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그런 건 없다. 30대는 꼭 해야 하고 20대는 하지 않아도 괜찮은 게 있을까?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있다면 나이로 구분되지는 않을 것 같다. 모든 건 사바사, 케바케가 아닐까.
나는 올해 행복한 순간을 찾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던 것 같다. 언제,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건 무엇이며, 아무리 바빠도 최소한 지키고 싶은 건 무엇인지 찾으려 애썼다. 노트북을 살리기 위해 디스크 조각 모음 하는 것처럼. 나에 대해 잘 안다고 확신했지만, 잘 몰랐음을 깨닫는 한해였다. 이것도 디깅이라고 해야 할까. 나 자신을 디깅한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예전보다 행복하다. 조바심 나지 않고 외롭지 않기에 불안하지도 않다. 이 글을 읽으며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세 가지’ 정도면 떠올려 보면 좋겠다(너무 많은가?). 퇴근 후 산책이나 모닝커피처럼 사소한 순간이어도 괜찮다. 작은 조각이 모이면 삶이 흔들릴 때마다 지탱해 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소개할 10가지 덕분에 행복했다.
올해의 치킨
BHC 마법클
올해도 치킨을 무지 먹었다.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궁금해서 7월쯤에 카운트를 했는데 그때 이미 50건을 넘겼다. 아마 12월까지 합치면 70건은 거뜬히 넘겼을 거다. 올해 가장 많이 먹은 치킨은 두 가지, BHC 마법클과 치킨플러스 조선레드 치킨. 그중 한 치킨에게만 우승 타이틀을 줘야 한다면 심사숙고해서 ‘BHC 마법클’이다. 마늘, 버터 두 가지의 조화는 사기에 가깝다. 보통 마늘을 사용한 치킨은 마늘의 매운맛을 살리는 쪽은 택하는데, 마법클은 단짠에 집중했다. 포장을 뜯는 순간 달콤한 향이 복도를 순식간에 점령한다. BHC에서 가장 좋아하는 핫후라이드, 맛초킹보다 이제는 마법클을 더 사랑하게 됐다. 이 치킨 때문에 올해 다이어트도 실패했다(핑계다).
올해의 인터뷰
배우 장나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몰라서 헤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럴수록 더 잘하고 싶은 것에 매달리고, 자신이 소중하다는 걸 잊어요. 근데 하고 싶은 일이 먼저가 아니에요. 중요한 건 내가 멀쩡해야 한다는 거예요.” 배우 장나라가 해준 말을 여기저기 전파하고 다녔다. 하고 싶은 건 많고, 몸뚱아리는 하나여서 지칠대로 지친 친구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어서. 디에디트의 인터뷰 시리즈는 장나라를 시작으로 2024년에도 계속 이어질 예정이다. 그 시작을 함께 열어준 장나라 배우에게 감사의 마음을 다시 하번 전하고 싶다. 기사 링크는 [여기].
올해의 전통주
너디호프
막걸리를 사람에 비유하면 솔직하고 밝은 친구다(ENFP 같은 느낌). 와인이나 위스키처럼 깊고 진중한 면을 막걸리에서 아무리 찾으려도 해도 찾을 수 없다. 그게 막걸리의 미덕이다. 한 모금 마시자마자 바로 느껴지는 경쾌함과 직관적인 맛, 그게 좋아서 올해도 많은 막걸리는 많이도 마셨다. 너드브루어리의 너디 호프에는 바질이 들어갔다. 요즘 양조장에서는 다양한 부재료를 사용해 이색적인 막걸리를 만드는데, 바질만큼 잘 어울리는 막걸리는 보지 못했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침이 고인다. 온라인으도 구매할 수 있다. 링크는 [여기].
올해의 소설
스위처블 러브 스토리
김수연 작가의 <스위처블 러브 스토리>는 단편집이다. 사랑에 대한 여섯 가지 소설을 묶었다. 나는 한없이 진지하고 무거운 소설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읽지만 쉽게 손이 가지는 않는다. 이 소설은 적당히 가벼우면서 위트 있어서 좋다. 하루아침에 전 남친과 전 여친의 몸이 바뀌며 X의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이야기, 한 번도 연애해본 적 없는 타로카드 마스터가 연애 상담을 봐주는 이야기 등 설정만 들어도 관심이 생기는 소설들이다.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은데 부담스럽지 않은 작품을 찾는다면 <스위처블 러브 스토리>를 추천한다. 김수연 작가의 다음 소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링크는 [여기].
올해의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지진으로 온 세상의 아파트가 무너졌다면 영화가 보여줄 건 뻔하다. 우르르 쾅쾅 아파트가 무너지는 장면 보여주고 관객들 심장 쫄리게 만들고, 황량한 도시를 담으며 아득한 공포를 체험하게 만드는 거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그 반대다. 상황을 넓게 찍지 않고 인물을 좁게 찍는다. 사건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눈동자, 표정, 손동작 같은 것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 사람을 해치는 장면, 신나서 춤을 추는 장면에서도 그 행위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림자를 보여준다거나. 나는 영화를 볼 때 ‘어떻게 찍었는지’를 신경 쓰며 보는 걸 좋아한다. 영화는 결국 영상 언어이고 감독은 영상을 통해서 관객에게 말을 하니까.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언어는 해석할 것이 많아 흥미로운 영화였다. 넷플릭스에 올라와 있으니 한 번 감상해 보는 걸 추천한다. 되도록이면 큰 화면으로.
올해의 피자
Pizzeria da Gaetano
이탈리아 나폴리 피자 협회는 진정한 나폴리 피자의 맛을 보호하고 전 세계로 알리기 위해 ‘나폴리 피자의 8가지 규정’이라는 걸 만들었다. 장작 화덕을 쓸 것, 크러스트 두께는 2cm 이하, 온도는 485도, 피자 가운데의 두께는 최대 0.3cm 등 여덟 가지 조건이다. 협회 홈페이지에서는 나폴리 피자 협회의 인증을 받은 전 세계 핏제리아 리스트를 확인할 수 있다. 몇 달 전 후쿠오카 여행을 갔을 때 후쿠오카의 유일한 나폴리 협회 인증 피자 가게에 방문했다. 관광객 없이 현지인만 있는 곳이었고, 웨이팅은 없었다. 긴 설명 필요없다. 일본에서 먹었던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후쿠오카에 간다면 무조건 가보자. 한국에서 먹어본 최고로 맛있는 화덕피자와 무엇이 다르냐고 물으면 크게 다르진 않다. 비슷하게 맛있다. 비슷하게 ‘최고로’ 맛있다. 구글맵 링크는 [여기].
올해의 아이스크림
하겐다즈 피스타치오 앤 크림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이탈리아에서 먹은 피스타치오 젤라또. 한국에서는 그것과 비슷한 젤라또를 찾기가 힘들었다. 파는 곳은 있지만 맛은 영 다르다. 하겐다즈에서 피스타치오 앤 크림이라는 신제품을 출시했다. 피스나치오 맛이긴 하지만 젤라또가 아니기에 식감은 당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은 기본적으로 밀도가 높기 때문에 제법 쫀득하고, 구운 피스타치오의 향이 특히나 좋다. 홈파티 할 때 젤라또를 꼭 시키는데, 앞으로는 이것 하나 사놓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올해의 재능
슬릭백
새로운 스킬을 익히는 건 언제나 즐겁다. 올해는 ‘슬릭백’이라는 스킬을 익혔다. 게임으로 치면 전투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일종의 ‘광대 스킬’인데, 술자리에서는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 1차 술자리를 파하고 2차로 이동하는 도중에 슬릭백을 써서 축지법처럼 빨리 간다든지. 부작용은 생각보다 하체 근육을 많이 사용하고 쉽게 숨이 차기 때문에 쿨타임이 길다는 것. 스팀팩 쓴 마린처럼 HP가 쭉쭉 줄어드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올해의 스마트폰
갤럭시 Z폴드5
무겁고 불편했지만 광활한 화면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던 애증의 갤럭시 Z폴드4. 마침내 업그레이드되어서 돌아온 갤럭시 Z폴드5는 더이상 무겁고 불편하지 않다(익숙해져서 일 수도). 손에 착 들어오는 그립감이 마음에 쏙 들고, 커버 디스플레이는 전보다 넓어져서 사용성이 확 좋아졌다. 디자인도 이전 모델보다 젊어져서 덜 ‘아재폰’스럽다. 물론 아직도 개선할 점이 있긴 하다. 커버 디스플레이에는 S펜을 사용할 수 없고, S펜 내장이 되지 않는다. 두께가 더 얇아지고 디스플레이 크기는 더 넓어지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보통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볼 때 펼쳐서 사용하는데 화면 비율이 맞지 않아 낭비하는 여백이 많다. 아, 그리고 쨍한 레드 같은 컬러가 있으면 확실히 아재폰 같지 않을 텐데, Z폴드6에서는 과감한 컬러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 쓰고 나서 보니 아쉬운 점이 몇 개씩 나오는데, 어쨌든 내게는 올해의 스마트폰이다.
올해의 실망
디아블로4
3주 정도 플레이했던 것 같다. 기대가 컸고, 실망도 컸다. 첫 주에는 몇 년만에 PC방에 가서 새벽까지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지만, 플레이 시간이 누적될수록 지루해졌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디아블로4를 하다가 졸았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졸린 게임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게임을 하며 지루함을 느낄 땐 나도 아쉬움이 컸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일주일이라도 행복했으니 그걸로 됐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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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기계식 키보드와 전통주를 사랑하며,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