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가지는 안된다. 오직 하나, 마지막으로 아이스크림 딱 하나 먹는다면? 아이스크림을 사랑하는 9명에게 물었다.
설레임 / 음악평론가 김윤하 @romanflare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 사실 아이스크림만이 아니라 단것 자체를 크게 즐기지 않는다. 설레임은 ‘단 걸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아이는 평생 될 수 없겠구나’, 커피잔과 맥주병 옆에서 칙칙한 표정을 짓던 20대의 나에게 처음 다가온 아이스크림이었다. 시작은 누군가 말한 ‘’설레임’이 숙취 해소에 좋다’는 말이었다. 그날부터 숙취가 있을 법한 밤마다 무심코 ‘설레임’을 찾았다. 혼자 먹을 때도 좋았지만, 아이스크림을 핑계로 술자리에서 단둘이 도망칠 핑계로도 ‘설레임’만한 게 없었다. 아무리 덥고 습해도 손을 더럽히지 않을 패키지를 양손으로 잡고 사심 있는 사람 옆에서 조금씩 녹는 우유 맛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대체로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럴 일이 드물어진 요즘도 설레임을 먹으며 종종 그 순간을 같이 꺼내 먹는다. ‘설레임’의 바른 표기가 ‘설렘’이라는 것까지, 어쩜 이렇게 서툰 어린 날 같은 맛이 날까 싶다.
엑설런트 / 이솝코리아 신혜원 @seeeeene_on_90
엑설런트. 산뜻한 오리지널 바닐라 맛, 더 농후한 프렌치 바닐라 맛 중 나의 기분에 맞게 하나를 선택하여 먹을 수도 있고 올리브유나 후추, 소금, 레몬필 어떤 때는 흑당 시럽 등 원하는 토핑을 올려 변주를 줄 수도 있다. 가끔 찾아오는 친구를 위한 훌륭한 디저트도 되며, 스트레스 받는 날에는 위스키를 부어 먹으면 알코올과 당분으로 화가 잔뜩 난 마음을 달래주기에도 좋다. 약간은 촌스러운 듯한 반짝이는 파랑, 금색 포장지로 포장된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채워두면 별것 아니지만 부자가 된 기분이기도 하고.
찰떡아이스 / 전통주 브랜드 사온서 대표 이우건 @4oz.seoul
아이스크림은 행복과 갈등 사이의 아이러니. 한국적인 미감이 일상에 녹아든 아이스크림이라면, 찰떡아이스가 떠오른다. 쫄깃한 쑥떡 속에 단단히 얼린 팥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는 이 조촐한 간식은, 시간이 녹아들수록 더 아름답다. 나무 포크를 거부하는 단단한 질감도 좋지만, 살짝 녹았을 때 몰랑해진 떡과 부드러운 속이 함께 입안에 들어오면, 그게 떡인지 아이스크림인지 헷갈릴 만큼 경계가 무너진다. 어릴 적 여름, ‘베스킨’도 ‘하겐다즈’도 없던 시절, 이건 가장 아이스크림답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오히려 가장 한국적인 디저트였다. 찰떡아이스는 늘 말하는 듯하다. “지금도 좋지만, 조금만 기다리면 더 맛있을 거야.” 그 느긋한 설득이, 나는 늘 좋다.
메가톤바 / 커피 칼럼닉스트 심재범 @oz_barista
마지막으로 먹을 아이스크림이라… 아포칼립스가 연상이 되는 제목으로 하나의 아이스크림을 골라야 한다니,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오랜 고민 끝에 ‘메가톤’으로 결정했다. 메가톤은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역대 최고의 무더위와 열대야의 시기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메가톤의 특징은 캐러멜 시럽을 기반으로 살짝 짠맛이 있고, 끈적이면서 달콤하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아이스크림과 같지만, 맛이 놀랍게 입체적이다. 메가톤은 이전까지 비비빅, 아맛나와 같은 단팥이 들어간 속칭 ‘하드‘계열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캐러멜 아이스크림과 같은 질감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특히, 메가톤의 쫀득한 캐러멜 같은 느낌을 좋아하는데, 1980년도 국내 최초로 등장한 오리온 모리나가 캐러멜을 연상시키는 맛이다. 어떤 이들은 메가톤을 ‘옥메와까'(옥동자, 메가톤, 와일드바디, 까마쿤) 유파의 시작이라고 하는데, 아이스크림바 메가톤의 족적이 의외로 깊다. 얼마 전, 우연히 회사 탕비실 냉장고에서 메가톤을 발견했다. 88년 고3 시절, 학교앞 슈퍼마켓에서 처음 먹은 이후, 90년도 군대 P.X를 거쳐, 2025년까지, 여름철 메가톤과의 인연이 제법 깊다.
폴라포 포도 / 설비 엔지니어 & 에디터 김고운 @goun.2
마지막 아이스크림이 갖추어야 할 필수 조건은 무엇일까. 끝맛이다. 먹고 난 후 미련조차 남지 않아야 상실감을 버틸 수 있다. 아이스크림은 대부분 처음 먹을 때 가장 맛있다. 먹는 과정에서 시원함에 익숙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도맛 폴라포는 다르다. 폴라포는 처음보다 끝이 강렬한 아이스크림이다. 우유가 섞이지 않은 셔벗류 아이스크림이라 그렇다. 30% 정도 남았을 때부터 진짜다. 녹아서 생긴 포도 주스는 얼음 알갱이에 자작하게 스며들어 슬러시가 된다. 개운한 달콤함은 폴라포 다른 맛도 따라갈 수 없다. 반드시 포도맛 폴라포이어야 한다. 잠깐 머리가 아프지만 그만큼 더위도 미련도 사라진다. 급한 마음에 너무 기울이지 않도록 주의하자. 옷이야 빨면 되지만 흘러버린 폴라포는 주워 담을 수 없다. 마지막 아이스크림이라면 더욱 소중할 테니.
석빙고 팥 / 미식 칼럼니스트 이주연, <봄은 핑계고> 저자 @typicalijoo
나는 식감에 유독 집착하는 편이다. “다 좋은데, 식감이 아쉽다”라는 말로 여러 셰프를 괴롭게 하기도 했다. 증명할 길은 없지만, 부산 사람들이 유난히 식감 있는 음식을 선호한다고 믿는다. 적어도 우리 집은 그렇다. 오징어튀김도 굳이 마른오징어를 불려 쓰고, 지역에선 ‘오그락지’라 부르는 무말랭이무침도 두툼하게 나박 썬 무를 사용해 식감이 무척 질기고 단단하다. 여기에 불린 마른오징어까지 넣는다. 턱이 발달할 수밖에 없는 집에서 태어난 나는 어릴 적부터 ‘석빙고 팥’, 한 우물만 팠다. 부산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공장이) 부산을 떠나지 않은 이 아이스크림은 나이대에 따라 ‘석빙고 아이스께끼’ 혹은 ‘석빙고 아이스크림’이라 부른다.
석빙고 팥의 가장 큰 특징은, 돌처럼 단단한 경도(硬度)다. 치아가 멀쩡한 청년도 입을 살짝 옆으로 벌려 송곳니와 어금니로 베어 물 정도로 딱딱하다. 한 번에 베지 못해, 물었다 뺐다를 반복할 때도 있다. 겨우 베어 문 조각에는 팥 거피가 박혀 있어 꺼끌꺼끌하다. 그렇다면 맛은 어떨까? 전국구 팥아이스크림 ‘비비빅’과 비교하자면, 확실히 덜 달고 짭짤하며, 견과류의 고소함이 있다. 실제로 비비빅보다 나트륨 함량이 높고, 당은 적다. 팥과 당으로 정직하게 만든 비비빅과 달리, 석빙고 팥에는 땅콩버터, 아몬드가루, 카카오가루 등이 들어가 있어 확실히 복합미가 있다.
서울에 올라와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아이스크림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비비빅을 입에 물어보지만, 석빙고 팥에 익숙해진 입맛에는 영 미끄덩하고 ‘니끼’하게 느껴진다. 그러다 올해, 우연히 ‘B마트’에서 석빙고 팥을 다시 만났다. 하지만 십수 년 만에 맛본 석빙고 팥은 예전만큼 단단하지 않았다. 예전보다 많이 물러져 있었다. 아마, 여전히 이 빙과를 좋아하는 오랜 팬들이 나이를 먹으며, 그들의 치아 건강에 맞춘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여담이지만, 같은 회사에서 나오는 다른 아이스크림도 제법 괜찮다. 특히 초코 맛은, 물맛이 지배적이라고 할까. 고디바 아이스크림의 대척점에 있는데, 텁텁하지 않고 시원해서 나름의 매력 있다. 나이가 드니, 점점 고향 것들이 좋아진다. 효성어묵, 덕화명란 그리고 석빙고.
구구 크러스터 / 프리랜서 에디터 지정현 @g_junghyeonn
고백하자면,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먹는다. 불어난 체중에 늘 낙담하기에, 지금 먹는 아이스크림은 항상 최후여야만 한다. 아이스크림 할인점 앞에서 ‘이번에만 먹고 운동하자’ 다짐한 뒤, 망설임 없이 고르는 건 늘 구구 크러스트. 아이스크림에 건강함을 바라는 건 사치다. 달고, 중독성 있어야 하며, 꾸덕한 식감이 입안을 가득 채워야만 한다. 구구 크러스트를 한입 퍼먹는 순간, 그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 캐러멜 시럽이 혀끝을 감싸고, 바닐라가 살며시 덮으며, 초콜릿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그리고 ‘오도독’ 씹히는 아몬드. 오도독, 오도독. 그 소리를 들으며 직감한다. 이번 다짐도 무참히 깨지고 마는구나. 구구 크러스트, 최후에 늘 승리하는 아이스크림이여. 올해 여름의 나는 다르니 긴장하도록. 원고를 쓰기 전 그 맛을 기억하기 위해 콘을 하나 사 먹었지만.
누가바 / 디에디트 에디터B @summer_editor
최근에 이런 기사를 봤다. ‘아재 개그를 들으며 자란 아이는 강하게 자란다.’ 정확히는 나는 그 기사를 읽은 게 아니라, 기사 제목만 읽었기 때문에, 이유가 무엇인지, 혹시 영국의 모 대학교 연구 결과는 아닌지 아는 바가 없다. 이상하게도 나는 누가바를 보며 그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1974년에 탄생한 아재 개그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아이스크림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마지막으로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자문했을 때 처음엔 화려한 것만 떠올렸다. 빵또아 레드벨벳 맛이라거나 구구콘이라거나. 마지막 아이스크림을 먹는 상황이라면 어떤 이유로는 지구가 멸종을 앞두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결국 마음이 멈춘 곳은 단순하다는 말로도 부족해보이는 소박한 아이스크림 ‘누가바’였다. 어린 시절, 고향집에는 항상 누가바가 있었다. 상비약처럼. 누가바는 오직 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슈퍼마켓에 가기 전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아버지, 저 슈퍼 갈 건데,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아버지는 누가바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누가바의 건재함을 보면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건강해서 다행인 아버지가 떠오른다. 다정함을 모르고, 재미없는 농담을 하고, 화려하게 꾸밀 줄도 모르지만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쿠앤크 / 도터스 에스프레소바 대표 계예린 @daughters_espressobar
아이스’크림’, 크림이란 단어에 부합하는 녹진한 질감, 이 상할 일 없이 뭉근하게 씹어 입안에서 녹여 먹는 참 아이스크림, 바로 쿠앤크다.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아 어디에 얼마만큼 있는 것인지 예측할 수 없는 초코 쿠키 덩어리를 탐색하는 것도 쿠앤크가 주는 또다른 재미. 근데 쿠앤크에 커피가 들어가는 것 알고 있는 사람? 별로 없다. 쿠앤크는 그렇게 안 생겨서는 ‘으른 아이스크림’인 셈이다. 먹다 보면 어금니에 초콜릿이 끼기도 하고, 무더운 날엔 너무 금방 녹아 손 위로 줄줄 흐르기도 하지만, ‘참 아이스크림’다운 쿠앤크가 언제나 내겐 일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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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준
에디터B. 쓸데없는 물건을 좋아한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