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몇년 전부터 필름 사진의 인기가 역주행을 하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디에디트에 입사할 때 필수 조건 중 하나가 필름 카메라 보유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인데요. 이게 단순히 우리나라만의 유행은 아닌 것이, 해외 유튜브에서도 필름 사진을 찍는 영상은 상당히 인기를 끄는 편입니다.
필름 사진이 이렇게 다시 화제가 된 것과 별개로, 여기서 활용되는 대부분의 필름 카메라들은 모두 ‘빈티지’입니다. 카메라 업체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오랫동안 유행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필름 카메라를 신품으로 파는 것은 부담스럽기 때문이죠. 메이저 카메라 제조사 중 거의 유일하게 신품으로 필름 카메라를 파는 곳이 라이카라는 걸 생각해 보면 신품 필름 카메라 시장이 얼마나 푸르고 푸른 블루 오션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 라이카도 1984년에 출시한 M6 카메라를 몇 가지만 수정해서 거의 그대로 판매하는 정도입니다.
그런데 펜탁스가 필름 카메라인 펜탁스 17을 선보였습니다. 심지어 약간 수정한 정도가 아닌, 밑바닥부터 새로 개발한 필름 카메라입니다. 메이저 카메라 제조사 중에서는 무려 19년 만에 나온 신형 필름 카메라입니다. 이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펜탁스 17을 개발하기 위해 개발팀은 이미 은퇴한 필름 카메라 엔지니어들을 찾아가 설계에 대한 조언을 받았고, 생산이 중단된 지 한참 지난 부품을 생산하기 위한 생산 라인도 따로 만들어야 했다네요.
펜탁스 17의 가장 큰 특징은 ‘하프 필름’ 카메라라는 점입니다. 하프 필름 카메라는 우리가 ‘풀프레임’이라 부르는 35mm 필름의 한 프레임에 두 장의 사진을 찍는 카메라를 말합니다. 17이라는 이름의 기원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물론 필름의 한 프레임을 온전히 한 장의 사진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화질의 감소는 있을 수밖에 없겠지만, 요즘 같이 코닥의 보급형 필름인 골드 200도 2만 원 가까이 줘야 하는 시대에 36 프레임짜리 롤로 72장을 찍을 수 있으니 나름 가성비 필름 생활을 할 수 있겠다 하겠습니다. 어차피 이 카메라의 목표인 소셜 미디어에는 큰 사이즈의 사진이 필요하지 않기도 하고요. 가로 방향의 필름을 반으로 자른 것이기에 카메라가 가로로 놓인 상태로 사진을 찍으면 세로로 찍히는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펜탁스 17의 개발 방향은 수동 촬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필름 사진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수동 촬영에 있어서 가장 큰 난관이라 할 수 있는 노출은 자동으로 잡아줍니다. 아예 조리개나 셔터 속도 우선 모드가 없고, 상황에 따라 조리개와 셔터 속도를 맞춰주는 프로그램 모드와 최대한 조리개를 열어서 배경을 날려주는 ‘보케’ 모드가 있습니다.
초점은 수동으로 잡게 되는데, 대략적인 초점 거리를 잡아서 사진을 찍는 존 포커싱 방식을 씁니다. 렌즈에는 피사체와의 거리를 시각화한 아이콘을 통해 사용자에게 초점에 대한 대략적 가이드라인을 줍니다. 단체사진용이나 음식 사진, 단독 사진, 풍경 사진 등의 용도가 확실하다면 쉽게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주는 셈이죠. 렌즈는 25mm F3.5 사양으로, 35mm 필름 규격으로 환산하면 약 37mm의 화각입니다. 35mm 렌즈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딱 적당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펜탁스 17의 가격은 500달러(약 69만 원)로, 더 사양 좋은 중고 필름 카메라를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구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할 때 저렴한 가격은 아닙니다. 하지만 디지털의 시대에 필름 카메라를 밑바닥부터 개발해서 출시한다는 그 용기만은 인정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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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형
백수가 되었지만, 백수가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에디터이자 팟캐스터. IT가 메인이지만 관심가는 게 너무 많아서 탈이 나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