동쪽 끝에 살고 있는 내게 인천은 머나먼 땅. 항상 비행기 이륙하는 소리가 오버랩되는 비일상의 공간이다. 이미 인천에 도착한 것 만으로도 먼 곳에 도착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내가 인천을 찾는 경우는 딱 두 가지다. 한국을 떠나거나, 영종도 네스트 호텔을 가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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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엔 해외 출장을 앞두고 네스트에 하루 묵었다. 다음날 비행시간이 너무 일러 컨디션 조절이 어려울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면서. 사실은 그냥 네스트에 가고 싶었다. 아껴뒀다 이제야 소개할 만큼 내가 좋아하는 공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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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에는 호텔이 꽤 많다. 그것도 꽤 근사한 호텔들이 즐비하다. 바다를 끼고 있는 데다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공항을 마주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 어디가 제일 좋은지는 내가 감히 선정할 수 없지만, 가장 힙하고 스토리가 있는 곳은 네스트 호텔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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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트호텔은 럭셔리 호텔은 아니고 부티크 호텔에 가깝다. 네스트라는 이름처럼 ‘둥지 안에 안긴 듯한 포근한 느낌’을 추구한다고. 으레 미디어에서 이 곳을 소개할 때 제일 먼저 들먹이는 타이틀이 국내 최초의 ‘디자인호텔스 멤버’라는 것. 어떤 영화를 홍보하며 아카데미 어느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더라, 상을 받았다더라 하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쉐린 가이드와 맥락이 같다고 보면 더 쉬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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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디자인호텔스의 선택을 받았다는 건 꽤 특별한 일이다. 전 세계 100만 개가 넘는 호텔 중에 300개도 안 되는 배타적인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곳이니까. 궁금하다면 공식 웹사이트에 들어가 구경해보시길. 디자인호텔스 멤버로 선정된 곳들은 하나 같이 특별하다. 유명하고, 럭셔리하고, 객실 수가 많고, 화려한 곳이 아니더라도 건축이나 공간, 서비스가 주는 디테일에 고유한 스토리가 숨어있는 곳이다. 까짓 하루 묵어가는 곳에 무슨 스토리가 있고 컨셉이 있냐고? 섭섭한 말씀을. 잘 설계된 공간은 우리에게 ‘새로운 휴식’을 준다. 그게 바로 공간의 가치다. 참고로 우리나라엔 여의도 글래드 호텔과 영종도 네스트 호텔의 두 곳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글래드도 내가 무척 좋아하는 곳이라 곧 소개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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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런 그럴싸한 타이틀을 가진 네스트 호텔은 오픈 직후부터 많은 힙스터의 관심을 받았다. 인스타그램 해시태그만 검색해봐도 이곳에서의 휴가를 즐기고 간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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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션뷰의 디럭스룸에 묵었다. 솔직히 말해서 스탠다드룸에 묵을 거라면 굳이 네스트의 객실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스탠다드가 나빠서가 아니라, 평범하고 단정한 객실이기 때문. 네스트의 매력은 디럭스룸에서 강력하게 뿜어져 나온다. 좁고 기다란 구조의 독특한 공간으로, 네스트의 시그니처 객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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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3평 정도로 아주 넓은 편은 아닌데, 그 기다란 형태를 활용한 방법이 기가 막히다. 짜임새 있게 구획을 나누고 공간을 분리했다. 좁고 긴 복도식 구조라 창문도 그리 큰 편이 아니다. 그래서 창가는 아예 침실로 만들었다. 창을 바라보고 눕는 침대는 휴양지에 온 것 같은 묘한 기분을 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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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여기는 우주…]

인천 바다라는 게 원래 대단한 절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다를 보며 잠들고 싶어서 오션뷰를 예약했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미세먼지와 안개가 콜라보레이션을 이루어 엄청난 해무가 호텔 주변을 습격한 날이었다. 덕분에 창가에 누워 인터스텔라급 시각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온통 새하얀 안개가 껴있어서 여기가 몇 층인지, 눈 앞에 무엇이 있는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뜻하지 않게 공포체험을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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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런 뷰가 보여야 정상이다]

큰 차이는 아니지만 오션뷰가 더 비쌌는데, 내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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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와 거실 공간 사이를 나누는 건 큼직한 책상이다. 아예 이 디럭스룸 구조를 위해 가구를 맞춰놓았는데, 침대 헤드 뒤편이 책상이 되는 구조다. 수면 공간과 생활하는 공간을 적절하게 나누면서, 가구가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도록 만든 영리함이 돋보인다. 이 객실은 모든 가구가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는 게 특징이다. 책상 뒤로는 커다란 쇼파가 바로 연결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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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한쪽에 숨겨진 공간을 열면, 바흐만의 멀티탭이 설치돼 있다. 나 역시 어렵게 구해서 사무실에서 쓰고 있는 제품이다. USB 충전은 물론 거실 TV로의 HDMI 연결도 이 멀티탭을 통해 할 수 있다. 최근에 지어진 호텔들은 이런 편의성이 좋다. HDMI 케이블은 컨시어지에서 대여할 수 있지만, 나는 따로 챙겨갔다. 덕후는 역시 이런데서 티가 나는 법이다. 헤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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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실내에 충전 케이블도 비치돼 있었는데, 놀랍도록 트렌디하다. 라이트닝과 마이크로 USB는 물론, C타입까지 준비돼 있었다. 충전 덕후의 가슴이 마구 두근거린다. 다채로워! 치…친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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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드와 그레이만 사용한 컬러 조합이 참 마음에 든다. 사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아닌데, 너무 호텔스럽지 않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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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자로 배치된 소파는 보기보다 아주 넓다. 소파베드로 쓰기에 충분할 정도다. 일반적인 호텔 객실은 침대에 누워 TV를 볼 수 있게 설계돼 있는데, 여기선 TV를 보는 공간과 침실이 완벽히 분리돼 있다. 덕분에 밤늦게까지 넷플릭스를 보다 스르륵 잠드는 일은 없었다. 자정이 조금 넘어서 졸음이 밀려오길래 침대에 누워 기절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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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켜보니 흥미로운(?) 채널이 나온다. 실시간으로 현재 비행기 스케줄을 표시해주더라. 공항 근처 호텔은 원래 이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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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더. 공간을 만들 때 TV와 스피커가 들어갈 자리를 완벽하게 계산하고 짜놓았다는 점이 눈에 띈다. TV 아래 쪽으로는 블루투스 사운드바가 길게 자리하고 있다. 자기 사이즈에 딱 맞는 공간에 퍼즐처럼 들어찬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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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심심한 공간에 포인트를 주는 요소는 바로 조명. 호텔 조명치곤 상당히 실용적인 편이다. 글래드 호텔에 설치된 것도 이와 느낌이 비슷하다. 침대 좌우에서 독립된 개인 조명으로 사용할 수 있으며, 책상 조명도 따로 설치돼 있다. 모던하고 깔끔하다. 이 작은 객실 하나에서도 침대에 누운 사람과, 아직 잠이 오지 않는 사람, 책상에 앉은 사람, 쇼파에 앉은 사람의 시간이 완벽히 분리되는 것 같은 느낌. 오히려 그래서 더 집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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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역시 좁고 긴 복도식 구조다. 화장실, 옷장, 파우더룸, 세면대, 욕조가 일렬로 배치돼있다. 다른 곳에서 보지 못한 세련된 방식으로 공간을 계속 쪼개고 있다. 가운데 옷장이 있기 때문에 화장실과 욕조가 양 끝으로 떨어져 있는데, 나는 이 점이 조금 불편했다. 볼일 보고 씻으러 가는 동선이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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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에 놓여있는 사해소금은 질이 아주 좋다. 한 웅큼 넣고 따뜻한 몸을 담그면 피부가 매끈해진다. 아주 근사한 뷰는 아니더라도, 욕조 옆의 작은 창으로 바닷가가 내다보이는 것이 킬링포인트인데 이날은 즐길 수 없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인터스텔라급 ‘화이트아웃’ 전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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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니티는 평범. 다른 호텔과 다르게 클렌징 폼을 제공하는 게 차별 포인트다. 매번 브랜드를 바꿔가며 제휴하는 것 같다. 예전에 네스트 호텔에 처음 왔을 때, 슬로가닉이라는 오가닉 화장품 브랜드를 알게 되었는데 피부에 잘 맞아서 꽤 오래 사용했다. 주변 사람들한테 여러 개 선물도 했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던 기억이 있다. 이번엔 아이오페의 클렌저가 있었다. 힙한 브랜드를 발굴해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평범해서 조금 아쉬웠다.

자, 밥 먹을 시간이다. 호캉스의 꽃이 룸서비스라는 건 잊지 않으셨겠지. 영종도 끝자락에 위치한 네스트호텔은 차를 타고 조금 나가지 않으면 밥 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 덕분에 룸서비스 인기가 아주 높은 편. 그 중에서도 베스트 메뉴는 ‘네스트 김치볶음밥’이다. 가끔보면 호텔 객실보다 이 김볶이 더 유명한 것 같다. 여러분도 네스트 호텔이라는 키워드로 조금만 후기를 검색해보면 눈치채실 수 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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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까지 와서 시켜먹을 정도면 무지하게 맛있다는 뜻이다. 정말 맛있다. 매번 다른 메뉴를 고민하다가 어김없이 김치볶음밥을 주문하고 만다. 문제는 이걸 팔아서 건물이라도 하나 더 올릴 작정인건지, 올 때마다 가격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 내가 처음 왔을 때보다 5,000원은 더 비싸진 것 같다. 내가 이날밤에 먹은 김치볶음밥은 무려 2만 9,000원. 객실 요금은 비싼 편이 아닌데 룸서비스 요금은 그에 비해 비싼 편이다. 갑자기 볶음밥 열변을 토했더니 또 먹고 싶어진다. 폭리에도 불구하고 주문하게 되는 그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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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음날 오전 비행기를 타야해서 조식은 예약하지 않았다. 하지만 1층에 위치한 레스토랑 플라츠의 조식은 꼭 한 번 가봐야 할 가치가 있다. 뷔페 퀄리티도 좋지만 아침에 보는 풍경이 너무나 근사하기 때문. 시간 맞춰 내려가면 시원하게 뚫린 통유리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객실에 묵지 않더라도 이곳의 브런치만을 위해 오는 객이 많을 정도로 엣지있는 공간이다. 영종도의 갈대마저 이국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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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을 앞둔 긴장감과 날씨가 주는 서스펜스가 합쳐져 애초에 의도하던 것과는 장르가 달라졌지만, 좋은 휴식이었다. 군더더기 없이 설계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개성있는 공간. 콘크리트 외벽에 네스트 호텔이라고 각인된 글씨만 봐도 마음이 설렌다. 여전히 인천에서 가장 힙한 스테이케이션으로 누릴 수 있는 곳. 김치볶음밥 가격만 그만 올렸으면. 오늘 리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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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