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난 디에디트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책 얘기를 하고 있는 객원필자 기명균이다. 평일엔 회사에 도움되는 글을 쓰고, 주말엔 내가 도움받은 책에 대해 쓴다. 최근 뉴스레터 <퍼줄거임>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덥다. 요즘처럼 땀도 많이 흘리고 의욕이 떨어질 땐 소설만큼 몸에 좋은 게 없다. 그중에서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미스터리 소설을 골라 읽다 보면 어느새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신간 중에서도 특히 믿음직해 보이는 것들로 다섯 권 골랐으니, 에어컨+책+아아 조합으로 편안한 여름밤 보내시기를.
[1]
<탕비실>
“싫은 사람의 수는 세상에 있는 사람의 수쯤 될 테니 그가 소재 고갈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독서에도 근육이 필요하다. 책 한 권을 끝내기가 쉽지 않다면, 그동안 너무 두껍고 어려운 책에만 도전했던 건 아닐까? 완독 실패 경험이 쌓이면 ‘책은 나랑 안 맞아’라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기 쉽다. 그렇다면 <탕비실>을 권한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페이지도 139쪽밖에 안 되어서, 완독 난이도는 ‘매우 쉬움’이다. 일단 한 번 읽어보고, 책과의 인연을 끊을지 말지는 그때 결정해도 안 늦다.
이 책을 쓴 이미예 작가로 말할 것 같으면 데뷔작 <달러구트 꿈 백화점>으로 1, 2권 합쳐 국내에서만 150만 부를 팔아치운 인물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엔지니어로 일했다는 이력 또한 화제가 됐다. 그의 직장생활 경험은 후속작 <탕비실>에서 본격적으로 발휘되는데, 회사에서 모두가 싫어하는 ‘직장 빌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나’는 방송국 PD로부터 리얼리티 쇼 섭외 제안을 받고, 회사 동료들로부터 빌런으로 지목당한 다섯 명이 같이 생활하게 된다. 이 쇼는 일종의 마피아 게임이다. 가짜 빌런을 찾아내면 이긴다. <나는솔로>처럼 다섯 명은 가명으로 불린다. 얼음, 케이크, 커피믹스, 텀블러, 혼잣말. 회사에서 뭘로 밉보였느냐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이중에 가짜 빌런이 있다. 방은 따로 쓰지만 탕비실은 공용이다. 가짜 빌런은 누구이며,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 애초에 PD는 왜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했을까.
책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가 단지 얇아서만은 아니다. TV쇼나 직장 빌런 같은 소재들이 친숙해서 접근이 쉽다. 유튜브나 넷플릭스 한 편 본다는 생각으로, 특별한 마음의 준비 없이 읽어내려갈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영상과는 다른 책의 매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 <탕비실> | 이미예 | 한끼 | 1만 4,000원
[2]
<십계>
“10. 살인범이 누구인지 알아내려 하지 말 것.”
둘레가 1킬로미터가 채 안 되는 조그마한 섬에 낯선 이들이 배를 댄다. 리조트 사업을 벌이겠다는 계획을 갖고 부동산 업자, 관광개발 업자, 건설업자가 1박2일 일정으로 찾아온 것이다. 섬 주인은 3주 전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터라, 그의 동생과 친구, 그리고 조카가 안내 차원에서 동행했다. 바쁜 도시생활에 지쳐있던 이들은 일을 핑계 삼아 오랜만에 휴가 기분을 내지만, 한 건물에서 정체불명의 폭약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일행은 찜찜한 채로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숙소 현관에 놓인 불길한 쪽지가 사건의 시작을 알린다.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는다는 설정은 <소년탐정 김전일>에서 익히 봐왔던 ‘본격 추리’ 스타일이라 특별히 새롭지 않다. 하지만 범인이 남기는 이 쪽지가 <십계>의 차별화 포인트다. 쪽지에 적힌 내용은 한마디로 ‘내 정체를 알려고 하지 말라’는 협박이다. 그렇지 않으면 섬에 비치된 폭약을 터뜨려버리겠다고. 어쩔 수 없이 일행은 쪽지에 적힌 대로 범인이 저지른 살인사건의 뒷수습을 돕는다. 그가 누군지도 모른 채.
작가의 전작 <방주>는 지난해 가장 화제가 됐던 추리소설 중 하나다. 당시 띠지 문구가 “극한의 뇌 정지 미친 반전!”이었다. 원래 반전 타령에는 시큰둥한 편이었는데, <방주>를 읽고 잘 짜여진 반전이 소설의 퀄리티를 두세 단계 높일 수 있음을 깨달았다. 출간되자마자 찾아 읽은 <십계>는 비록 <방주>의 놀라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작가에 대한 신뢰는 흔들리지 않았다. ‘성서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계획 중이라는 <낙원> 또한 읽을 거다. 지적 유희를 선사하는 책은 많지만, 이 정도 자극은 흔치 않다.
- <십계> | 유키 하루오 | 블루홀식스 | 1만 6,800원
[3]
<활자 잔혹극>
“유니스가 증오했던 동시에 갈망해 마지않았던, 그녀의 영원한 적.”
누가 범인인지가 중요한 <십계> 같은 소설을 흔히 ‘후더닛(whodoneit)’이라 칭한다. 그런 점에서 <활자 잔혹극>은 똑같이 살인사건이 터져도 장르가 완전히 다르다. 아예 첫 문장에서 누가 누굴 죽였는지 밝히고 시작한다. “유니스 파치먼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글을 모른다는 게 일가족을 살해할 이유가 되나? <활자 잔혹극>은 이 첫 문장만으로 알 수 없는 진짜 이유를 파헤쳐가는 ‘와이더닛(whydoneit)’ 미스터리다.
유니스는 커버데일 가족이 새로 고용한 가사도우미다. 집이 커서 관리하기가 쉽지 않음에도 유니스는 맡은 일을 훌륭히 해낸다. 커버데일 가족은 유니스가 들어온 후로 생활이 편해졌다며 만족스러워한다. 집안일을 깔끔히 하는 데 있어 글을 모른다는 건 결코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못 된다. 그래서 점점 더 궁금해진다. 유니스 입장에서도 커버데일 저택은 썩 괜찮은 일자리일 텐데 대체 왜 사람을 죽였을까? 한 명도 아니고 그때 집에 머물고 있던 가족 전체를.
자세한 이유를 여기서 밝히는 건, <십계>의 범인을 밝히는 것만큼이나 경솔한 행동이다. 하나 얘기할 수 있는 건, 글을 쓰고 읽는 우리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의 머릿속을 100% 이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커버데일 가족도 그랬다. 그들은 유니스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왜 죽는지 모르고 죽었다. <활자 잔혹극>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게 만드는 책이다. 살인은 분명 이해받을 일이 아니지만, 책을 덮을 때쯤 유니스 파치먼에게로 향하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다.
- <활자 잔혹극> | 루스 렌들 | 북스피어 | 1만 6,800원
[4]
<오렌지와 빵칼>
“자유는 내게 낯선 폭력이고, 통제는 익숙한 폭력이었다.”
자기 욕망을 100% 충족시키며 사는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참고 억누르며 산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라는 재미없는 이유도 있고 ‘먹고 살려면 그래야 한다’는 힘 빠지는 이유도 있지만 한 가지 위안은 ‘누구나’라는 세 글자다. 바꿔 말해보자. 참고 억누르며 살던 사람이 어떤 계기로 인해 자기 멋대로 살 수 있게 되었다면 허무해진다.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허무하다는 건 곧 배가 아프다, 나도 내 멋대로 살고 싶다는 얘기다. 여기까지가 <오렌지와 빵칼>을 읽으며 한 생각들이다. 위험한 소설이다.
유치원 교사 영아는 요즘 부쩍 스트레스가 늘었다. 일 때문에, 연인 때문에, 친구 때문에, 이웃 때문에. 한 달 전 유치원에 새로 등록한 원생은 아이들을 괴롭히고 영아에게도 발길질을 한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는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인데 영 내키지 않는다. 사사건건 잔소리가 심한 친구는 오늘도 전화해서 피곤한 영아를 몰아세운다. 내 주차 공간에 놓인 길고양이 밥그릇을 옆으로 치웠더니 이웃이 어떻게 알고 튀어나와 이기적인 사람 취급을 한다. 총체적 난국이다.
영아는 남을 바꾸는 대신 나를 바꾸기로 한다. 계기는 심리상담차 방문한 병원에서 받은 레이저 시술. “간단하게 말해 전두엽 기능을 일부 조절하면 정서에 변화를 줄 수 있습니다.” 3분도 채 안 걸린 이 시술은 영아의 일상을 180도 바꿔버린다.
나도 모르는 새 나를 억누르는 것에 익숙해져버렸다면, 이 소설로 혈을 한 번 뚫는 것도 좋겠다. 고이면 썩고 쌓이면 터지는 건 물 말고도 많으니까. 부작용은 없을까? 영아의 질문에 의사는 대답한다. “있어도, 적을 겁니다.”
- <오렌지와 빵칼> | 청예 | 허블 | 1만 2,000원
[5]
<걷는 망자, ‘괴민연’에서의 기록과 추리>
“네가 망자길에서 마주친 건 분명 ‘죽었지만 살아 있고, 살아 있지만 죽은’ 존재였어.”
추리소설에는 몇 가지 룰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모든 사건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귀신의 소행이었다’로 끝나서는 곤란하다. 평소에는 미신에 집착하고 징크스에 예민한 탐정일지라도, 범인을 잡을 때만큼은 합리와 과학으로 똘똘 뭉친 뇌를 앞세워야 한다.
호러는 다르다. 호러의 목적은 사건 해결이 아니라 공포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무섭게 할 수만 있다면 귀신이냐 인간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파묘>의 김고은이 영혼을 불러내 작두와 부적으로 이승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감독을 탓할 사람은 없다. 굿이 주특기인 무당에게 탐정의 추리극을 기대한다면, 애초에 영화를 잘못 고른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물과 기름 같은 추리와 호러를 혼합한 작가가 있다니, 관심이 생길 수밖에. 알고 보니 미쓰다 신조는 이미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만 꼽아도 스무 권이 넘는 베테랑이었다. 미쓰다 신조 월드에는 여러 개의 시리즈가 있는데, 맛보기로 ‘도조 겐야 시리즈’의 첫 작품 <염매처럼 신들리는 것>을 먼저 읽었다. 도조 겐야는 전국 방방곡곡을 떠도는 괴담 수집가. 하지만 어쩌다 보니 괴담 이면에 감춰진 합리적 진실을 밝혀내는 탐정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역시 제일 무서운 건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걷는 망자> 또한 ‘도조 겐야 시리즈’와 세계관을 공유한다. 도조 겐야의 제자 덴큐 마히토가 탐정 역할로 등장하는데, 실은 겁이 너무 많아 괴담을 논리적으로 설명해내지 않고는 못 견디는 괴짜 미스터리 마니아다. 짧은 이야기 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어 여름밤 가볍게 읽기에도 좋은데, 물론 덴큐처럼 겁 많은 독자라면 밝을 때 읽는 게 나을지도…
- <걷는 망자, ‘괴민연’에서의 기록과 추리> | 미쓰다 신조 | 리드비 | 1만 6,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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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명균
매달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합니다. 기이할 기, 밝을 명, 고를 균, 이름처럼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