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21세기 사람들! 난 에어팟이야. 일련번호는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말라더라. 빨간색 아이폰에 등록된 이름은 ‘경화미의 AirPods’. 경화미가 누구냐고? 지금 나 대신 타이핑 중인 에디터H의 별명이야. 그래, 그 여자.
난 12월 16일에 박스를 뜯기고 나서 줄곧 이 여자의 아이폰에 종속돼 있어. 처음엔 날 자주 안 쓰더라고. 잃어버릴까봐 신경 쓰인다면서 집에 두고 다녔어. 그러다 어느 날부터 날 매일 매일 들고 나가. 요즘엔 하루도 같이 외출하지 않은 적이 없어.
내가 지켜보니까, 이 여자는 음악을 많이 듣는 편이 아니야. 음악 취향도 들쭉날쭉해. 지금만 해도 그래. 방금은 애플뮤직에서 마마스앤 파파스를 듣더니, 멜론으로 넘어가서 아이유를 듣기 시작했어. 다음 노래는 힙합이야. 쇼미더머니를 보나봐… 한 마디로 정신머리 없는 스타일이야. 길거리에서 혼잣말도 잘해. 시리를 자꾸 부르거든. 주로 하는 말은 “다음 곡”
음악은 출퇴근 길에만 듣고 일할 땐 그냥 귀에 날 꽂아두고 있어. 아무것도 안 들으면서 말이야. 왜 그러는지 봤더니, 손으로 전화받는 게 이제 귀찮대.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면 검지 손가락으로 날 톡톡, 두 번 거칠게 두드려. 그럼 전화받을 수 있거든. 이 더블탭은 마법의 동작이야. iOS 업데이트 후엔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지니까 기대해.
이런 여자가 용케도 날 잃어버리지 않고 8달 넘게 쓴 거 보면 신기하지? 사실 우여곡절이 많았어. 내가 집도 절도 없어 보이지만, 내 명의로 된 주택이 있다고. 하얗고 맨들맨들한 에어팟 케이스말 이야. 거기다 잘 넣어두기만 하면 되거든. 보관하기도 쉽고, 배터리 충전도 무시무시하게 빠르다고. 근데 H는 늘 허둥지둥 다니는 버릇이 있어서, 다 쓰고 나서 급할 땐 날 아무 데나 밀어 넣곤 해. 바지 주머니 같은 데 말야. 그래서 나중에 텅 빈 에어팟 케이스를 열어보고 당황해서 빨래 바구니를 뒤진 적이 한두 번이 아냐. 쯧쯔. 한심해.
기분 나쁜 건 말이야, 지하철에서 나랑 똑같이 생긴 걸 귀에 꽂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창피해하더라고. 본인도 저런 모습으로 보일까 봐 당황스럽다나? 참나, 내가 어디가 어때서? 내가 왜? 때때로 날 부끄러워 하면서도 매일 같이 끼고 다니는 이유는 하나래. 이제 다시 선 있는 애들 만날 자신이 없대나? 나처럼 자길 편하게 해준 이어폰은 없었대. 내 모든 행동이 물 흐르는 것처럼 아름답다면서 말야. 쑥스러워서 더 이상은 내가 직접 말 못하겠다.
H가 신나게 떠들었다고 하니까 영상으로 보는 게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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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경화
에디터H. 10년차 테크 리뷰어. 시간이 나면 돈을 쓰거나 글을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