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어 소믈리에다. 비어 소믈리에란 맥주를 예술처럼 다루는 사람이다. 최상의 맥주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맥주의 복합적인 맛과 향을 이해하고 이를 이야기와 함께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소비자 스스로 맥주를 음미하고 맥주의 다양성을 탐험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다. 이 낯선 직업을 한국 시장에서 하나의 진지하고 전문적인 업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일하고 있다.
성수동 작은 골목에 위치한 비어 테이스팅 바 ‘퍼멘티드 고스트’에서 비어 테이스팅 코스를 진행하고 있으니 맥주의 다채로운 매력이 궁금하다면 한 번쯤 오셔도 좋겠다.
라거가 맥주로 통용되는 우리에겐 더 이상 라거는 특별할 게 없어 보인다. 치맥, 소맥이라는 이름으로 능수능란한 조합에 배경이 되는 정도다. 하지만 강렬하지 않더라도 걸리는 것 없이 모든 고민을 뒤로 던져 버리게 하는 시원한 라거는 필수 불가결한 존재다.
맥주 그 자체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흘룽한 라거를 만나는 일이란 그 무엇보다도 반갑고 소중한 일이다.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맛있는 라거는 굉장히 드물기 때문이며, 복잡한 양조 공정에서 해냈다 하더라도 변화무쌍한 유통 과정에서, 때론 잔에 담겨 서빙되면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한 라거를 만나면 그날은 행운으로 가득 찬 날이라고 봐도 된다. 햇살처럼 투명하게 아름다운 외관부터 균형 잡힌 몰트의 풍미와 향기로운 홉의 쌉쌀함으로 산뜻하면서도 드라이한 완벽한 페일 라거란 얼마나 멋진가! 페일 라거에도 여러 가지 서브 스타일이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루기로 하자.
이번 겨울, 격동의 양강 맥주 전쟁에 3대장인 롯데가 신제품을 출시했다.
솔직히 말해서 ‘4세대 맥주’라는 컨셉을 내세우는 크러시의 테이스팅 리뷰는 재밌기도 어렵기도 하다. 맥주의 특성 자체가 면면이 매우 약한 강도를 가지고 있어 집중할 만한 포인트도, 술술 뽑아낼 수 있는 노트도 없다. 풍미가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 이 스타일의 특징이기도 하나 보는 이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게 없다고나 할까. 이만 핑계를 마치고, 테이스팅 노트를 써보자.
Tasting Notes
외관_ 매우 투명하고 밝은 황금빛. 끊임없이 올라오는 작은 기포가 세밀하다. 새하얀 거품, 헤드는 오래 유지되는 편이다.
향과 풍미_ 밝은색 맥아의 고소한 곡물의 향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꿀물같이 옅은 단맛, 혹은 물을 많이 탄 옥수수차 같은 느낌으로 약한 강도의 몰트 특성을 가지고 있다. 홉의 존재감은 한층 더 미미하다. 향에서는 언뜻 풀 내 같은 산뜻한 뉘앙스가 느껴지나 매우 약하다. 홉에서 오는 쌉쌀함 역시 거의 없다. 크게 걸리는 것 없이 깨끗한 아로마를 가지고 있고, 드라이하고 부드러운 청량감을 가지고 있다.
마우스필과 바디(입안에서 느껴지는 맥주의 질감과 무게감)_ 탄산 강도가 높다. 하지만 거친 탄산이 목을 긁고 넘어가는 여타 제품과 달리 작은 기포가 입안에서 터지면서 부드러운 목 넘김을 어필한다. 아쉽게도 올몰트 맥주의 무게감은 기대할 수 없다. 클라우드와 달리 예상 밖으로 (어쩌면 예상대로) 가볍고 바삭하다. 입 안에 남은 여운은 누룽지 맛 캔디처럼 구수한 단맛을 남기는데,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차라리 끝까지 아주 건조하게 떨어졌으면 더 깔끔했을 것 같다.
총평_ 가볍고 깔끔한 대중적인 라거의 지향점을 가지고 있다. 가뿐하게 마시는, 그야말로 한국인의 사랑 라거의 본령 같은 맥주다. 이제 올몰트 맥주라고 함은 더이상 단종된 맥스나 클라우드가 아닌, 크러시와 테라가 새롭게 정의할 영역임엔 틀림없다. 진한 풍미와 묵직한 바디를 자랑하던 프리미엄 라거는 이로써 종말인 것 같다. 아쉬운 마음은 투명하고 유려하게 커팅된 병 디자인과 카리나를 통해 시각적으로 달래보자.
리뷰를 쓰고 보니 참 단순한 맥주다. 단순한 맥주. 복잡한 세상에 조금이나마 심플할 수 있는 그런 맥주,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겠지? 크러시는 편하게 부담없이 마실 수 있는 산뜻한 맥주이다. 이런 맥주는 이미 시장에 넘치는 것도 사실이다. 그 렇다면 차별화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에디터B의 조언으로 같은 롯데주류의 처음처럼과 소맥 궁합을 도전해보았다.
두 번째로 구매한 크러시는 다른 대형 마트에서 구입했는데, 컨디션의 문제인지 테이스팅 노트때와 달리 아쉽게도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소주가 필요하다. 소맥을 일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하기에 소맥 테이스팅엔 자신이 없었지만, 처음처럼을 탄 크러시는 다시 살아났다! 소주의 매끈한 단맛과 알코올의 쓴맛이 균형을 잡아준다. 역시 소맥인가?!
크러시의 광고와 요즘 출시되는 대기업의 맥주를 보자면 소맥의 반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젊은 층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켈리에 뒤이어 이렇게 연하면서 가벼운 올몰트 맥주를 어떻게 이해해야될까? 본인이 어느새 기성 세대로 편입된건 아닐까 걱정된다.
크러시는 카리나를 모델로 발탁하면서 전형적인 맥주 광고에서 탈피된 모습을 보여줬다. 캬 소리와 화이팅 넘치는 회식이나 빛나는 청춘 따위 없는 광고는 신선했고, 여성 모델의 이미지로 소비하지 않은 것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4세대 맥주라는 컨셉으로 기존 맥주와 확실히 선 긋고 싶어한다는 점이 느껴진다.
다만 중요한건 예쁜 병 안에 담긴 맥주 자체가 아닐까? 브랜드 차원의 핵심 가치는 새로우나 맥주라는 본질적인 시각에선 멋과 개성의 표현이 누락된건 아닌지 아쉽다. 새로운 형태와 비주얼로 관습에 도전하는 크러시를 응원한다. 새로운 선택지는 항상 우리에겐 필요하니까.
About Author
김미연
비어 소믈리에. 이 생소한 직업을 전문적인 업으로 만들고자 고군분투 중이다. '맥주 테이스팅 코스'를 만들어 성수동에서 퍼멘티드 고스트(Fermented Ghost)를 운영하고 있다. 이 곳에선 당신을 위한 맥주 경험을 디자인한다. 맥주의 다채로운 매력을 큐레이션하며, 맥주를 경험하는 맥락을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