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새해 복 많이 받기를 바라는 객원 에디터 임현경이다. 곧 설날인데 다들 어떻게 지낼 계획인지 궁금하다. 멀리 여행을 다녀오든 평소와 다름없이 일터로 나가든, 누군가와 함께하든 홀로 시간을 보내든, ‘뭐 볼 거 없나….’ 생각하는 때가 한 번은 있지 않을까? 지상파 방송을 보자니 건전하고 대중적인 콘텐츠로 가득해서 싫다면, 만만한 게 넷플릭스인데 막상 들어가 보면 콘텐츠가 너무 많아서 뭘 봐야 할지 모르겠다면, 여기 정상과 평범이 지루한 당신을 위해 준비했다. 삐딱하고 발칙한 설날 특선 넷플릭스 편성표.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
명절은 으레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고들 한다. 잠깐, 그 전에 가족을 먼저 정의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이에게는 혈연으로 묶인 관계일 테고, 다른 이에게는 결혼이라는 계약으로 맺어진 것이며, 또 누군가에겐 기쁨과 아픔을 모두 함께하는 공동체일 것이다. ‘가족’의 의미를, 나의 가족을 다시 돌아본다.
<결혼 이야기>
브로드웨이에서 촉망받는 연출과 배우, 한때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이자 이혼을 준비하는 부부의 이야기. 로맨스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거라며 결혼으로 막을 내리지만, 연극이 끝난 ‘그다음의 삶’은 초라하고 처절하다.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아 폐부를 찔리고 찌르는 관계를 응시하는 노아 바움백의 수작.
<더 웨일>
272kg의 거구 찰리는 죽음을 앞두고 저버렸던 딸과의 관계를 되찾고자 한다. 찰리의 삶은 제목처럼 고래를 닮았다. 물속에서 살지만 숨을 쉬려면 수면 위로 나와야만 하는, 육중한 몸이 땅에선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하고 그 육중함 덕에 심해로 낙하할 수 있는 고래를. 연극적 연출과 브랜든 프레이저(<미이라>의 그 아저씨 맞다.)의 깊이 있는 연기가 인물의 감정을 고통스럽게 파고든다.
<도희야>
당연히 정의된 ‘모성’을 폭력적으로 해체한다. 외딴 마을 파출소장으로 좌천된 영남은 아버지와 할머니에게 학대당하는 소녀를 만난다. 영남으로서 캐릭터에 힘을 싣는 배두나의 연기는, 왜 그가 출연료를 받지 않으면서까지 이 영화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는지 보여준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더더욱 추천.
<밥정>
우리나라 사람들 참 밥을 좋아한다. 그 밥을 함께 먹는 ‘식구’는 얼마나 애틋할까. 임지호 셰프는 세 명의 어머니, 그리고 살아가며 만난 모든 이웃을 식구 삼아 40년 넘도록 밥을 짓는다. 생명을 살리는 음식을 연구한다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기고 간 이 다큐멘터리는 요리보단 마음 레시피에 가깝다. 자연 풍경, 맛깔나는 음식, 정겨운 대화로 눈과 귀가 호강하는 와중에도 엉엉 울면서 보게 된다.
종교란 무엇인가
우리가 명절에 지내는 제사의 기원은 유교라 전해진다. 유교를 하나의 종교로서 믿지 않아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고, 종교적 이유로 제사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종교를, 나아가 신념을 정말 그냥 믿어도 되는 걸까? 의심과 성찰로써 믿음의 답을 구한다.
<두 교황>
교황은 종신직이다. 하늘 아래 두 교황이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한 교황이 자진 퇴위하면서 두 명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가 마주 설 수 있게 됐다. 이 실화를 앤서니 홉킨스와 조너선 프라이스의 연기로 그려낸다. 전 교황과 현 교황, 독일과 아르헨티나, 보수와 진보.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뜨겁고도 차갑게 논쟁한다. 종교에 큰 관심이 없더라도 이 대화에 홀린 듯 빠져들게 될 것이다.
<사바하>
개신교와 불교를 버무린, 만듦새 좋은 한국 오컬트 영화. 목사 박웅재가 신흥 종교 단체 ‘사슴동산’의 실체를 파헤친다. 수상한 죽음이 잇따르고 신의 존재는 의심스럽다. “어디 계시나이까? 우리를 잊으셨나이까?” 인간은 응답 없는 기도에 의지할 만큼 약하고 답을 구하고자 두려움을 이겨낼 만큼 강하다. 장재현 감독의 영화가 취향에 맞았다면 오는 2월 22일에 개봉하는 차기작 <파묘>도 기대해 보자.
<더 원더>
대기근이 닥친 아일랜드, 한 마을에 음식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기적의 소녀’가 나타난다. 기적, 죽음, 그리고 부활. 모두가 믿고 싶은 이야기는 누구도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을 가리곤 한다. 플롯이 참신하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음악이 주는 몰입감이 엄청나다. 영화 자체를 하나의 틀로 사용한 액자식 구성 또한 흥미롭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건물’주님’과 집값 상승의 신화를 믿는 한국 사회의 압축판. 대지진으로 하루아침에 무너진 서울 한복판에 황궁 아파트만이 형체를 유지한다. 아파트 주민들은 도움을 요청하는 외부인들을 쫓아내고 ‘바퀴벌레’라 부르며 멸시한다. 영화는 선택받은 ‘우리’와 가난하고 약한 ‘너희’의 격차가 단순히 개인의 노력 때문이라고 믿는, 우리 사회에 팽배한 어떤 종교를 보여준다. 폭력과 약탈보다도 명화(박보영)의 존재를 ‘민폐’라며 불편해했던 일부의 반응까지도.
내 나이가 어때서
서른 전에는 결혼해야… 마흔 전에는 내 집 마련을 해야…. 나이는 삶을 정량적으로 측정하는 지표가 된다. 나이와 삶에 값을 매겨 서로 다르면 ‘애늙은이’나 ‘키덜트’ 같은 별칭이 붙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설날에 떡국 안 먹었으니까 무효.”라는 헛소리를 하고 싶어진다. 어른에게도 동화는 필요하다.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리마스터링>
‘아기공룡 둘리’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1996년 개봉 후 거의 30년이 돼가는데 아직도 재밌다. 익히 알고 있는 그 빙하 타고 내려온 둘리와 친구들이 타임 코스모스를 타고 미래로 가려다 ‘얼음별’에 불시착하면서 벌어지는 모험을 그린다. 코미디, 가족 드라마에 더해 고길동의 화려한 액션, 스페이스 오페라, 뮤지컬까지 온갖 장르가 다채롭게 어우러진다.
<로알드 달의 뮤지컬 마틸다>
1988년 로알드 달이 쓴 <마틸다>를 2010년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가 뮤지컬로 만들었더니 2022년 넷플릭스가 영화화했다. 그만큼 억압과 차별에도 좌절하지 않고 길을 찾아 나서는 마틸다의 여정은 여러모로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감과 귀에 쏙쏙 들어오는 넘버가 인상적. 한국어 더빙 버전도 즐길 수 있다.
<종말에 대처하는 캐럴의 자세>
당장 지구가 멸망한다면, 뭘 하고 싶은가? 캐럴은 출근을 한다. 다들 일을 관두고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모험을 떠나거나 나체로 돌아다니며 폴리아모리를 추구하는 이 혼돈 속에서, 캐럴은 빨래, 카드 요금 납부, 스케일링 예약을 하며 별종 취급을 받는다. 그럼 뭐 어떤가, 캐럴은 매일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며 종말에 다가간다. 별일 없는 일상에 띄우는 수줍고도 뜨거운 연서.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미리 경고한다. 잔혹하고 징그럽다. 1944년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들어선 군사독재 정부가 저항군 소탕에 열을 올린다. 어머니를 따라 정부군 대위인 새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오필리아는 우연히 발견한 숲속 미로에서 요정 ‘판’을 만난다. 국내 개봉 당시 청소년들이 ‘나니아 연대기’ 같은 건 줄 알고 극장에 보러 갔다가 무서워서 뛰쳐나왔다는 전설이 있다.
혼자서 즐기는 19금
“썸타는 사이에 보기 좀 그래?”, “엄빠랑 봐도 괜찮을까?”, “이거 잔인한 거야, 야한 거야?” 소위 ‘19금’ 콘텐츠는 청소년의 관람을 제한하지만, 성인도 관람 전 꽤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하지만 혼자라면 ‘어떤 19금’인지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 홀로 보내는 연휴, 눈치 보지 않고 오롯이 19금을 즐길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몰락한 귀족 애비게일은 앤 여왕 눈에 들기 위해 계략을 펼치고 여왕의 연인이자 실세인 사라의 자리를 위협한다. 권력 위에 선 이들의 욕망은 서로를 집어삼키다 못해 영화 전체를 압도한다. 올리비아 콜먼, 레이첼 바이스, 엠마 스톤 세 배우의 열연에 연기 좀 살살해달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그와 엠마 스톤이 다시 호흡을 맞춘 <가여운 것들>이 오는 3월 국내 개봉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원제 ‘Sex Education(성교육)’이 많은 설명을 대신한다. 성 전문가인 어머니 덕에 이론이라면 빠삭한 소년 오티스와 뛰어난 사업 수완을 가진 소녀 메이브가 학교에서 (비공식) 성 상담소를 열며 벌어지는 이야기. 같잖은 속언이나 배려 없는 야동이 아닌, 현실의 모두에게 필요한 ‘성’에 대한 고민과 성장을 담았다. 등장인물이 때론 서툴고 거칠어 답답하고 짜증 날 때도 많지만, 그런 날것의 시행착오가 하이틴 장르의 매력이기도 하니까 이해해 주자.
<색, 계>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젠 19금 영화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바로 그 작품. 중일전쟁 시기,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왕치아즈는 좋아하는 연극부 선배가 이끄는 항일운동에 동참하고, 친일파 핵심 인물을 암살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한다. ‘색’이 워낙 유명하지만, 세밀하게 묘사한 ‘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육체와 정신, 연극과 현실, 사명과 사심…. 어떤 선 위에 올라 스스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위태로운 삶을 고찰한다.
<섹스/라이프>
머리를 비우고 가볍게 볼 수 있는 19금. 엄마, 아내, 그 뒤로 미뤄진 자아를 찾고 싶은 빌리는 가장 나다웠던 시간을 회상하며 타오르는 욕정과 위험한 쾌락이 담긴 일기를 쓴다. 늘 그렇듯 누군가 일기를 훔쳐보는데, 그게 하필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남편이다. (침대 근처에도 안 가는) 베드신이 지겹도록 나온다. 유교와는 거리가 먼 장면이 많으니 주의하자.
시대착오적이고 고리타분한 빌런들에게
명절이 두려운 이유 중 하나는 타인이 덕담을 명목 삼아 듣기 싫은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기 때문이다. “결혼은 언제 하니”, “더 나이 먹기 전에 애는 낳아야 할 텐데” 등등. 세상이 바뀐 줄 모르고 여전히 뒤처진 말들을 일삼는 악당이 있다면 이 작품들을 추천해 보자.
<비밀은 없다>
온갖 부조리로 엉망진창이지만, 제목 그대로 비밀은 없다. 학교 폭력, 지역 갈등, 성차별, 불륜, 살인 등 매일 아침 뉴스로 접할 수 있는 ‘다 아는’ 얘기에 도파민을 잔뜩 버무린 고자극 스릴러. 이경미 감독 특유의 엉뚱한 듯 날카롭고 괴짜스러운 세계관이 잘 드러난다. 손예진 배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딱 하나만 꼽으라면 무조건 이 영화.
<거꾸로 가는 남자>
영화 <바비>보다도 쉽고 노골적이다. 한 남자가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눈앞에 가모장제 세상이 펼쳐진다. “전 남성차별주의자가 아니에요. 저도 남자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여성이 남성은 원래 능력이 부족하고 감정적이라 중요한 일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낯설지만 익숙한 사회다. 아주 단순한 성별 반전 영화임에도, 이 작품이 넷플릭스가 오리지널로 제작한 첫 프랑스 영화라는 점도 유의미하다.
<퀴어 마이 프렌즈>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을 믿는 동성애자”라고 고백한 강원과 그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은 감독 아현의 서툰 성장을 담은 다큐멘터리. 삶은 ‘나’를 주인공으로 두지 않는다. 꿈을 이루기는커녕 꾸는 것조차 내 맘대로 할 수 없고, 행복을 위한 선택이 나를 처절한 실패에 빠트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마다의 ‘나’를,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 수 있는 ‘우리’의 내일을 살펴본다.
<서프러제트>
20세기 초 영국에서 일어난 여성 참정권 운동 ‘서프러제트’를 다룬다. 지금으로선 당연한 권리가 절대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를 바라보면, “원래 그래.”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참고로 국내 개봉 당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던 남성이 옆자리 여성에게 성적 욕설을 퍼붓고 폭행해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사건이 있었다. 빌런은 영화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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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경
이야기와 글쓰기, 사람들을 만나 삶의 일부를 나누는 일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