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만화평론가 이재민이다. 가을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이런 날씨가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계절이다. 1년에 며칠 안되는 트렌치코트를 마음껏 입을 수 있는 계절이지만 누군가에겐 1년의 응원이 결실을 맺는 계절이기도 하다. 옷장 한켠에 잘 걸어두었던 ‘야구잠바’가 진짜 ‘야구’ 잠바인 사람들에겐 10월은 가을 야구의 계절이다.
하지만 가을야구는 모두에게 허락되진 않는다. 다섯개의 팀이 가을야구에 진출하고, 단 한개의 팀만이 우승팀이 된다. 그깟 공놀이에 울고 웃는 사람이라면 가슴뛰는, 또는 <슬램덩크>의 김수겸처럼 ‘내가 없는 곳에서의 No.1 다툼은 하지 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빠져들만한 웹툰들을 골라왔다.
1. 퍼펙트 게임

<경이로운 소문>으로 잘 알려진 장이 작가의 데뷔작이다. 벌써 내년이면 20년이 되는 작품이라 초반부에는 ‘이게 뭐야?’ 싶을 수도 있지만, 절치부심하고 돌아온 3부부터 작화마저 매력적으로 변한다.
<퍼펙트 게임>이라는 제목을 보면 압도적인 피칭으로 리그를 제패하는 이야기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주인공 오찬호는 취준생에서 회사원으로, 그러면서도 야구를 놓지 않는다.
사실 작품 속 인물들은 전혀 ‘퍼펙트’하지 않다. 생선가게 사장 ‘고등어 강’ 강용식, 갓난아기 육아를 하는 9급 공무원 정다봉, 팀원이자 백수인 동생들에게 공짜로 수제비를 내주는 속깊은 희옹의 형, 동화작가 지망생 찬주, 60세 감독겸 투수, 전직 목수 김현수 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한데 섞여 있다.
일단 멤버만 봐도 야구를 제대로 할까 싶어지지만, 이 사람들은 정말 야구에 진심이다. 그리고 야구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태도도 그렇다. 바로 거기서 이 작품의 참맛이 나온다. 20년이 다 되어가지만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사람 사는 냄새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말로는 다 하기 어려운 삶의 궤적이 야구로 터져나오는 순간, 이해 못할 공놀이를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만화다. 야구가 어려운 사람이라면, 일일극처럼 소소하게 웃기다가 사람을 울리는 웹툰이니까, 지금 한번 달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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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리듬 앤 베이스볼

한국에서 야구만화의 양대산맥이라고 하면, 앞서 소개한 장이 작가와 엘리트 스포츠를 했던 황지성 작가를 꼽을 수 있다. 초-중학교에서 야구를 했던 황지성 작가는 데뷔작부터 모든 작품을 야구를 소재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이 만난 <리듬 앤 베이스볼>은 한국 야구만화의 마일스톤이 될 수 있는 작품이다.
2025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되기도 한 <리듬 앤 베이스볼>은 은퇴를 계획하고 있던, 서로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1, 2위팀의 이향기와 조진이 주먹다짐을 벌여 방출당한데서 시작한다.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이 투수와 포수로 합을 맞춰 재창단하는 울브스에 입단하며 다시한번 야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운다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즐거움은 현실에 구현 불가능한 것을 말이 되도록 구현하는데에 있다. 그리고 <리듬 앤 베이스볼>은 현실에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여겨지던 많은 것들을 ‘말이 되게’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 쌓였던 오해를 푸는 것, 남들이 다 안된다고 할 때 다시 도전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쓰러지고 실패하고 상처받는 자신과 동료를 위로하는 것.
그렇게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것이 이뤄지면, 우리는 ‘낭만적’이라고 한다. 사실 우리가 야구에 울고 웃는것도 그놈의 낭만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작품이 줄 수 있는 낭만과 야구가 줄 수 있는 낭만을 모두 잡은 작품이 <리듬 앤 베이스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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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낫오버

‘아니 야구만화라더니 무슨 아저씨 이야기만 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부터 시작이다. <프레너미>라는 테니스 만화로 데뷔해 충격을 줬던 돌석 작가의 차기작인 <낫오버>는 포수와 투수, 배터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자기확신에 걸맞는 실력을 갖춘, 천재라는 찬사에 익숙한 포수 정노을은 처음으로 자신의 야구에 대한 불안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부모의 학대를 겪으면서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틀 안에 가두고, 진짜 자신을 감추며 살아온 송다빈.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 만나 일으키는 시너지가 놀라운 작품이다.
야구에 대해서 전혀 몰라도 상관없다. 꿈을 향해 다가가는, 실패 앞에 쓰러지지 않는 소년과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을 숨겨왔던 소년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지 않기는 어렵다. 여기에 20년 전 영광의 시대를 되돌리기 위해 나타난 감독까지.
고교야구에선 누구나 프로에 가는 게 아니고, 내 실력을 보여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실력은 있되, 그 실력을 만개시킬 계기가 아직 없었던 둘에게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 야구는 타임아웃이 없는 스포츠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미숙함을 확인하고,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스포츠기도 하다. 아직 미숙한 고등학생들이 <낫 오버>를 외치는 과정이 여기에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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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닝샷!

승리의 순간만 있으면 좋겠지만, 쓰라린 패배의 순간도 있다. 강견-시바견 콤비의 <위닝샷!>은 그저 그런 공 때문에 패전처리 투수로 쓰이던 주인공 안시윤, 독단적이지만 노력을 멈추지 않는 포수 백태오, 압도적인 재능에 비해 안타까운 인성을 가진 현강인까지. 오합지졸이라기엔 강하고, 끈끈한 팀이라기엔 경험이 부족한 신생팀, 미르고등학교를 다룬다.
스포츠 만화의 완성도를 가르는 많은 조건 중에 하나느 주인공이 아닌 인물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슬램덩크>의 안경선배가 대표적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흘린 땀방울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가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 아무리 대단한 천재라고 해도 혼자서 ‘하드캐리’ 할 수는 없다. 또, 천재와 경쟁하는 팀원들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위닝샷!>은 천재에게 밀려났지만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후보선수부터 노력하는 선수들에게 자극받아 더 멀리 나아가는 천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을 보여준다. 결과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미지에 도전하는 뜨거운 청춘이 진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스포츠 만화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테마 중 하나는 ‘소년에서 남자로’다. 패배와 좌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도전하는 자세를 배우고, 승리의 경험을 넘어 힘껏 부딪혀온 라이벌에게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위닝샷!>은 단순히 뽀송한 소년이 거친 남자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정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순간을 그린다. 그런 매력적인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건, 스포츠 만화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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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프트

2027년도 신인을 선발하는 KBO 드래프트는 지난 9월 21일에 개최됐고, 프로에 지명받은 건 총 110명에 불과하다. 한 학년에 약 1천명, 총 3천명 가량의 엘리트 야구선수가 있는데, 드래프트를 신청하는 고3 선수는 약 850명 내외다. 여기에 대학(졸업예정 및 얼리드래프트)선수 400여명까지 더하면, 1200명 내외의 선수가 110개의 자리를 놓고 매년 경쟁한다. <기프트>는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그런 상황을 너무나 잘 아는 주인공 민용은 프로에서 좌천되어 고등학교 감독이 됐다. 선수들의 ‘재능’을 볼 수 있는 민용은, 타고난 재능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SS급 재능을 가진 태훈을 키우기로 마음먹고, 선수단에게 신임이 두터운 주장 승일에게는 ‘투수로는 가망이 없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13화에서 민용은 스스로 말 한 것처럼 “야구는 철저히 결과의 스포츠다. 누구도 홈에 들어오지 못한 주자들에게 ‘2루, 3루까지 간 것도 잘 한 거야’라고 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여기까지는 차가운 현실을 다시한번 일깨우는 극사실주의 만화처럼 보이지만, <기프트>가 스포츠 만화로서 의미를 가지는 건 그 이후의 장면들에 있다. ‘노력과 성과는 비례하지 않는다’거나, ‘노력은 누구나 한다’고 언뜻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대사는, 묵묵하게 땀을 흘린 선수들만이 노력의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말로 바뀐다.
우리는 흔히 성장에 수직적 방향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기프트>는 수직적 성장보단 수평적 성장을 조명한다. 재능이나 능력은 바뀌지 않더라도 태도와 입장을 바꾸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십분 활용하는 방식으로 성장하는 인물을 다룬다. 감독이라는 입장에서 스승으로 변화, 즉 성장하는 민용과 꿈을 향한 도전의 갈림길에서 꿈을 추억으로 바꿔야 하는 선수들, 또 그들의 꿈까지 짊어지고 나아가야 하는 선수의 성장까지. 가장 냉소적인 태도로 시작한 <기프트>는, 어떤 스포츠 만화보다 조용히, 그리고 뜨겁게 타오른다. 곧 tvN 드라마에서 김우빈 배우가 주연을 맡아(웹툰을 보고 나면 외모 버프가 상당하다고 느끼게 될 것) 드라마로도 만날 수 있으니,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미리 읽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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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out Author
이재민
만화평론가이자 만화 전문 에디터. 서울웹툰아카데미에서 만화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