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에디터B가 테크 분야 기사를 제안할 때마다 단칼에 거절했던 객원 필자 김정현이다. 드디어 전자제품에 관한 글을 쓴다. 디에디트와 함께한 지 햇수로 4년 만에 처음으로. 왜 이제 와서? 카메라를 샀기 때문이다. 머리털 난 이후로 제 돈 주고 산 첫 카메라다. 합법적으로 자랑해야겠다 싶어 에디터B를 떠봤는데 역시나 두 팔 벌려 환영하더라. 이 카메라에 관해서라면 내가 할말이 좀 있다.
리코 GR3. 2019년 출시 이후 지금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하이엔드 카메라. 태어나 처음으로 카메라를 구입한 나는 왜 이 제품을 선택했을까? 한 달가량 매일같이 사용하며 느낀 장점과 단점은 무엇일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 리코 GR3를 추천하고 싶을까? 그런 이야기를 적었다.
‘카메라에 빠삭한 고인물 에디터의 밀도 있는 분석’ 따위를 기대한다면 주저 말고 백스페이스를 누르자. 나는 개인적인 얘기 위주로 적을 것이다. 그만큼 생생하고 현실적이니 비슷한 처지의 분들이 결정하는 데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리라 믿으며… 인생 첫 카메라를 구매한 ‘카알못’ 에디터의 한 달 사용기. 시작한다.
구성
01 왜 카메라가 필요했나
02 왜 리코 GR3였나
03 어떤 사진을 찍었나
04 무엇이 좋았나
05 무엇이 아쉬웠나
06 누구에게 추천하나
01 왜 카메라가 필요했나
콘텐츠의 퀄리티를 높이고 싶었다. 나는 프리랜스 에디터로 일한다. 가장 주요한 업무는 디에디트를 비롯한 여러 매체 및 브랜드에 텍스트와 이미지로 구성된 콘텐츠를 납품하는 것. 대개 큰 규모의 작업이 아니다 보니 혼자서 사진 촬영까지 담당하는 편이다. 여태 대부분의 사진을 아이폰 XS로 찍었다. 애당초 클라이언트 측에서 포토그래퍼 수준의 결과물을 요구하지 않았을뿐더러, 인쇄가 필요한 종이 잡지가 아니고서야 화질 면에서도 문제 될 게 없었다.
문제는 주관적인 만족도였다. 성에 차질 않았다. 일을 하면 할수록 휴대폰 사진의 한계를 느꼈다. 더 선명하게 더 디테일하게 더 감성적으로 찍을 수는 없을까? 그냥 넘어갈 만한 부분조차 아쉽게 느껴지는 경우가 잦아졌다. 타성에 젖어 마구잡이로 찍게 되는 순간도 늘어났다. 그리고 이는 새로운 욕망으로 이어진다. ‘카메라를 사서라도 한 단계 다른 국면으로 나아가고 싶다.’ 투자가 필요한 시점! 그건 프리랜스 에디터 김정현의 가치를 높일 수 있으리라는 절박한 희망이기도 했다.
다가올 도쿄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혼자서 떠나는 5박 6일간의 여행을 훨씬 예쁘고 근사하게 기록하고 싶었다. 평소에 잘 돌아다니는 편이니 생활 속에서도 주구장창 찍어댈 테고, 하다못해 인스타그램 피드라도 풍성해질 터였다. 요컨대 나는 일과 일상과 여행 모두에 전천후로 활용할 카메라가 필요했다. 여기에 카메라를 사면 안 되는 이유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02 왜 리코 GR3였나
구매 고려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 작은 크기와 가벼운 무게
- 높은 화질과 분위기 있는 색감
- 초보자에게도 쉬운 조작법
- 사진과 영상, 두 마리 토끼
- 150만 원 이하의 가격
이에 따라 추려진 후보는 다음과 같았다.
- 캐논 PowerShot G7 X Mark III
- 파나소닉 DMC-LX10
- 파나소닉 DC-LX100M2
- 소니 ZV-1
그런데 여기서 변수가 등장한다. 리코 GR3를 알게 된 것이다. 막판에 출현한 리코 GR3는 견고해 보이던 4강 라인업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타 기종에 비해 영상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모델이라 제외하는 게 맞다. 논리적으로는. 하지만 자꾸 신경 쓰였다. 김현우를 바라보던 <하트시그널2> 여성 출연자들의 마음이 이랬을까? 한 번 눈에 들어온 메기 리코 GR3는 무서운 기세로 매력 발산에 들어갔다.
가장 끌렸던 점은 휴대성이다. 리코 GR3를 말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장점으로, 요즘 나오는 웬만한 스마트폰보다 작다는 얘기에 마음이 동했다. 자주, 빠르게 사용하고 싶은 나의 필요에 부합했으니까. 폭과 높이는 다른 후보군과 엇비슷하나 두께(33.2mm)와 무게(바디 기준 227g)에서는 리코 GR3가 단연 1등이었다.
슬림하고 가볍다고 이미지 퀄리티를 무시하면 안 된다. 2424만 화소에 APS-C 센서를 장착했다. 사진 화질은 센서 크기가 커질수록 좋아지는 법. 리코 GR3에 쓰인 APS-C 센서는 비슷한 사이즈의 하이엔드 카메라에서 볼 수 있는 1인치 센서나 마이크로포서드 센서보다 더 큰, 보급-중급형 DSLR과 미러리스에 사용되는 센서다. 거기에 분위기 있는 결과물을 보장한다고 명성이 자자한 리코 시리즈 특유의 색감까지. 곧바로 일에 써먹어야 하는 초보자 입장에서도 시작부터 나쁘지 않은 사진을 건질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겼다.
결정에 쐐기를 박은 건 애정하는 사진가 정멜멜의 리뷰. 같은 카메라를 산다고 내가 그처럼 찍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다음의 설명이 마음에 팍- 꽂혀버렸다.
“크고 무거운 dslr은 절대 가지고 다닐 수 없는데 아이폰은 만족스럽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기엔 너무 고가의 미러리스 카메라를 구입하긴 부담스럽지만 또 스타일리시한 카메라가 갖고 싶다면 망설이지 않고 추천하고 싶은 카메라다. 무엇보다 매일 매일 가지고 다닐 수 있는지, 가 카메라를 고르는 중요한 기준이라면 더욱 추천하고 싶다.” ㅡ 정멜멜
(참고로 해당 리뷰는 리코 GR3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GR3X를 다룬다. 화각을 비롯한 일부 차이 외에는 유사한 사양을 가진 제품으로, GR3의 매력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는 글이다.)
근데 영상은 포기한 거냐고? 맞다. 어차피 숏폼용으로 필요한 거라 아이폰XS를 더 믿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고품질의 영상을 찍어봤자 2019년형 맥북 에어가 버텨주지 못한다. 내게 지금 더 중요한 건 사진이라고 판단했다.
03 어떤 사진을 찍었나
이쯤에서 잠시 쉬어가자. 리코 GR3로 촬영한 사진 몇 장을 준비했다. 한 달여의 시간 동안 10,000컷 가까이 찍었다. 외출할 때마다 들고 나간 덕분이다.
참고사항
- 모든 사진은 P모드(프로그램 모드)로 촬영했다.
- RAW 파일로 저장 후 라이트룸 보정을 거쳐 JPG로 추출했다.
- 일종의 필터를 씌울 수 있는 ‘화상 컨트롤’ 기능의 경우, (1) 표준 (2) 네거티브 필름 (3) 포지티브 필름을 그때그때 섞어 썼다.
04 무엇이 좋았나
사이즈와 휴대성
여러 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 부담 없이 매일매일 카메라를 들고 나갈 수 있다? 특별한 날에 한 번씩 들고 나가던 비장의 무기가, 언제 어디서든 함께하는 필수품으로. 패딩과 코트 주머니에 쏙 넣어 다니는 건 카메라 전용 가방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이들은 경험하지 못할 즐거움이다.
작고 가볍다는 특징은 이동과 휴대뿐 아니라 촬영에도 영향을 미친다. 간편한 조작 버튼 디자인이 더해져 한 손 촬영이 가능하니까. 엄지로 다이얼을, 검지로 셔터를, 나머지 손가락으로 카메라 바디를 지지하면 오른손만 이용해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왼손잡이 독자분들에게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거리를 걷다가 빠르게 포착하고 싶은 장면이 있을 때 유용하며, 실제로 야외 거리 스냅을 찍을 때 왼손은 외투 주머니에서 휴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팅 속도 ・ 손떨방 및 AF ・ 셔터음
어물쩍대다 놓쳐버리기 일쑤인 일상 속의 반짝이는 순간들. 신속하게 촬영하기 위해서는 부팅 속도가 중요하다. 리코 GR3의 전원이 켜지는 속도는 0.8초다. 느린 속도 때문에 속 터질 일이 없단 뜻이다. 손 떨림 방지와 자동 초점 기능 역시 준수해 촬영하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조용한 셔터음은 또 어떤가. 대포 같은 아이폰 촬영음에 질려버린 내게 들릴락 말락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딸깍’ 소리는 사랑스러울 뿐이다.
작은 크기와 빠른 부팅 속도와 거의 없다시피 한 셔터음. 덕분에 사람들의 주목도가 낮다는 것 역시 무시하지 못할 장점일 테다. 거대한 망원렌즈를 부착한 DSLR 카메라와 스마트폰 사이즈만한 리코 GR3를 들고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면 쉽다. 어쩌면 이 카메라는 민폐 소리 듣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닐까?
이미지 퀄리티
물론 압도적인 편의성만으로 이 제품을 설명할 수는 없다. 압도적인 편의성과 고품질의 결과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았다는 게 핵심이기 때문이다. 괜히 ‘궁극의 스냅슈터’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나처럼 카메라 지식이 전무한 사용자도 막 찍은 것치고 근사한 이미지를 얻기 좋은 카메라가 리코 GR3다. 부족함 없는 선예도와 디테일 구현, 리코 시리즈 특유의 분위기 있는 색감까지. 거기에 ‘화상 컨트롤’이라는 후보정 기능은 종류도 다양하고 채도와 콘트라스트를 비롯한 개별값 조절이 가능해 원하는 룩을 구현하는 데 도움을 준다. 포지티브 필름 모드와 네거티브 필름 모드 때문에 리코 시리즈를 사용한다는 유저들이 있을 정도니, 포토샵이나 라이트룸으로 일일이 보정하는 게 귀찮은 이들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장치일 것이다.
05 무엇이 아쉬웠나
틸트 액정
이 카메라의 모든 요소를 통틀어 가장 아쉬운 점. 액정의 상하 각도를 조절하는 ‘틸트’가 불가하다. 셀카를 편하게 찍지 못하는 건 당연하고, 피사체를 위에서 찍는 하이 앵글과 아래에서 찍는 로우 앵글 촬영이 어려운 편이다. 나는 공간 촬영 시 카메라를 배까지 내려 로우 앵글을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럴 때마다 액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니 수평이 맞는지, 초점은 정확한지를 체크하기가 까다롭고, 결국 한쪽 다리를 꿇어앉는 식으로 몸을 직접 낮추는 쪽을 택한다. ‘틸트만 됐어도 도가니가 덜 아플 텐데’ 하는 부질 없는 한탄을 하면서.
배터리 유지 시간
빠르게 소모되는 배터리 역시 리코 시리즈의 치명적인 단점. 크기가 작아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100% 충전된 배터리를 들고 나가도 반나절 정도 찍다 보면 교체 시기가 다가오는데, 커뮤니티 후기를 살펴보면 평균적으로 200컷 내외면 방전되는 듯하다. 나 역시 외출 시마다 여분을 챙겼으며 취재가 있는 날에는 저녁쯤이면 배터리를 교체하곤 했다. 여행용으로 구매를 고민하고 있다면 여분 배터리를 2개는 사두는 게 좋을 것. 정품 배터리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호환 배터리를 구매해도 무방하다.
영상 퀄리티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익히 들었던 내용이라 감안한 부분이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사진 품질이 기대 이상이라 더더욱. 리코 GR3 영상의 단점은 세 문장으로 설명 가능하다. (1) 4K 지원이 안 된다. (2) 자동 초점 기능이 안쓰러운 수준이다. (3) 그 와중에 발열 문제까지… 사진 영역에 모든 기운을 몰아줬다고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플래시
전작 리코 GR2와 달리 GR3는 내장 플래시가 없다. 플래시를 팡- 터뜨려 다소 날것의 느낌을 표현하는 사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꽤 서운한 부분. 핫슈에 외장 플래시를 체결해 사용할 수는 있으나, 사이즈도 너무 크거니와 호환 플래시의 가격이 적어도 10만 원 중반대인 탓에 현재로서는 입맛만 다시는 중이다.
06 누구에게 추천하나
일련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리코 GR3에 애정을 듬뿍 주게 될 사람들. 다음과 같다.
- 크기와 무게, 휴대성에 우선순위를 두는
- 좀처럼 집에 있지 못하고 발발거리며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 카알못이지만 감성 하나는 못 잃는
- 폭등하는 필름 값을 감당하지 못해 디지털 카메라의 세계로 넘어오려는
- 전문가 수준의 메인 카메라를 이미 보유한, 편하게 사용할 서브 카메라를 찾는
중요한 건 자기의 필요와 기호와 일상 패턴을 파악하는 일이다. 카메라를 구입하려는 1번 목적이 무엇인지만 분명히 해도 후보가 추려진다. 평소 어떤 느낌의 사진을 선호하는가, 실제로 어디서 어떤 내용의 사진을 얼마나 찍을 것인가에 관한 부분까지 고민한다면 답은 명료해질 테다. 물론 그 모든 논리를 넘어서는 ‘끌림’도 소홀히 하지 말 것. 이성적인 판단만을 기준으로 삼았다면 내가 리코 GR3를 구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눈에 밟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구매처
리코 시리즈의 국내 유통은 세기 P&C가 담당한다. 공식 이커머스 세기몰에 가면 리코 시리즈 정품 구매가 가능하다. 가격은 135만 8,000원. 야속하게도 수요와 공급의 격차로 인해 구매 가능한 시기가 정해져 있는데, 대략 한 달 주기로 한정 수량이 풀리는 식이다. 홈페이지 입고 알림 혹은 인스타그램 확인은 필수. 나 또한 티켓팅하는 마음으로 시간 맞춰 접속했고, 결제 취소에도 굴하지 않은 덕분에 막차를 탈 수 있었다. 중고 거래 플랫폼에 매물이 적지 않으나 가격 이점이 딱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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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라이프스타일 잡지부터 토크 프로그램까지, 분야 안 가리는 프리랜스 콘텐츠 에디터. 멋있는 사람과 흥미로운 콘텐츠를 소개할 때 제일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