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6년째 디에디트에서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짬날 때 써둔 메모들을 모아 뉴스레터로 보내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과몰입도 지겨울 때 읽으면 좋을 책 4권을 골랐다. 몰입은 즐거운 거라지만 하루 24시간을 과몰입으로 꽉 채우는 것도 정신건강에 해롭다. 마침 날씨도 기가 막히잖아? 바쁜 마음만 잘 가라앉히면 어디든 엉덩이 붙이고 책 몇 쪽 읽기 좋은 계절이다.
[1]
<아주 오래 앉아있는 사람을 위한 책>
“동물의 몸은 나무나 풀 같은 식물처럼 가만히 있는 데 적합한 구조가 아닙니다.”

‘이 제품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수는 충분히 많은가?’ 제품을 만들 때 타겟 설정은 필수다. 영화라면 극장에 올 사람을, 옷이라면 걸칠 사람을, 음식이라면 누가 먹을지. 이 책의 타겟팅은 훌륭하다. <아주 오래 앉아있는 사람을 위한 책>이라니.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대충 백지영 짤과 함께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며 책을 펴 들었다.
“‘같은 자세로 가만히 있기’라는, 동물의 몸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해야만 하는 일이 바로 사무직입니다.” 저자는 이 당연한 전제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가만히 있으면 굳는다. 오래 앉아있으면 가만히 있게 된다. 그래서 ‘자주 움직이기’가 중요하다. 알람을 맞추거나 등받이 없는 의자를 구해 어떻게든 움직일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라는 것이다.
이미 굳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솔루션도 있다. 팔을 옆으로 들 때 아프다면 ‘가시위근’이 뭉친 거야. 아래 그림 속 색칠된 부위를 가볍게 쓸어내리면 좋아질 거야. 머리를 돌릴 때 아프다면 어깨올림근을, 상체를 숙일 때 등이 아프다면 척추세움근을 쓸어내려줘. 간단한 그림과 함께 어깨, 등, 목 부위의 다양한 근육을 설명해주니 내 몸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되는 느낌이다. 매번 뭉친 근육을 힘줘 누르고, 잠깐의 시원함 후에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와 힘들었던 사람이라면 이 책이 제안하는 마사지를 꼭 해보시길.
“노력하지 않는 것도 때로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주 오래 앉아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바꿔 말하면, 쉬기를 게을리하는 사람들. 쉬기에 젬병인 사람들. 이 책을 덮으려는데, 책날개에 적힌 다른 책 제목이 눈에 띄었다. <쉬어도 쉰 것 같지 않은 사람을 위한 책>. 역시 타겟팅이 훌륭하다.
- <아주 오래 앉아있는 사람을 위한 책> | 엔도 겐지 | 사이드웨이 | 1만 6,000원
[2]
<그만 배우기의 기술>
“결국 이 모든 것은 배움이라는 여정을 사랑하는 일이다.”

“준비의 준비를 하고 있어요.” 내가 자주 대는 핑계다. 시작을 미루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늦어진 일정을 감추기 위해 자료 무더기를 또 추가한다. 그런 나의 과도한 준비성을 저격하는 한 문장. “내가 진짜 찾고 있던 건 배움이라는 이름의 숨을 곳이었다.” 책 <그만 배우기의 기술>이 알려주는 건 ‘그만 숨기의 기술’이다.
왜 숨어? 간단하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괜히 있나. 시작은 원래 어려운 거다. 두려워하는 나를 인정해라. 그리고 물어라. ‘정확히 뭐가 두렵니?’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숨지 말고 뭘 하면 돼? 일을 하는 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정보만 모아라. 저자는 이를 ‘적시 정보’라 부르는데, 나는 이 개념이 어려웠다. 늘 정보는 다다익선이라고만 생각했지, ‘최소한의 정보’만 모으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이다. 저자의 조언대로 ‘나중에 보기’ 폴더를 만들었다. 비교적 덜 중요한 정보는 여기에 버린다. 버리고 버리다 보면 ‘적시 정보’만 남는다. 거창한 변화는 아니지만, 시작은 반이다.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을 생각이 없다. 적시 정보는 이미 내 머릿속에 다 들어왔으니까. 사사분면 그래프를 그려 우선순위를 세우기.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을 땐 개인 사명문 써보기. 그리고 ‘나중에 보기’ 폴더를 만들어 불필요한 정보 버리기. 어쩌면 책을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에필로그가 끝날 때까지 책을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준비의 준비는 이제 그만하자. 책 뒤에 숨지 않겠다.
- <그만 배우기의 기술> | 팻 플린 | 어크로스 | 1만 8,800원
[3]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
“그러니 내 몸이여 잘 들어라. 대단히 사랑하진 않지만 너를 너로 인정한다.”

누구나 별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당신은 무엇을 하십니까. 나는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유튜브 앱을 켜서 허송세월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을 끌어안고 심호흡하기도 한다. 이 사람은 일기를 썼다. 아니 그렸다. 낙서 같은 일기를.
일기쓰기의 좋은 점은 눈치 볼 독자가 없다는 것.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에 수록된 알 듯 말 듯한 낙서들은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상관없다. 오히려 좋다. 해석할 필요 없는 그림들이 가득한 페이지를 휙 휙 넘기고 있으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의미를 발견하고, 누군가를 롤모델로 삼고 그러다 보면 나의 부족함이 도드라져 보이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나를 조금도 몰아붙이지 않는다.
“난 지금 취약하다. 어딘가에 구멍이 났고 모든 게 드러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취약함을 부끄러워하고, 자책하고, 외면하다가 결국은 받아들인다. “그러니 내 몸이여 잘 들어라. 대단히 사랑하진 않지만 너를 너로 인정한다.” 인정하고 나면 그제야 보인다. 내가 왜 지금 취약해진 건지. 그럴 때 나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 따져 묻다 보면 마음이 조금 놓인다. 지금 잠시 꼬인 거지, 인생이 망한 건 아니잖아?
조울증에 시달리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계발의 신으로 거듭나는 급반전에는 몰입하기가 어렵다. 거짓말 같으니까. 이 책은 100만큼 힘들던 사람이 90만큼 힘들게 된 이야기다. 10을 덜어낸 자신에게서 희망을 찾는 이야기다. 감동이 있다.
- <별수 없어서 그린 일기> | 루비 앨리엇 | 종이섬 | 1만 6,800원
[4]
<인터메초>
“어떻게 되는지 두고 보자. 어쨌든 계속 살아보자.”

좋든 싫든 쇼츠는 불가항력이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밥 먹기 전 식당 테이블에서,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잠들기 전 침대에서 나는 천하제일 쇼츠대회 심사위원이 된다. 요즘 음악들의 승부처가 도입부 10초라면, 쇼츠는 더 짧다. 3초 안에 손가락이 화면을 쓸어올리면 불합격. 3초를 넘기면 합격. 손가락을 놀리는 사이 우리는 ‘단순하고 빠른 결론’에 익숙해진다.
쇼츠를 보다가 길고 복잡한 내 인생이 지겨워지면 어떡하지? 걱정을 달래는 마음으로 두꺼운 소설을 집어든다. 특별한 설정도 없고, 도파민 자극하는 사건도 없고, 다 읽고 난 후에도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한줄로 요약하기 힘든 그런 소설. <인터메초>가 딱 그렇다.
아이번과 피터는 형제다. 아이번은 체스 신동이고, 피터는 변호사다. 아이번은 체스 행사에서 만난 마거릿과 사랑에 빠졌고, 피터는 실비아와 나오미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인간관계가 대부분 그렇듯, 묵은 문제가 있다. 문제를 언제 어떻게 꺼낼 것인가.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해결이 꼭 필요한 문제인가. <인터메초>는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진 다섯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묵혀둔 고민에 맞닥뜨리는 이야기다.
428쪽에 적힌 문장들을 통째로 옮겨적었는데, 핵심은 이 한 줄이다. “결국 삶은 그물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유로운 삶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그 원인은 타인이며, 인생은 점점 더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훈훈한 마무리가 뻔하게 느껴지기는커녕 안도감을 준다. 해피엔딩을 투정하기보다는 그들의 다음 달, 다음 해를 응원하고 싶어졌다.
- <인터메초> | 샐리 루니 | 은행나무 | 2만 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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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자이언트 슈프림 8>
“네가 재즈에 보상받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마지막 한 권은 언제나 그렇듯 주제와 상관 없지만 추천하고 싶은 책을 골랐다.
만화를 좋아한다, 라고 말하기엔 읽은 책이 몇 권 없다. 많이 읽고 당당하게 좋아하고 싶어서, 메이저 시장 일본에서 쏟아져나온 명작만화들을 꾸준히 쟁여둔다. 문제는 읽는 속도가 안 난다는 것. 일과 육아 사이 남는 시간 쪼개 책과 영화를 보다 보면 만화는 뒤로 밀리기 쉽다. 그래도 한 달에 한두 권씩은 보려 한다.
지금 매달 한 권씩 읽는 만화는 우주형제, 진격의 거인, 그리고 블루 자이언트다. 만화에는 무모한 꿈이 있다. 보이지도 않는 먼 곳을 꿈꾸고, 절망 속에서 꿈꾸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더 좋아하기 위해 꿈꾸는 사람들이 나온다. 무모함을 까먹기 싫어서, 영양제처럼 만화를 먹는다.
- <블루 자이언트 슈프림 8> | 이시즈카 신이치 | 대원씨아이 | 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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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