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시계에 대한 글을 쓰는 서지우입니다. 일하다 보면 종종 해외 시계 전문 기자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는데요. 그럴 때면 꼭 물어보는 게 있습니다. 바로 그 나라에서 어떤 시계가 가장 인기가 많냐는 겁니다. 돌아오는 답은 매번 같습니다. “ROLEX.”
롤렉스의 위상은 어느 나라든 비슷한 모양입니다. 롤렉스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시계 브랜드도 아니고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곳은 더더욱 아니지만, 가장 유명한 시계 브랜드가 되었습니다.
아이코닉한 데이토나부터 최근 출시된 랜드-드웰러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계가 유명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핫’한 아이템을 하나 꼽아야 한다면 여전히 서브마리너 아닐까요.
‘잠수함 승무원(Submariner)’이라는 뜻처럼 높은 방수 성능은 물론 일상에서 착용하기 좋은 우아한 외관을 갖춘 시계입니다. 서브마리너는 예물 시계로도, 특별한 날을 기념하는 시계로도, 그냥 일상용 시계로도 인기가 많은데요. 스포츠 워치 분야에서 입지를 다져온 롤렉스 그 자체를 상징하는 시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서브마이너가 어떻게 전설이 되었는지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기. 서브마리너의 탄생
서브마리너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먼저 롤렉스가 거둔 두 가지 성과에 대해 알면 좋을 것 같아요. 하나는 ‘높은 방수 성능’을 인정받았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퍼페추얼 로터’입니다.
롤렉스는 1926년 최초의 방수 손목시계 중 하나인 오이스터를 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젊은 속기사 메르세데스 글리츠가 오이스터를 착용하고 도버 해협 횡단에 도전했습니다. 시계는 바닷물 속에서도 완벽히 작동했고 오이스터의 뛰어난 내구성과 방수 성능을 대중 앞에 각인시켰습니다. 롤렉스는 영국 주요 신문에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는 놀라운 시계(The Wonder Watch that Defies the Elements)’라는 광고를 실으며 브랜드 인지도를 폭발적으로 높였습니다.
그리고 1931년, 롤렉스 설립자 한스 빌스도르프는 퍼페츄얼 로터를 장착한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개발하고 특허를 받았습니다. 핸드와인딩 방식이 손으로 크라운을 감아 시계에 밥을 줘야 한다면, 오토매틱 무브먼트는 무브먼트에 로터가 달려있는 게 특징인데요. 손목 움직임에 따라 로터가 회전하며 자동으로 시계가 와인딩됩니다. 훨씬 편리하죠. 물론 이전에도 오토매틱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브랜드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빌스도르프의 설계는 효율성과 신뢰성을 획기적으로 높여 현대 오토매틱 시계의 표준을 정립했다는 데 의의가 있습니다.
서브마리너는 이 두 가지 커다란 기술적 성과 위에서 탄생했습니다. 빌스도르프는 신제품을 만들며 동료들의 의견을 듣곤 했는데요. 그중에는 롤렉스 임원이자 다이버인 ‘르네 폴 잔느레’도 있었습니다. 잔느레는 롤렉스가 방수 시계로 인지도를 높였다는 점과, 자신의 취미인 스쿠버 다이빙을 기반으로 신제품을 구상했습니다. 다이빙할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물론, 물 밖에서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계. 그게 바로 서브마리너입니다.
잔느레의 아이디어는 곧 개발로 이어졌습니다. 1953년 테스트를 진행할 때에는 세계적인 다이버 자크 이브 쿠스토도 참여했죠. 롤렉스는 1953년 말에 서브마리너 시제품을 출시했고 이듬해 바젤 월드에서 상업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세 가지 버전의 서브마리너가 동시에 나왔는데 그중 다이얼에 ‘서브마리너’라는 문구를 처음으로 새긴 Ref. 6204가 포함됩니다.
시계는 지름 37mm에 검은색 다이얼과 베젤, 롤렉스만의 독특한 인덱스를 갖췄습니다.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입니다. 서브마리너의 첫 모델은 100m 방수를 보장했고, 이듬해부터 200m로 높아졌습니다.
승. 서브마리너 진화 과정
물론 오늘날 서브마리너는 훨씬 현대적인 모습이지만, 전체적인 실루엣은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롤렉스는 시계를 디자인하며 큰 변화를 주지 않는 걸로 유명한데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할 때 디테일에 작은 변화를 주는 식으로 모델들을 업데이트했습니다.
1959년에는 2세대 서브마리너의 시초인 Ref. 5512가 등장했습니다. 빈티지 서브마리너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모델이죠. 1세대 서브마리너에 비해 베젤은 약간 두꺼워졌고 시계 크기도 지름 40mm로 커졌습니다. 서브마리너 최초로 크라운가드도 도입했는데요. 크라운 손상을 방지하고 케이스 내부에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롤렉스는 Ref. 5512를 수년에 걸쳐 점진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중요한 변화는 내부 무브먼트에 있었습니다. 초기에는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지 않은 칼리버 1530을 사용했지만, 1960년대 초반부터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1560과 1570이 적용됐습니다. COSC는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일간 오차가 -4~+6초 범위 내에 유지되는 시계에만 크로노미터 인증을 부여합니다. 정확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셈이에요.
날짜창을 갖춘 서브마리너는 1966년 Ref. 1680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오늘날 서브마리너 데이트 모델의 상징인 3시 방향 사이클롭스 렌즈도 이때 적용됐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빌스도르프가 눈이 나빠 날짜창을 읽기 힘들어하던 아내를 위해 개발했다고 합니다. 1953년 데이트저스트에 처음 적용됐던 사이클롭스 렌즈가 서브마리너에도 올라간 셈입니다. 다이얼 위 서브마리너 문구를 붉은색으로 새겨 수집가들 사이에서 ‘레드 서브(Red Sub)’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1979년 서브마리너에 또 한 번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Ref. 16800에 단방향 회전 베젤이 적용된 것이죠. 오늘날 실제로 서브마리너를 착용하고 다이빙을 즐기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단방향 회전 베젤은 실제 다이버에게 매우 중요한 기능입니다. 다이버는 베젤을 이용해 산소통의 잔여 기능을 계산하는데요. 양방향 회전 베젤의 경우, 실수로 시계가 부딪치면 베젤이 앞으로 돌아가 남은 시간이 실제보다 길게 표시돼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 방수 성능도 기존 200m에서 300m로 향상됐습니다.
1980년대 후반에 출시된 Ref. 16610LN은, 아마도 많은 분들이 전형적인 서브마리너라고 생각하실 법한 모델입니다. 무려 2010년까지 생산됐기 때문이죠. 물론 중간중간 작은 디자인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디자인은 지금과 비슷합니다. 지름 40mm, 두께 13mm에 오이스터 스틸로 케이스를 꾸렸고 베젤은 알루미늄으로 제작돼 무게도 가벼웠습니다. 중고 시장에서도 높은 수요를 보이는 모델 중 하나에요.
전. 서브마리너 최신판
2000년대는 그야말로 과감하고 강렬한 시대였습니다. 힙합과 스트리트 웨어가 글로벌 패션 시장을 장악하고 볼드한 액세서리, 로고 플레이, 브랜드 노출이 강한 스타일이 유행했죠. 서브마리너도 이 흐름에서 자연스럽게 주목받았는데요. 실용적인 다이버 워치였던 서브마리너는 힙합 아티스트의 뮤직비디오와 인터뷰에 등장하며 부와 성공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특히 2000년대 독창적인 컬러와 디자인으로 출시된 모델들은 개성을 강조하는 패션 아이콘으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가장 주목할만한 모델은 2003년 서브마리너 출시 50주년 기념 모델인 Ref. 16610LV입니다. 검은색 다이얼과 초록색 알루미늄 베젤을 갖춰 수집가들 사이에서 ‘커밋’이라고 불립니다. 더 머펫쇼의 그 유명한 개구리 커밋 맞습니다. 서브마리너 역사상 처음으로 브랜드 시그니처 컬러인 그린을 베젤에 적용한 모델이에요.
롤렉스는 2010년 서브마리너의 베젤을 알루미늄에서 세라크롬으로 변경했습니다. 알루미늄은 스크래치에 약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변색이 심하기 때문이죠. 세라크롬은 하이테크 세라믹으로 제작돼 견고하고 긁힘에도 강합니다. 도구 없이도 브레이슬릿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글라이드록 기능도 적용했어요. Ref. 116610LN은 전작 Ref. 16610LN보다 살짝 두꺼워졌지만 가독성이 높아져 출시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요. 내부에는 롤렉스 내부에서도 독보적인 신뢰성을 자랑하는 오토매틱 칼리버 3135를 담았습니다. 2010년대에는 오픈런도 본격화됐는데요. 2018년에는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사기 위해 백화점에 인파가 몰렸고, 유리문을 강제로 개방하려다 사고가 나기도 했습니다.
가장 최근 디자인 업데이트는 2020년에 이뤄졌습니다. 논 데이트 모델 Ref. 124060과 데이트 모델 Ref. 126610LN이 동시에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케이스 크기가 지름 40mm에서 지름 41mm로 미묘하게 커졌고, 러그는 살짝 얇아졌으며 브레이슬릿과 버클 폭이 좁아져 전체적인 균형미가 향상됐습니다. 내부 무브먼트도 업데이트됐습니다. 논 데이트 모델은 오토매틱 칼리버 3230으로, 데이트 모델은 오토매틱 칼리버 3235로 구동합니다. 파워 리저브도 48시간에서 70시간으로 큰 폭으로 늘었어요. 롤렉스만의 파라플렉스 충격흡수 장치 등 최신 기술도 대거 적용됐죠. 크로노미터 인증은 물론 조립 후 자체적인 인증까지 완료했습니다.
다양한 배리에이션을 선보이는 롤렉스답게 2020년에도 오이스터 스틸, 오이스터 스틸과 옐로 골드의 ‘롤레조’ 조합, 화이트 골드 등 다양한 케이스를 선보였습니다. 특히 Ref. 126610LV는 블랙 다이얼과 그린 세라믹 베젤의 조합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커밋과 비슷하지만 살짝 진한 녹색으로 ‘스타벅스’라고 불리는 모델입니다.
결. 서브마리너는 영원할 것
일상에서 즐기는 다이버 워치로 시작된 서브마리너. 하지만 어떤 해외 기자를 만나 제일 인기 많은 시계를 물으면 “롤렉스.”라는 대답이 나올 정도로 아이코닉한 시계가 되었습니다. 롤렉스의 상징이자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죠. 롤렉스는 오랜 시간 아주 조금씩 바뀌었고, 디자인을 언제 업데이트할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합니다. 앞으로도 서브마리너가 롤렉스의 아이덴티티로 굳건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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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우
IT 기자를 거쳐 시계 전문 매거진 에디터로 일하고 있다. 여행처럼 흥미로운 삶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