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객원 에디터 김고운이다. 작년 초 블런드스톤 기사를 작성하면서 블런드스톤 첼시부츠를 구매했다. 보온성이 좋고 방수도 되기 때문에 겨울 한파, 여름 장마 모두 문제없었다. 반바지를 입는다면 더위도 나름 견딜 만했다. 하지만 올해 여름은 달랐다. 아스팔트의 끓는 열기는 가죽에 갇혀 나가지 않았고 피로는 위로 쭉쭉 퍼져갔다. 발이 보내는 구조신호를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찾게 된 게 가벼운 소재의 신발이었다. 그밖에 고려할 조건은 세 가지. 뚱뚱하지 않고, 화려하지 않으면서, 흔하지 않을 것. SNS나 쇼핑 플랫폼을 둘러보며 기준을 충족하는 신발을 세 개를 추렸다. 그라퍼리스 마일드 슈즈, 문스타 짐클래식, 노베스타 스타마스터.
고르고 보니 모두 캔버스 스니커즈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신어 보며 비교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모두 오프라인에서 신어 보기는 어려운 상황. 온라인에서 차근차근 비교하는 수밖에. 여름은 끝나가지만 글을 시작하는 지금, 세 가지 신발을 사고 싶은 마음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과연 어떤 신발이 나를 구원할까. 나와 같은 상황의 독자라면 함께 고민해 보는 것도 좋겠다.
1. 헤리티지
문스타_ 최근에서야 국내에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생겼다. 그래서 자칫 신생 브랜드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문스타는 무려 1873년도에 일본에서 시작한 브랜드다. 초기 생산한 제품은 일본의 전통 버선인 타비. 그러다 1910년대 개발된 컨버스 올스타를 보고 타비에 고무 밑창을 붙이는 방식을 고안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발 사업에 뛰어들었다. 문스타의 최대 강점은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기술력이다. 1970년대에는 뉴발란스, 컨버스 제품을 생산할 정도였으니까. 문스타 신발에는 유수의 브랜드의 제품을 생산하며 축적된 기술이 녹아있다. 거기에다 문스타는 지금도 전 세계로 출고되는 신발을 쿠루메 공장에서 일괄 생산한다. ‘MADE IN KURUME’라고 쓰여있는 신발 뒤꿈치 라벨은 비단 생산 지역을 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부심을 담아 발행하는 품질 보증서다.
노베스타_ 이번에 스니커즈를 둘러보면서 알게 되었다. 솔이 두껍고 울퉁불퉁한 만큼 귀여워 고르지 않을 수 없었다. 노베스타는 문스타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1939년에 슬로바키아(당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군화, 운동화, 작업화 등 여러 신발을 생산하는 공장으로 시작해 1960년대 자체 브랜드 노베스타를 만들고 대표 모델인 스타마스터를 출시했다.
캔버스 스니커즈 제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은 고무로 만든 아웃솔(밑창)과 캔버스로 만든 갑피(아웃솔을 제외한 신발 위쪽 부분)를 붙이는 기술이다. 문스타와 마찬가지로 노베스타도 고무 기술자다. 본사 공장에서는 노베스타 신발 제품 외에도 자동차 타이어, 산업용 고무를 생산한다. 타이어 공장에서 만드는 신발이라니 밑창이 떨어질 일은 절대 없을 것만 같다.
나는 이렇게 공장에서 직접 대량생산하는 브랜드를 좋아한다. 오래됐다면 더욱 관심이 간다. 대량생산된 공산품에는 현실에 발을 붙인 고민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의 보편적인 기호를 반영하면서도 차별점을 담아야 하고, 또 좋은 품질을 지향하면서도 단가를 생각해야 할 테니까. 오랜 기간 살아남은 문스타와 노베스타의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몹시 궁금해진다.
그라퍼리즈_ 국내 도메스틱 브랜드다. 국내 신발 브랜드라니 일단 반갑다. 아무래도 신발은 해외 브랜드가 강세가 뚜렷해 국내 브랜드를 경험하기 어려우니까. 그라퍼리즈는 2020년에 대구에서 시작했다. 경상도 지역은 신발 제조 공장 밀집해 있어 국내 신발 산업의 핵심 지역이다. 국내 신발 브랜드 프로스펙스, 르까프가 부산 출신이고 캐치볼이 대구에서 시작했다.
그라퍼리즈는 일기장 같은 제품을 만든다. 제품과 사용자가 동떨어져 있지 않은 물건. 그래서 착용자의 일상이 제품에 담기고 결국에 기록이 되기를 바란다. 그라퍼리즈는 일기장으로 캔버스 스니커즈를 선택했다. 이 선택이 참 좋다. 캔버스 스니커즈는 화려하지 않고 단순하면서 매일 사용하는 아이템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라퍼리즈가 만드는 스니커즈는 날짜형보다는 만년형 일기장에 가깝다. 사용자가 편안하게 기록할 수 있는 절제된 멋이 있다.
2. 디자인
캔버스 스니커즈를 구매할 때 착화감을 얼마나 생각해야 할까? 편한 신발을 찾는다면 아웃솔이 얇고 평평한 캔버스 스니커즈는 적절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캔버스 스니커즈를 신발장에 하나씩 가지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납작하고 얇실한 디자인 때문이다. 반바지는 물론 정장까지 품는 포용력만큼은 모든 신발을 통틀어 최고가 아닐까.
그라퍼리즈 마일드 슈즈는 스니커즈 기본에 충실하다. 신발 혓바닥을 갑피가 양쪽에서 덮고 끈으로 조이는 단순한 스니커즈 형태다. 단순한 형태의 마일드 슈즈를 뻔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바로 토캡(고무로 덮은 신발 발가락 부분). 예전에 고무신을 보고 곡선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데 마일드 슈즈의 토캡은 고무신을 닮았다. 토캡의 부드러운 곡선이 신발 실루엣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갑피와 아웃솔의 색상 조합도 좋다. 특히 에크루 캔버스와 검정 솔 조합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발등을 덮는 셀비지 청바지 끝에 이 토캡이 불쑥 튀어나와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더욱 사고 싶어졌다.
문스타 짐클래식은 60년대 트레이닝 슈즈를 현대적으로 재현했다. 짐클래식도 토캡이 마음에 들었다. 토캡이 갑피를 완전히 덮어 신발 혓바닥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끈을 꽉 조인 듯한 느낌이 들어 오늘 소개하는 신발 중 가장 납작해 보인다. 보통 신발을 볼 때 바지와 조합을 생각하지만, 짐클래식을 보면서는 어울리는 모자가 떠올랐다. 짐클래식을 신고, 신발 실루엣처럼 얇고 긴 챙 모자를 쓴 모습을 떠올려보자. 몸 위아래로 삐죽 튀어나와 있는 모습이 어딘가 귀엽지 않은가.
노베스타 스타마스터는 형태는 마일드 슈즈와 비슷하지만 솔이 다르다. 아웃솔과 갑피를 감싸는 폭싱 테이프가 위 두 신발은 밋밋한 반면, 스타마스터는 세로로 타이어처럼 홈이 파여 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높아 보인다. 위 두 신발에 비해 조금 존재감이 있는 편이지만 그 정도가 절묘하다. 가끔은 ‘내 신발 귀엽지?’라고 드러내고 싶은 날도 있지 않을까? 유럽 남부 멋쟁이처럼 쨍한 색깔 반바지에 복숭아뼈를 드러내면서 스타마스터를 신은 모습을 상상하면 어색하지만 그래서 은근히 끌린다.
3. 제작방식
옛날 방식으로 제작된 물건에 마음이 간다. 이를테면 셀비지 청바지 같은 것들. 생산 효율에서 밀려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그래서 느릿한 여유로움이 있다. 캔버스 스니커즈에서는 벌커나이즈 공법이 그렇다. 황을 섞은 고무는 고온 고압 환경에서 고무의 탄성력, 내구도, 접착력이 향상된다. 벌커나이즈 공법은 이러한 고무의 특성을 이용해 캔버스 갑피와 고무 아웃솔을 붙이는 방식이다. 캔버스 스니커즈 등장에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었던 것.
하지만 벌커나이즈 공법은 인력이 많이 들어가는 방식이라 생산 효율이 떨어진다. 게다가 벌커나이즈 공법으로는 착화감을 고려한 입체적인 아웃솔을 설계하기 어렵다. 고무에 균일하게 열과 압력을 전달하려면 아웃솔의 모양은 얇고 평평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얇실하고 날렵한 디자인은 지나간 기술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나 비효율에서 탄생하는 아름다움이 있는걸. 이 아름다움 덕에 벌커나이즈 공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오늘 소개하는 세 가지 제품 모두 벌커나이즈 공법이 사용되었다.
4. 가격 및 접근성
자, 마지막으로 가격과 접근성을 비교해 보자. 우선 캔버스 스니커즈의 가격은 기능성이 우수한 다른 운동화에 비해 저렴한 편이다. 오늘 소개하는 것 중 가장 비싼 문스타 짐클래식이 10만 원 중반 대이고, 그라퍼리즈 마일드 슈즈가 119,000원, 노베스타 스타마스터는 재질과 색상에 따라 8-9만 원 정도.
문제는 접근성이다. 우선 내 사이즈 재고가 있어야 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교환이 간편해야 한다. 다행히 그라퍼리즈는 국내 브랜드인 만큼 공식 홈페이지를 비롯해 각종 패션 플랫폼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가장 마음에 드는 조합인 에크루 캔버스와 검정 솔 조합도 재고가 있었다. 노베스타는 해외 브랜드이지만 무신사 트레이딩에서 공식 수입하고 있어 무신사, 29CM에 입점되어 있다. 색상이 다양하고 캔버스 외에도 스웨이드, 코듀로이 소재도 있어 선택지가 넓다. 문스타의 경우 상대적으로 구매가 간단하지 않다. 패션 플랫폼, 편집샵에서 취급하고 있지만 물량이 많지 않아 원하는 색상과 사이즈를 구매하려면 노력과 운이 따라야 한다.
모든 비교가 끝이 났다. 그래서 어떤 신발을 살 거냐고? 결론부터 말하면 그라퍼리즈 마일드 슈즈를 살 예정이다. 국내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고, 다양한 제품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문스타는 브랜드 스토리, 디자인 모두 마음에 들었지만 원하는 모델과 사이즈를 구매할 수 없어 아쉬웠다. 나중에 일본 여행을 가면 관심 있게 보아야지. 노베스타는 브랜드 스토리와 가격, 접근성 모두 좋았지만 아무래도 유럽 멋쟁이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사실 원고를 작성하면서 더위가 살짝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미 불붙은 구매욕은 그대로 타오르게 두는 것이 맞겠지. 이제 구매하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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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운
패션 관련 글을 씁니다. 헛바람이 단단히 들었습니다. 누가 좀 말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