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H다이어리] 생일 축하해

생일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좋은 일이 없는데도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생일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좋은 일이 없는데도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2018. 08. 24

때는 열아홉. 첫 수능을 마친 에디터H의 겨울은 우울하고 잉여로웠다. 서러울 것도 좋을 것도 없는 성적표를 받았다. 내 수준에 딱 맞는 어중간한 점수였다. 하지만 인지부조화가 심했던 10대의 나는 “이 성적표를 받아들일 수 없어!!!”라며 재수를 외쳤다. 현명한 우리 엄마아빠는 알고 있었다. 나란 애가 여기서 1년을 더 공부한다고 홍해를 가르는 점수의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재수금지령을 받고 돈암동 인근의 한 여대에 합격했다.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그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그냥 남학생들과 손잡고 캠퍼스를 뛰놀고 싶었다. 학사경고를 받아서 1학기 만에 자퇴하고 반수를 시작했다는 건 미래의 이야기다. 언제나 처럼 서론이 길었다. 오늘 주제는 생일.

암울했던 열아홉의 끝물에서 나는 앙큼한 결심을 한다. 다음 카페를 개설하는 것. 클릭 몇 번으로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사람들이 모이는 친목 카페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생년월일로 사람을 검색해서 카페 초대 메일을 보낼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내 낚시에 걸려든 출생 동기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동갑내기들이 모인 카페엔 쉼 없이 새로운 게시글이 올라왔다. 신천역 인근에서 첫 정모를 했다. 몇몇은 꽤 자주 만났고, 그들 중 일부는 사귀다 헤어지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신기한 모임이었다. 우리의 공통점은 오직 주민등록번호 앞 6자리 뿐이었는데 말이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때 만났던 친구들 중 대부분은 연락이 끊겨 더 이상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제는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멤버들만 남아 가끔 안부를 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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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익을 먹었다]

지난 일요일은 내 생일이었다. 나이들면 태어난 날 따위야 심드렁해진다던데, 난 여전히 내 생일을 좋아한다. 1년치 축하를 한꺼번에 받는 듯한 다정함이 좋고, 케이크 위의 촛불을 불어 끄는 순간이 좋다. 내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취향을 내 고민해서 건네는 선물이 좋다. 어제는 금요일이고 오늘은 토요일인데 내일은 내 생일이다. 내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기념일은 1년에 단 한 번 뿐이다. 나머지 날들은 대체로 시시하기 때문에 이 스포트라이트가 퍽 황홀하다. 주책맞은 나르시시즘이라 나무라도 어쩔 수 없다. 그냥 좋다. 축하 받는 것도, 축하 하는 것도. 나는 언제나 행복해지려고 힘껏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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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익을 또 많이 먹었다, 콧바람 잔뜩 들어간 모습]

올해 생일은 평화롭고 안온했다. 주말 동안 세 번이나 생일 케이크를 먹었다. 기분도 달고 입안도 계속 달콤했다. 몇 달 동안 갖고 싶어 했던 물건을 선물 받고, 속물처럼 방긋방긋 웃었다. 일 년 중 가장 사치스러운 날이었으면 했다. 날짜가 바뀌던 자정에 와인을 따서 두 잔쯤 마시고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느지막이 일어나보니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카카오톡에 생긴 ‘오늘 생일인 친구’ 알림 덕분이었다. 말 걸기 머쓱할 만큼 공백이 길었던 사이에겐 좋은 핑계였다. 축하해. 잘 지내지? 다시는 못 볼 것 같던 사이도 축하한다는 말 앞에 녹아내렸다. 진동이 울릴 때마다 커피와 케이크가 도착했다. 바코드로 보내온 선물과 메시지를 확인할 때마다 참으로 편리한 시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하지 말라고 보내준 양배추즙을 보곤 깔깔 웃다가 코가 시큰해졌다.

생일 카페의 친구들이 모여있는 대화방에도 “다들 축하해 ㅋㅋ”라는 알림이 울렸다. 우리의 생일이었다. 서로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각자의 삶에 어떤 일이 있는지는 속속들이 알 수 없었지만, 틀림없이 오늘만은 마음껏 축하한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었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지만 매년 같은 날을 축하할 수 있다니. 기묘했다. 그리고 그 묘한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왜냐면 누군가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는 건 그 말을 듣는 것 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니까. 같은 날 축하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건 떡볶이에 치즈 토핑을 올린 것처럼 완벽한 경험이었다. 모든 사람이 생일인 대화방. 마치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안전지대 같았다. 토요일과 월요일의 불행이 조금도 스미지 못하는 완벽한 안전지대. 딱 24시간 동안 말이다. 대체 뭘까, 수십 년 전 오늘 태어났다는 것의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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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먹었다, 초는 한 개만 꽂았다]

생일은 흔히 태어났음을 기리는 날이라고 한다. 나는 오히려 태어난 이후의 시간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1년을 살아남고, 2년을 살아남고, 다시 10년, 50년, 60년을 이땅에서 버텼음을 기념하는 날 같다. 대표적인 풍습인 생일 케이크를 생각해보자. 빵 위에 발린 크림 위로 초를 꽂는다. 그 사람의 나이대로. 긴 초는 10년, 짧은 초는 1년을 의미한다. 나이만큼 불 붙인 촛불을 불어 끄면서 소원을 빈다.

모두에게 생일이 공평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있다. 누군가는 와인잔 앞에서 폭죽을 터트릴 때, 누군가는 불행한 하루를 토해내고 있겠지. 그래도 잘 살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은 거다. 슬픈 얘기지만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를 그릴 수 있을 만큼 좋은 날은 자주 오지 않는다. 여름은 끈질기고 겨울은 지독하다. 살아간다는 말보다 버틴다는 말을 자주 쓴다. 사람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밞는 일에 점점 인색해진다.

생일의 특별함은 여기에 있다. 좋은 일이 없는데도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대단한 일 하나 이뤄낸 것도 없는데, 그날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축하를 받는다. 마음껏 서로의 영역에 들어가 축하해줄 수 있다. 빨간 동그라미가 있으니까.

“매년 이렇게라도 연락되어서 좋다” 생일 카페의 대화방의 누군가 말했다. 누구는 결혼을 했고, 누구는 결혼 생각이 없다는 얘기를 한참 떠들었다. 조만간 성수동 곱창집에서 만나자며 메뉴 검색까지 했지만 각자 바쁜 우리가 진짜 만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는 내년에도 같은 날짜가 되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축하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할 것이다.

“생일 축하해” 그 말이 참 좋다. 일요일,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토요일. 모든 날짜에 태어난 누군가의 생일에 그 말을 건네고 싶다.

About Author
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