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6년째 디에디트에서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 에디터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시간이 날 땐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만들어 보내기도 한다.
이번 달에는 “나이만 자꾸 먹네” 싶을 때 읽으면 좋을 책 4권을 골랐다. 그중 한 권인 <일본 광고 카피 도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저는 두렵지 않습니다. 불안감이 하나 있으면 희망을 두 개 찾아요. 시간이 지나면서 얻은 강함과 부드러움입니다.” 각자의 희망을 찾아보시길.
[1]
<레슨>
“관성 자체도 하나의 힘이었다.“

가장 자극적인 버전의 줄거리 요약. 아내가 집을 떠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된 아기를 두고. 형사가 찾아와 날 의심한다. 미치겠다. 그녀는 왜 떠났을까. 난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이렇게 막막할 때 떠오르는 게 왜 학창시절 좋아했던 피아노 선생님일까… 음, 자극적이긴 한데 이런 요약으로는 <레슨>의 훌륭함을 표현할 수 없겠다.
다소 심심한 버전의 줄거리 요약. 한 남자가 태어난 후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일대기. 여기서 ‘한 남자’는 앞에서 말한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남자, 그러니까 갓난아기와 덩그러니 남겨진 그 남자가 맞다. 아내의 부재는 과거로의 틈을 벌리고, 남자가 첫 피아노 레슨을 받던 그 순간으로 우릴 데려간다. 시간여행은 나도 했다. 책을 읽는 내내 과거의 장면들이 여럿 떠올랐다. 고등학교 건물에 처음 들어가 본 날의 서늘함, 금요일 낮 급식소에서 풍기던 반찬 냄새까지. “어떤 영화는 관람이 아니라 체험된다”는 이동진의 한줄평처럼, 소설도 체험될 수 있다. 나는 달이 아니라 과거를 체험했다.
내가 왜 그 순간을 잊고 있었을까? 아니, 잊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남자의 입을 빌려 저자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제일 먼저 사라지는 건 포착하기 힘든 자신이다.” 포착하지 못했던 나의 일부가 <레슨>으로 되살아났다. 나의 미래를 바꿔줄 책도 좋지만, <레슨>처럼 나의 과거를 되살려주는 책도 소중하다. 내가 했던 말, 내가 들었던 말, 혹은 하려다 삼킨 말까지 제3자의 눈으로 다시 볼 수 있었다. 내 인생이 TV에 방영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알고리즘이 골라주는 ‘맞춤 추천’을 믿지 않는 편이다. 검색하지 않고 재생하지 않은 나의 취향을 너는 아직 몰라. 근데 만약 어떤 알고리즘이 <레슨>을 나에게 추천해줬다면 난 거리낌없이 사용료를 지불할 것이다. 물론 나는 예쁜 표지와 작가 이름에 혹해 이 책을 골랐지만.
- <레슨> | 이언 매큐언 | 문학동네 | 2만 2,000원
[2]
<오렌지족의 최후>
“누구에게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들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송아람 작가의 그래픽 노블 <자꾸 생각나>를 홍상수 영화 몰아보듯 재밌게 봤던 기억이 있다. 이번 책도 순식간에 다 읽었다. 방황하는 10대 시절의 오하나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구경하듯이 봤다. 그가 처한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 때로는 그가 자초한 상황을 한심해하기도 하면서.
혹시 저의 삐딱함이 느껴지셨는지…? 재밌었지만 막 엄청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누군가는 공감하겠지만, 누군가는 분명 나처럼 ‘몰랐던 세계’를 구경하듯 읽을 것이다. 말 그대로 간접 경험. 아… 일진들은 이런 이유로 일진이 되고, 돈 많은 사람들은 이런 외로움을 겪고, 유학 가면 이런 어려움이 있겠구나.
오하나의 독백에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역할놀이’다. 나도 나름대로 나의 역할에 심취해 연기를 하긴 했다. 착하고 수더분한 아들, 별로 열심히 안 하는데 성적은 잘 나오는 학생, 잘 웃고 성격 좋은 친구, 뭐 그런 것들. 연기의 방향성이 오하나 너랑은 좀 달랐던 것 같아…
책을 덮고 나서야 김지연 작가의 아름다운 추천사를 읽었다. “죽을 힘을 다해 1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오하나를 알아볼 것이다.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뒤섞여 행패를 부리던 지독한 시절의 얼굴을. 나를 감추고 나를 연기하며 진짜 내가 되지 못할까 봐 안달이 난 표정들을. 그 무모한 시간들 덕분에 나로 살게 되었음을.” 음, 나는 오하나를 못 알아봤는데… 나는 죽을힘을 다해 10대를 보낸 사람이 아닌가?
아니, 추천사를 보며 떠오른 건 나의 20대와 30대, 심지어 어제와 그끄저께였다. 지독하게, 안달이 난, 그 무모한 시간들. 10대 때는 운 좋게 감출 수 있었지만 이제 더는 못 감추고 드러낼 수밖에 없는 서투르고 치열한 나. 그래서 내가 이 책이 재밌었구나. 일진도 아니었고, 부유하지도 않았고, 유학도 가본 적 없는 내가.
- <오렌지족의 최후> | 송아람 | 미메시스 | 2만 8,000원
[3]
<일본 광고 카피 도감>
“우리들은 훌륭한 과거가 될 수 있을까?”

한 페이지를 꽉 채운 흰 바탕과 그 사이 덜렁 놓인 카피 한 줄. 그걸 보고만 있어도 떠오르는 이런저런 잡생각들. 맞아, 책은 이런 여백이 허용되는 곳이지. 나는 이런 책다운 책을 만나면 정성 들여 소문내고 싶어진다.
“카피라이터가 가장 좋아하는 칭찬은 아마 ‘카피 잘 썼다’가 아니라 ‘맞아 그러네’라는 말일 것.” 좋은 카피는 모두가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보통의 언어’로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한 번 더 짚어준다. 그러면서도 주입하고 있는 메시지를 들켜서는 안 된다. 어려운 일이다.
책에 실린 카피들을 보면서 카피의 정의를 다시 써봤다. 카피란, 내 뇌를 지름길이 아닌 길로 걷게 하는 것. 지름길 좋지. 근데, 가끔은 ‘빨리’ 도착하기 싫을 때도 있지 않나? 그냥 ‘산책’을 하고 싶었던 거라면? “연인과 함께 가기 좋은 스팟”이 도쿄 스카이트리를 홍보하는 지름길이라면, “지상 350미터에서 둘의 거리는 0이 된다”는 좀 더 둘러가더라도 데이트의 진짜 목적에 더 가까운 카피 한 줄이다.
책을 다 읽고 표지를 다시 보니 처음에 못 봤던 부제가 눈에 띈다. “모든 마음은 카피할 수 있다.” 충분히 책 제목이 될 수 있을 법한 카피인데, 부제의 자리로 밀려난 건 역시 지름길이 아니라서일까. 아마 제목 선정 회의에서 <일본 광고 카피 도감>에 패했을 것이다. 덕분에 책은 잘 팔리고 있다. 씁쓸해할 필요도 없다.
- <일본 광고 카피 도감> | 오하림 | 서교책방 | 1만 8,800원
[4]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사람에겐 누구나 나가고 싶은 자기만의 벽장이 있다.”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사람은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운이 없다고 해야 할까. 제목부터 사람 헷갈리게 하는 이 소설의 초반부는 회수 안 된 떡밥들로 가득하다. 전염병에 걸려 회사에서 쫓겨난 우식은 온라인상의 ‘오염’을 지워준다는 ‘디지털 세탁소’에 입사한다. 그런데 갑자기 날 스카웃한 동료가 돌연 잠적한다. ‘이 인물, 저 사건, 그 대사들이 어떻게 엮이는 거지?’ 초반 30페이지를 넘길 때까지 몰입이 어려웠다. 긴가민가 한 상태로 책을 읽어나갔다.
“<휴먼북 조기준>의 미리보기 영상을 문자로 가공한 것이 다음의 첫 번째 챕터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이 담긴 ‘휴먼북’을 열람한다는 설정과 함께, 1983년으로 배경이 바뀐다. 당시 소년이었던 조기준은 ‘몸속에 전쟁 바이러스가 흐른다’는 이유로 10년간 외출을 금지당했다. 물론 바이러스 얘기는 거짓말이었다. 10년을 통째로 날려버린 거짓말을 어떻게 용서할 것인지가 어른이 된 조기준의 새 미션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기서부터 작가는 집요하리만치 성실하게 떡밥을 회수한다.
1983년 배경에 전쟁, 독재 같은 단어들이 나오길래 역사적 사건을 다룬 소설인 줄 알았다. 끝까지 읽고 나니, 아주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이야기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니 오히려 지금 훨씬 더 유효한 이야기들. 우리는 남의 더 큰 불행으로 나의 덜 큰 불행을 감춘다. 더 큰 죄를 저지른 사람을 손가락질하며 덜 큰 죄를 저지른 나의 죄책감을 던다. 숨고 싶은 동시에 누군가 내 존재를 눈치채주길 바란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커튼을 치고 벽장에 숨는다.
작가는 지금 사람들이 겪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유심히 관찰하고, 티 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흔한 세태 비판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뒤로 갈수록 짙어지는 따뜻함에 있다. 나는 특히 이 문장에서 위로를 받았다. “방탈출 방법: 일단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 박지영 | 한겨레출판 | 1만 6,800원
+
<메모의 순간>
“모든 의무감, 눈치, 번거로운 것들을 벗겨내고 나면 종이에 남는 것은 자신의 글조차 아닐 수도 있다.”

“나이만 자꾸 먹네” 싶을 때 읽으면 좋을 책 소개는 앞의 4권으로 끝이 났다. 지금부터는 보너스. 신간이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최근 제일 재밌게 읽은 책을 소개하는 작은 코너다.
<메모의 순간>은 핸드폰에 우당탕 적어둔 한두 줄 짧은 문장들이 사실은 매우 소중하다는 걸 깨닫게 해준 책이다. 새해 첫 책을 잘 고른 덕에 올해는 메모를 열심히 하게 되었고, 머리가 가벼워졌고, 내 지난 두 달의 순간순간이 핸드폰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메모를 하면서 고민이 사라졌다. 아니, 사라진 건 아니고 내 머릿속에서 핸드폰으로 옮겨졌다. 머리가 비워지니 몸도 가벼워진다. (이제 운동만 하면 돼)
- <메모의 순간> | 김지원 | 오월의봄 | 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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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